해는 남성의 정열을 의미하고 밤의 달은 여성의 미색(美色)을 뜻한다 할까. 그리고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겠지만 달과 별의 세계를 여신이 주재(主宰)한다면 밤에 이루어지는 역사의 주인공은 여성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라의 왕궁에는 세 명의 여왕이 나타나서 어떤 여왕은 낮의 태양같이 빛났었고 어떤 여왕은 밤의 별처럼 요기를 피우기도 했다.
신라의 첫 번째는 제二十七대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요, 둘째 번은 제二十八대의 진덕여왕(眞德女王)이다.
본장(本章)에서는 연대순으로 기술해 오던 왕궁비사(王宮秘史)로서 마침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대목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대(後代)의 진성여왕의 비화까지 여기서 함께 이야기하고, 겸해서 공주들의 연애관계도 본장에 함께 소개하려고 한다.
제二十六대 진평왕(眞平王)은 삼대 선왕(三代先王)들이 대신라로 중흥(中興)시킨 뒤를 이어서 태평세월을 누릴 수 있었을 뿐 이렇다 할 치적(治蹟)도 없는 평범한 왕이었다. 선왕들이 이룩해 놓은 부국강병(富國强兵)으 덕택으로 고구려와 백제도 감히 넘보지 못했으므로 전쟁도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국내가 평온하고 생활에 여유가 있었으므로 풍류적인 문화가 발달했는데 특히 불교가 전정해서 중국으로 불교를 연구하러 가는 유학승(留學僧)이 많았다.
진평왕 재위 四十년에 중국에서는 수(隨)나라가 망하고 당(唐)나라가 일어났으므로 신라에서는 새로운 당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고 조공사(朝貢使)를 보냈다.
왕은 왕위에 오른지 반세기(半世紀) 이상이나 되는 五十四년이나 되었으나 별다른 역사적 사건도 없이 승하했는데 왕자가 없고 공주들만 있었으므로 맏딸 덕만공주(德曼公主)가 최초로 여왕(女王)이 되어서 제二十七대의 선덕여왕(善德女王)이라고 칭했다. 이 해가 당나라 연호로는 정관(貞觀) 육년이었고 서기(西紀)로는 六三二년이었다.
이 여왕은 슬기와 덕이 있어서 남왕(男王)에 못지않은 훌륭한 임금 노릇을 해서 신라 여성을 대표할 여걸이라 하겠다.
이 시대에는 역대 불교사에 빛나는 고승(高僧)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당나라에 유학을 갔었고, 김유신 장군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경 너머의 일곱 개 성(城)을 점령했다. 그리고 불교문화의 번영은 자연 사찰 불상을 만들기 위한 건축물과 조각 회화 등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유명한 황룡사탑(皇龍寺塔)이 세워졌던 것이다.
여왕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다음의 세 가지 일화로도 알 수 있다.
당나라의 태종(太宗)은 신라에서 보낸 사신이 돌아오는 길에 신라 왕실에 대한 답례물 가운데 홍·자·백(紅·紫·白) 세 가지 종류의 모란꽃 그림과 함께 모란꽃씨 석 되를 보내왔다. 그 당시 신라에는 아직 그 소담스럽고 고운 모란꽃이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모란이란 꽃은 그림만 봐도 흐뭇합니다. 꽃송이가 이렇게 크고 빛이 이렇게 고우면 향기도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어서 궁중 화원에 심어서 꽃도 보고 향기도 맡고 싶습니다.”
궁녀들은 그림을 보면서 떠들썩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을 자세히 보고 있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 모란꽃을 당나라에서는 제일 소중히 여기고 국화(國花)로 정했다지만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빛도 곱고 꽃송이도 소담스러워서 복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향기가 없는 꽃은 맛없는 술 같지 않으냐?”
여왕의 말을 듣고 의아해 한 궁녀들은 반문했다. “그림으로 그린 꽃에서 어떻게 향기가 납니까? 저 난초꽃 그림 병풍에서도 향내가 안 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너희들에게 코만 있지 눈이 없기 때문이다.” “호호호. 왜 저희들 눈이 없습니까?”
