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그날의 충격 [ 5 ]

鶴山 徐 仁 2007. 2. 19. 01:10

 

 

 

자존심을 버린 미국

 

1950 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정책당국이나 미 군부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인공위성은 단지 과학적 성과이외 별다른 매력이 없는 그저 그런 분야로 여기고 있었고 로켓은 주로 탄도탄의 운반체 정도로만 생각하여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초 뱅가드 프로젝트에 투입 된 자금도 ICBM 개발에 투입된 연구비에 비하면 미미하였을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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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이 미미하였던 뱅가드 계획을 무리하게 앞당긴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 발사를 기다리던 폭발직전의 뱅가드 로켓과 위성의 모습 ) ]

 

이럴 정도였으니 이 과학자의 호소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는 소련이 인공위성을 쏘아올린 후 미국이 뱅가드 계획을 급속히 추진하기로 하자 긴급 개조하여 설계한 뱅가드 로켓으로는 인공위성 발사가 어렵다는 점을 역설하였고 자신과 그가 이끄는 팀에게 기회를 준다면 1달 안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겠다고 장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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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육군 로켓개발팀이 별도로 구상하였던 익스플로러 1호 ] 

 

그런데 미국 당국 또한 미 육군 로켓개발팀을 주도하고 있던 이 인물이 그런 능력을 충분히 가진 사람임은 알고 있었지만 미 해군이 추진하던 뱅가드 프로젝트에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인물이 패전국 독일 출신의 과학자인 폰 브라운 ( Wernher von Braun 1912 ~ 1977 )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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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필요없는 우주개발의 선구자 폰 브라운 ]

 

그는 미 육군에서 주피터로켓 등을 개발하는 등 공을 세우기는 하였지만 제2차 대전 후  미국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건너오게 된, 나쁘게 말하자면 일종의 전리품으로 미국에 끌려와 있었던 독일 출신의 로켓 과학자였는데 이 사람과 그가 이끄는 팀에게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중대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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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후 미국에 정착한 독일 페네뮌테 연구소 출신의 로켓과학자

( 앞줄 右에서 6번째가 폰 브라운 ) ]

 

비록 전후 많은 독일 과학자들과 노하우가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미국 또한 고다드 ( Robert H. Goddard 1882 ~ 1945 ) 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로켓과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로부터 취득한 정보와 자료를 이용하면 V-2 를 능가하는 로켓제작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패전국 출신 과학자들이 미국 로켓분야를 선도하는 것은 내심 마땅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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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로켓 연구의 아버지 고다드 ]

 

하지만 미국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리라 생각하고 무리하게 추진하였던 뱅가드가 처참하게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알량한 자존심마저 휴지통에 넣을 수밖에 없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폰 브라운을 중심으로 100 여명의 독일 출신 엔지니어들이 로켓제작에 매진하고 있던 육군 미사일 개발팀에게 미국 정책당국은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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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 브라운이 이끌던 미 육군 미사일 개발팀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 익스플로러 1호 모형을 앞에두고 웃고있는 개발팀 수뇌부 ) ]

 

그들이 선택한 발사체는 최초의 IRBM 으로 이름을 올린 주피터 로켓이었는데 족보로 따진다면 V-2 의 직계 손자뻘이 되는 로켓이었습니다.  사실 V-2 를 개발한 독일 페네뮌테 로켓개발팀은 전쟁 전 독일우주과학협회가 전신입니다.  이들의 목적은 인공위성의 개발을 통한 우주개발이었는데 그 발사체로 일련의 로켓을 제작하였고 그중 A-4 로켓이 V-2 로 제식화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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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성 발사체로 선택 된 주피터 로켓 ]

 

컴퓨터도 없었고 CAD 는 상상도 못하던 시절 무려 3 만5000 번이나 설계도를 직접 손으로 그렸다 지웠다하면서 로켓 제작에 매진하였던 폰 브라운 박사는 V-2 가 발사에 성공하는 날 그의 스승이며 연구소 소장이었던 발터 도른베르거 ( Walter Dornberger 1895 ~ 1980 ) 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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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페네뮌테 연구소 시절의 스승 도른베르거 (左) 와 폰 브라운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던 폰 브라운은 1969 년 아폴로11 호 발사 때 독일에 있던

 도른베르거를 초빙하여 발사장 귀빈석에서 함께 역사적 순간을 지켜 보았습니다 ]  

 

" 오늘은 달까지 100 Km 가 가까워진 날입니다 "  이렇듯 인공위성에 대해 무한한 꿈을 가지고 있던 브라운과 그 일행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기회가 그들에게 부여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발사체 제작에 열중 합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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