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특별연설이 있은 1월 23일 미국 대통령도 신년 국정연설을 했다. 미국 대통령은 매년 초 연방의회에서 국정연설을 한다. 영국에서 나온 전통이다. 그러나 '여왕의 담화'로 알려진 영국의 국정연설은 내각의 국정보고서를 여왕이 대독하는 의전행사인 데 반해 미국의 국정연설은 "대통령은 수시로 연방의 현황(State of the Union)을 의회에 알리고 필요한 조치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는 연방헌법에 따른 대통령의 직무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첫 연설이 있은 1790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대통령들이 국정연설을 거르지 않은 것은 그것을 대통령 개인의 담화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제도에 부여된 직무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국정연설은 의회와 대통령의 수평적 권력 분립을 상징하는 한 편의 정치드라마다. 우선 대통령은 의회의 허락을 받고 연설한다. 매년 초 의회가 백악관에 공식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연설 장소를 '왕의 거처'인 백악관이나 로마 원로원을 흉내 낸 상원 대신 국민을 대변하는 하원으로 정한 것은 국정연설을 국민에 대한 백악관의 의전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원 경위가 대통령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하원 의장님, 미합중국 대통령입니다"는 짧은 구령으로 대통령의 입장을 알리는 절차는 헌법상의 권한과 의무를 수행할 때의 대통령은 사람이 아니라 제도라는 것을 일깨우는 상징이며 의전이다.
연설 도중에 기립박수를 포함해 여러 차례 박수가 터지지만 내빈으로 초대받은 사법부 인사들은 연설 중간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 남들이 다 박수 칠 때 사법부만 팔짱 낀 광경이 대통령한테는 결례이겠지만 '사법부의 팔짱'은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상징한다. 대통령에 대한 무례가 민주주의에 대한 예의가 되는 것이다. 합참의장 같은 고위 군인들도 외교나 국방이 아닌 국내 정치를 대통령이 언급할 때는 박수를 자제한다. 정치에 개입하지 않음을 군인의 긍지로 삼는 '무반(武班)의 의전'이다. 이처럼 일상의 민주주의는 떠들썩한 웅변과 담론이 아니라 조용한 일상의 전통과 의전을 통해 국민의 뇌리에 각인된다.
한국 대통령도 국정연설을 한다. 그러나 한국의 국정연설은 삼권분립을 상징하는 세련된 제도가 아니다. 청와대의 판단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특별행사로 인식돼 있다. 그렇지 않다면 1월 9일의 개헌 담화와 1월 23일의 대국민 연설처럼 국회가 아니라 대통령의 홈그라운드인 청와대의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원고도 없이 즉석 진행한 국민교양강좌를 시청자들이 연속시리즈로 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주몽'을 무찌르고 등단한 대통령의 연설을 지상파 방송 전부가 달려들어 생중계하는 권위주의 시대의 중계 관행에 짜증난 '국민 여러분'께 '권위주의를 청산'했다는 대통령의 담화가 공허한 독백으로 들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집권 초기에는 대통령의 돌격대를 마다 않던 여당이 집권 말기에는 대통령을 향해 돌격하는 한국 정당의 고질적 단명은 대통령 단임제 탓이 아니다. 청와대를 견제할 국회는 없고 오로지 대통령만 에워싼 채 여와 야가 여의도 내전을 치르기에 더 바쁜 우리의 기형적 의회정치는 정당이 대통령을 배출하는 대신 대통령이 정당을 만들고 양육해 온 '삼권 통일'의 전통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헌보다 급한 것도 많다. 4와 5의 최소공배수가 20이라는 초등 산수로 국가 중대사인 개헌을 재촉할 수는 없다. 대통령의 말처럼 다시 20년을 기다려야 할 만큼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목숨 걸고 지킬 이권이라는 전제가 오히려 비민주적이다. 차라리 대통령의 국정연설부터 권력 분립을 선포하고 상징할 세련된 의전으로 정립시켜라. '역사'와 '민족'으로 범벅된 거대담론에 빠져 정작 소중한 일상의 민주주의에는 무지한 거친 개혁을 개혁할 첫 단추는 이런 곳에 있다.
그래서 미국의 국정연설은 의회와 대통령의 수평적 권력 분립을 상징하는 한 편의 정치드라마다. 우선 대통령은 의회의 허락을 받고 연설한다. 매년 초 의회가 백악관에 공식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연설 장소를 '왕의 거처'인 백악관이나 로마 원로원을 흉내 낸 상원 대신 국민을 대변하는 하원으로 정한 것은 국정연설을 국민에 대한 백악관의 의전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원 경위가 대통령의 이름을 말하는 대신 "하원 의장님, 미합중국 대통령입니다"는 짧은 구령으로 대통령의 입장을 알리는 절차는 헌법상의 권한과 의무를 수행할 때의 대통령은 사람이 아니라 제도라는 것을 일깨우는 상징이며 의전이다.
연설 도중에 기립박수를 포함해 여러 차례 박수가 터지지만 내빈으로 초대받은 사법부 인사들은 연설 중간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 남들이 다 박수 칠 때 사법부만 팔짱 낀 광경이 대통령한테는 결례이겠지만 '사법부의 팔짱'은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상징한다. 대통령에 대한 무례가 민주주의에 대한 예의가 되는 것이다. 합참의장 같은 고위 군인들도 외교나 국방이 아닌 국내 정치를 대통령이 언급할 때는 박수를 자제한다. 정치에 개입하지 않음을 군인의 긍지로 삼는 '무반(武班)의 의전'이다. 이처럼 일상의 민주주의는 떠들썩한 웅변과 담론이 아니라 조용한 일상의 전통과 의전을 통해 국민의 뇌리에 각인된다.
한국 대통령도 국정연설을 한다. 그러나 한국의 국정연설은 삼권분립을 상징하는 세련된 제도가 아니다. 청와대의 판단에 따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특별행사로 인식돼 있다. 그렇지 않다면 1월 9일의 개헌 담화와 1월 23일의 대국민 연설처럼 국회가 아니라 대통령의 홈그라운드인 청와대의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원고도 없이 즉석 진행한 국민교양강좌를 시청자들이 연속시리즈로 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주몽'을 무찌르고 등단한 대통령의 연설을 지상파 방송 전부가 달려들어 생중계하는 권위주의 시대의 중계 관행에 짜증난 '국민 여러분'께 '권위주의를 청산'했다는 대통령의 담화가 공허한 독백으로 들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집권 초기에는 대통령의 돌격대를 마다 않던 여당이 집권 말기에는 대통령을 향해 돌격하는 한국 정당의 고질적 단명은 대통령 단임제 탓이 아니다. 청와대를 견제할 국회는 없고 오로지 대통령만 에워싼 채 여와 야가 여의도 내전을 치르기에 더 바쁜 우리의 기형적 의회정치는 정당이 대통령을 배출하는 대신 대통령이 정당을 만들고 양육해 온 '삼권 통일'의 전통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헌보다 급한 것도 많다. 4와 5의 최소공배수가 20이라는 초등 산수로 국가 중대사인 개헌을 재촉할 수는 없다. 대통령의 말처럼 다시 20년을 기다려야 할 만큼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목숨 걸고 지킬 이권이라는 전제가 오히려 비민주적이다. 차라리 대통령의 국정연설부터 권력 분립을 선포하고 상징할 세련된 의전으로 정립시켜라. '역사'와 '민족'으로 범벅된 거대담론에 빠져 정작 소중한 일상의 민주주의에는 무지한 거친 개혁을 개혁할 첫 단추는 이런 곳에 있다.
권용립/경성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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