“있어도 볼 줄 모르면 없는 거와 같지 않으냐?”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눈이 없고 어리석다는 것이다. 저 병풍 그림의 난초에는 나비가 쌍쌍으로 날아들고 있지 않으냐. 그것은 난초꽃에 향기가 풍기기 때문에 나비들이 모여든 것이다. 그러나 이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꽃 그림에는 나비가 한 마리도 없다. 이것만 봐도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냐?”
“그럴까요?”
궁녀들이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 중의 하나가 머리를 흔들다가 말했다.
“나비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리고 싶으면 그리고 그리기 싫으면 안 그리니까 모란꽃에 향기가 없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붉은 꽃, 보라 꽃, 흰 꽃, 세 폭 그림에 모두 나비가 없지 않으냐? 그림에는 사실에 없으면 없는 대로 그리고 있으면 있는 대로 그리는 법이다. 너희들 말이 맞나, 내 말이 맞나, 이 씨를 심어서 꽃이 핀 뒤에 알아보자.”
“네, 그때 의문은 풀릴 것입니다.”
궁녀들은 모두 여왕의 예언을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이 모란꽃 수수께끼는 고관들 사이에도 유명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여왕의 기발한 착상(着想)에 놀라면서도 여왕의 의견에 찬동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당나라에 가서 직접 그 꽃을 보고 온 사신에게 물어보자.”
그들은 당나라에 다녀온 사신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도 식물학적 관찰을 하지 않았으므로 자기가 모란꽃을 보았을 때에 나비가 꽃 근처에 나르고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 수수께끼는 씨를 심어서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수수께끼 화제도 시일이 흐르는 동안에 모두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계절은 바뀌고 모란꽃이 자라서 꽃이 피었다. 소담스러운 꽃이 곱게 피었으나 과연 모란꽃에는 향기가 없었다.
“아, 여왕께서 하신 예언이 맞았다.”
그때야 신하들과 궁녀들은 여왕의 슬기에 다시 감탄했다는 좀 싱거운 이야기보다도 성적(性的) 흥미를 겸한 이야기도 있다.
선덕여왕도 그 시대의 왕실 습관대로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여왕은 신심(信心)으로 훌륭한 영묘사(靈妙寺)를 세웠는데 절 경내(境內)에 옥문지(玉門池)라는 아담한 연못도 마련했다. 옥문은 여자의 국부라는 뜻인데 무슨 까닭으로 그런 선정적(煽情的)인 이름을 붙였는지 전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어느 해 겨울에 이 옥문지에 이상한 징조가 나타나서 중들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화제가 되었다.
영묘사 옥문지 얼음장 위에 흰 개구리떼가 나와서 밤낮 사흘 동안이나 울어댔다. 철 아닌 개구리가 우는 것도 괴이하지만 백색 개구리가 또한 흉조(凶兆)야. 세상에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른다.
이런 소문이 점점 켜져서 유언비어(流言蜚語)로 화하자 인심이 흉흉해졌다. 선덕여왕은이 소문을 듣고 조용히 생각했다.
“이것은 길흉간에 중대한 신불(神佛)의 계시(啓示)다. 이 계시의 뜻을 미리 판단해서 알면 흉조도 길조(吉兆)로 이용해서 복이 될 수 있다.”하고 일관(日官)에게도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는 “겨울에 흰 개구리가 나와서는 우는 것은 흉조입니다.”라고만 말할 뿐 그 흉조가 어떤 사건의 예시(豫示)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개구리의 백색(白色)을 백제(百濟)라는 뜻으로 풀고 백제군이 기습해 온다는 징조로 판단했다. 그래서 알천 각간(閼川 角干)과 필향 각간(弼香 角干)에게 긴급 군사동원령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왜 갑자기 군사를 동원합니까? 백제도 고구려도 공격해 올 기미는 전혀 없습니다.”
“장군들도, 나도 모르기 때문에 신불께서 백제군의 기습을 알려 주신 것이니, 내 말대로 빨리 동원준비를 하시오.”
“네.”
장군들은 곧 전쟁 준비를 하고 다시 물었다.
“어느 방면으로 적군이 기습할 것 같습니까?”
“여근곡(女根谷)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복병했다가 안심하고 기습해 오는 백제군을 역습하시오. 그러면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올 것이요.”
여왕은 여근곡이라는 말을 여성으로서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정색을 하고 냉정하고 사무적으로 명령 내렸다.
