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릉
신라 33대 성덕대왕의 무덤이다.
성덩왕릉은 신라 왕릉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전기를 이룬 능이다.
중국의 경우 왕릉은 왕의 치세기간 동안에 만든다.
중국의 왕릉을 수릉(壽陵)이라고 하는데 진시왕릉의 경우 13세때부터 51세때 까지 38년간 매년 70만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만든 능으로 그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신라의 왕릉은 선왕이 죽은 후에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왕의 능은 정상적인 형식을 갖추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고 쿠데타로 실각하는 왕의 능은 정상적인 왕릉으로서의 규모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희강왕릉이 그렇고 민애왕릉이 또한 그렇다.
<성덕왕릉>
왕릉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정확히 알 수 가 없다.
하지만 성덕왕릉은 왕의 사후 18년에 걸쳐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다음 왕인 효성왕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5년만에 능을 완성하지 못한 채 효성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아우 경덕왕 13년에 능이 완성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보고 알 수 있다.
성덕왕릉은 신라왕릉 중에서 난간석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능이다.
그리고 삼각형 받침대가 33개 세워져 있다.
전신문왕릉은 44개의 받침대가 그리고 무열왕릉에는 흙 속에 파묻혀서 몇 개인지 알 수가 없다.
<성덕왕릉 문인석>
성덕왕릉은 그의 아들인 효성왕 때에 5년간 받침대까지만 만들어진 후 경덕왕 대에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 2차로 증축되어진다.
그러나 효성왕 때에 만들어진 것은 전혀 고치지 않은 채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덧붙여 만들어진 것이다.
첫째 십이지신상을 만들어 왕릉 주위에 배치했다.
이것은 아주 독창적인 아이디어로서 정북 방향에 쥐상을 시작으로 하여 모두 12방위를 지키는 신수(神獸)를 세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덕왕릉에는 정확한 자신의 방향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문인석>
그것은 효성왕 때에 만들어진 받침대가 33개이므로 받침대 사이사이에 12마리의 신수를 정확한 방향을 맞춰서 배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고유방향에 가장 가깝게 배치하였다. 이것은 처음부터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것이 아니라 능을 조성한 후에 새로이 설치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특징은 난간석을 둘렀다는 점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왕릉에는 난간석이 없다.
그러면 난간석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왔다는 말인가? 인도의 산치에 가면 산치대탑이 있다.
산치대탑의 모습은 마치 신라의 왕릉처럼 봉분 모양이다. 거기에 주변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난간석과 왕릉사이에 탑을 돌 수 있도록 복도를 만들었다. 왜 성덕왕릉의 모습이 산치대탑의 모습과 닮았을까?
<석사자>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불교는 두 가지 형태로 발전했다. 먼저 5호16국시대에 전진·후진·북위 등으로 대표되는 북방 불교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고 불교는 황제의 권력 밑에서 정치적인 자문역할을 수행하면서 승단의 생명보호를 보장받으며 불법을 유지해 나간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구려와 신라의 불교가 북방불교 계통이다.
반면 남방불교는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이들의 정치 이념은 유교와 도교였다.
원칙적으로 한족사회에서는 승려들의 사상은 출가자의 법은 불법뿐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따라서 출가자(出家者)는 황제에게 절을 하는 것도 거부했으며 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군대에도 가지 않았다. 따라서 한족은 불교를 순수종교로만 발전했다. 남방불교를 백제에 전파되었다.
<귀부>
이렇게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북방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에서는 불교가 호국불교 형식으로 발전한다.
호국불교에서는 왕즉불사상(王卽佛思想)으로 발전한다.
즉 황제와 부처는 동격화(同格化)되고 황제는 권력 유지에 승단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경덕왕은 신라 천년을 통하여 왕의 전제권력이 최고의 정점에 도달했을 때의 왕이다.
경덕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성덕왕의 무덤을 석가모니의 무덤모양과 똑같이 만들었던 것이다.
<십이지신상>
셋째로 무덤 앞에 석인상과 석사자를 세웠다. 석인상은 칼을 차고 갑옷을 입었다.
그러나 앞면에는 도포자락을 입었고 뒤편에만 갑옷을 입었다. 이것은 왕릉 앞에서 예의를 지키고 자기의 본래 기능인 왕릉수호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갑옷을 입고 칼을 찬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건릉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러나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신라인들은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항상 신라화 하여 받아들였다.
문화의 기원은 인도와 중국이었지만 신라 고유의 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까닭이 있었다.
삼국사기 경덕왕 13년조에는 성덕왕의 능비를 세웠다는 기사가 있다.
능비를 세움으로써 왕릉의 조성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십이지신상(원숭이)>
성덕왕릉 귀부
신라 33대 성덕대왕의 비석을 받쳤던 귀부이다.
원래는 비석과 비석 위에 씌웠던 이수가 있었던 것이었으나 지금은 비신과 이수는 없어지고 비대좌인 귀부만 남았다. 실로 거대한 귀부이다.
네모가 나게 다듬은 돌 위에 조각된 귀부는 현재 거북머리 모양의 귀두는 파손되어 없어졌다.
몸체는 앞발에 5개의 발톱이, 뒷발에는 4개의 발톱이 새겨져 있고, 등에는 6각의 거북등무늬가 전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비신을 세웠던 자리를 살펴보면 특이하게도 비신을 꽂을 홈이 파여져 있지 않다. 그 대신 비신자리의 두께가 다른 비석의 두배 이상으로 두껍다.
이것은 비신의 두께 역시 매우 두꺼웠음을 알 수 있다.
두께가 두꺼우니 만큼 비신의 무게 자체로 넘어지지 않고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경덕왕13년 기사에 의하면 「성덕왕의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성덕왕의 능을 조성하는데 18년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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