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절망에 빠지다
어쨌든 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 성공은 예전에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 위대한 소비에트연방은 수소탄을 탑재한 대륙간탄도탄을 보유하고 있다 " 라고 선언하였을 때만해도 단지 허풍으로 여기고 있던 서방측에게 그의 울부짖음이 결코 뻥이 아닌 서방측에 날카로운 비수였음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 흐루시초프의 주장은 허풍이 아닌 현실이었습니다 ]
서방이 상상이상으로 혼란에 빠지자 신이 난 흐루시초프와 그동안 장거리미사일의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소련군부 지도자들은 R-7 및 스푸트니크 개발의 아버지인 코롤레프를 순식간에 영웅으로 만들어 버림과 동시에 대대적인 대서방 정치공세를 강화하여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 스푸트니크 1호는 체제 선전의 훌륭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
연이어 11월 3일 발사된 스푸트니크 2호는 라이카 Laika 라는 이름을 가진 개를 탑재하여 최초로 생명체를 우주로 날려 보내는 업적을 거두었는데 이때 발사 된 500 kg 의 스푸트니크 2호의 무게는 대용량의 수소폭탄을 탑재하여 미국의 어디든지 공격 할만한 능력을 소련이 갖추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 스푸트니크 2호 (左) 는 생명체 (右 - 라이카) 를 처음으로 우주로 날려 보냈습니다.
또한 500 Kg 의 위성무게는 수소폭탄 탑재 ICBM 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
미국의 정책자들은 그들의 한계에 절망 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렇다고 국민들의 사기까지 떨어뜨리지는 말아야 했습니다. 미국은 언론을 통해 자신들도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였고 조만간 뱅가드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으로 계획 된 뱅가드 1호의 모형 ]
그러면서 사업 주체였던 미 해군에게 최대한 빨리 뱅가드 위성을 발사하도록 재촉합니다. 위성의 무게가 소련 인공위성의 5 % 에도 못미치는 작은 위성인 것은 다음의 문제였습니다. 일단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미국도 충분히 그런 능력이 있음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단지 발사시기 조절을 늦추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변명을 하여야 했습니다.
[ 미 해군 뱅가드 위성 개발팀은 정책 당국으로부터 재촉을 받습니다 ]
당국은 미 해군에게 애당초 1958년 여름경으로 예정 되었던 뱅가드 계획을 앞당겨 1957년도 안으로 발사하도록 재촉을 가합니다. 그만큼 미국은 다급하였던 것이었고 이런 상황을 알고 있던 미 해군은 밤낮으로 개발에 착수하여 1957년 내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고 대대적으로 공표 하였습니다. 미국인들과 서방세계는 미국이 멋있게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구겨질 대로 구겨진 자유세계의 자존심을 회복하여 주기를 바랐습니다.
[ 뱅가드 1호는 불과 1.6 Kg 여서 소련의 위성과 비교자체가 어려웠을 정도 였습니다 ]
아틀라스 로켓을 개조하여 제작된 뱅가드 로켓은 드디어 1957년 12월 6일 카운트다운 종료와 함께 힘차게 점화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만만하였던 미국의 기대는 불과 1초도 가지 못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로켓은 요란한 소음과 함께 불과 1m 정도 뜨고 난 뒤 쓰러지면서 대 폭발하는 참담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게 되었고 미국의 절망감은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 뱅가드 1호는 발사에 실패하였고 미국은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
이러한 뱅가드 로켓의 참담한 실패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소련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이 연구한 결과를 조금만 응용하면 충분히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실현하고 지원 받기위해 평소 정책 당국자들을 찾아다니며 인공위성의 효과에 대해 역설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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