여근곡은 경주 서쪽 부산(富山) 밑에 있는 요새(要塞)이다. 이천명의 신라군은 그 곳에 미리가서 복병하고 있다가 밤중에 기습해 온 오백명의 백제군을 독 안에 들어온 쥐처럼 포위하고 몰살시켜 버렸다.
그때야 비로소 두 명의 대장도 자기들이 전투 직전까지 선덕여왕의 명령을 비웃은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백제군의 후속부대가 천이백 명이나 되었으나 초전에 기세를 올린 신라군은 용기백배해서역시 전격적으로 전멸시켜 버렸다.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한 두 장군은 여왕에게 물었다.
“어떻게 여근곡으로 백제군이 기습해 올 것을 미리 아셨습니까?”
“남자인 장군들에게 말하기는 거북하오. 그러나 천기(天機)와 군기(軍機)에 관한 중요한 문제니까 거리낌없이 알리겠으니 장래의 참고로 삼으시오.”하고 태도를 단정히 하자 남자의 장군들이 도리어 수줍어하며 옷깃을 여미고 경청했다.
“옥문지의 옥문과 여근곡의 여근이 같은 뜻이고, 흰 개구리의 백(白)은 서쪽 방향이며 백은 또 백(百)과 음이 통하기 때문에 백제군대로 판단했소.”
“…”
두 장군은 못 이름과 골짜기 이름이 모두 여자의 국부를 뜻하였기 때문에 감탄하는 웃음도 웃을 수가 없었다.
“그야 저희들도 싸우면 이길 자신은 있었습니다마는, 이번 전쟁에 아군에겐 거의 피해가 없을 정도로 대승리를 했습니다. 이 승전을 미리 말씀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좀 이상스러운 설명이 되오마는 남근(男根)과 여근이 싸우면, 처음에는 남근이 공격해 오지만 결국 여근에게 포위되어서 죽고 마는 법이요…”
두 장군은 여왕의 설명이 점점 해괴해지므로 송구스러워 했으나 여왕의 표정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여왕인 내가 다스리는 우리나라 땅 여근곡에 남왕(男王)의 백제왕이 보낸 군대가 패하는 것은 음양지리(陰陽之理)가 아니겠소.”
결론이 이쯤되자 단순히 선정적인 해자법(解字法)이라기보다는 여왕의 자기 앞에는 온 세계의 남자 왕들이 굴복해야 한다는 여강남약(女强男弱)의 위엄까지 엿보이는 듯하여 두 장군은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
이처럼 예언을 잘하던 선덕여왕은 자기가 죽을 날도 예언하고 그날이 되자 모든 준비를하고 자는 듯이 극락왕생(極樂往生)했던 것이다.
여왕은 모년 모월 모일(某年 某月 某日)에 자기가 승하할 것을 예언하고 장지(葬地)까지 지시했다.
“내 능은 도리천(兜利川)중에 정하고 곡을 하지 말고 장례 지내라.”
신하들은 도리천이 처음 듣는 지명이라 어리둥절하였다.
“도리천이 어느 산지(山地)에 있습니까?”
“낭산(狼山) 남쪽에 가면 보리수(菩提樹) 숲이 있다. 그 숲 윗 자리가 도리천의 위치이다.”
신하들이 낭산 남쪽을 답사해 본즉 과연 보리수 숲 위의 지점에 보통 사람이 보아도 명당자리가 있었다. 그래서 여왕 생전에 미리 훌륭한 능을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몇 해 후에 예언한 그 날이 되자 앓지도 않고 여왕은 잠든 채 그냥 극락왕생했다. 국상은 미리 준비한 능소의 봉분만 파고 쉽게 거행되었다.
선덕여왕의 유해를 안장한 후 십년 만에 문호왕(文虎王)은 그 낭산능 밑에 큰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사천왕의 부처를 모셨다. 이때서야 낭산능의 장소가 도리천의 명당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깨닫고 또 한 번 놀랐다. 사천왕위가 도리천이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극락 도리천으로 되셨다. 그래서 그 능소 밑에 사천왕을 모신 절이 설 것까지 미리 아셨다”하고 사천왕사의 승려들도 선덕여왕의 능소를 불연성지(佛緣聖地)로 숭상하고 잘 모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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