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스크랩] 깨달음의 본질에 이르는 길이 멀고도 어렵도다 / 원원사터

鶴山 徐 仁 2005. 12. 5. 02:18
원원사지


현재는 사명이나 1669년 경주부윤 민주면이 간행한 동경잡기에는  원원사(遠願寺)로 표기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원원사(遠源寺)로 기록되어 있다.

원원사(遠願寺)는 '통일 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원한다' 는 의미를 지녔고,

원원사(遠源寺)는 '깨달음의 본질에 이르는 길이 멀고도 어렵다'는 의미를 지녔다.

 

<원원사터>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에 밀교인 신인종을 처음으로 전한 명랑법사의 제자인 안혜, 낭융 등이 김술종, 김의원과 김유신 등과 뜻을 모아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신라의 서울 동남쪽 20여리 되는 곳에 원원사(遠源寺)가 있다.

속설에는 안혜 등 네 대덕(大德)이 김유신(金庾信),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세운 것이라 한다.

네 대덕의 유골을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모셨으므로, 이 때 문에 이봉우리를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巖)이라고 불렀는바, 즉 네 대덕은 모두 신라 시대의 고명한 중들이다.


<삼국유사 명랑신인(明朗神印)조>

 

<원원사터석축>

 

김유신이 활동하던 시기라면 7세기에 이지만 7세기의 유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현재 전하는 유적으로 볼 때 800년 전후의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13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나말여초에 이 절의 스님인 광학(廣學)과 대연(大緣)이 왕건을 따라 개성으로 가서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정치군사적 자문을 했다고 한다.

 

태조가 고려를 세울 때에 역시 해적이 와서 소동하므로 즉시 안혜(安惠)와 낭융(朗融)의 후예인 광학과 대연 등 두 중에게 청하여 비법을 써서 기도로 진압하였으니 모두가 명랑의 계통이다.


<삼국유사 명랑신인(明朗神印)조>

 

<원원사터 동삼층석탑>

 

안혜, 낭융, 광학, 대연 등 네 대덕은 모두 신라 명랑법사의 후예들이고 원원사는 밀교인 신인종의 사찰이었던 것이다.


절터 앞에 늠름하게 서 있는 동서 삼층석탑에는 1층몸돌에는 사천왕상이 그리고 상층기단부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 솜씨가 매우 훌륭하다.

탑에 조각이 새겨지는 것은 두 가지의 계보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1층 몸돌에 새겨지는 조각이며 다른 하나는 기단부에 등장하는 조각이다.

몸돌에 조각이 새겨진 탑으로는 분황사 모전석탑과 구황동 폐사지 석탑재에 남아있는 환조 인왕상을 필두로 하여 장항리 절터 오층석탑, 울산 간월사터 삼층석탑의 그것은 몸돌에 부조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기단부에 나타나는 조각은 창림사 팔부신중상을 시작으로 담엄사와 천관사의 석탑재에서 팔부신중상 조각이 보인다.

이렇게 등장한 조각은 800년을 넘어선 시기가 되면 기단부와 몸돌에 동시에 조각이 나타난다.

 

<동탑의 사천왕상>


불교에서는 불교를 전파하는 불, 보살, 승려로 이어지는 계파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 계통의 신이 있는데 범천, 제석천, 사천왕, 금강역사, 팔부신중, 그리고 십이지신이 그 계통이다.

 

그런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십이지신은 비무장으로 바뀌는데 이는 방위신(方位神)으로서의 성격이 완화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조각에 십이지신상이 등장하는 순서는 왕릉, 석등, 탑, 불상 연화대좌 순으로 등장한다.

십이지신상이 등장하는 절은 대체로 약사여래를 주본불로 모시는 절들이다. 십이지는 약사여래의 권속이기 때문이다.

즉, 십이신장은 약사여래의 12대원 개념에 12수(獸)의 시간적 개념과 12방위의 공간적 의미가 합쳐져 12시(時) 12방(方)의 호법신으로 약사여래의 제도를 보좌하는 것이다.


몸돌에 사천왕이 새겨진 것은 이곳이 사왕천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은 주먹을 쥐었으며 피부는 청색이며,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도상의 특징이다. 지국천왕은 선한 이에게 복을, 악한 이에게 벌을 내린다.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은 오른손에 용을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붉은 피부와 노란 눈을 가지고 있다. 만물을 소생시키는 덕을 베풀어준다.

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은 오른손에 삼지검을 왼손에는 탑을 들고 백색의 피부를 가지고 입을 벌리고 있다. 악인에게 고통을 주어 도심을 일으키게 한다.

북방다문천왕(北方多聞天王)은 오른손과 왼손에 모두 비파를 들고 검은 피부색에다 치아를 드러내고 있다. 어둠속을 방황하는 중생을 구제한다.

 

<십이지신상>


사천왕은 모두 악귀를 밟고 있는데 박물관에 있는 사천왕사 출토 소조 사천왕상이나 감은사 서탑 사리외함의 사천왕은 짐승을 밟고 서 있는데 이러한 것을 생령좌(生靈座)라고 한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지역에서 원성의 대상자를 조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주로 탐관오리나, 악독한 선비, 기생 등이 주 대상이었다고 한다.

장항리 절터의 오층석탑의 인왕상은 문의 양쪽에 서 있으나 이곳 사천왕상은 1층 몸돌에 문비를 새기고 문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탑은 심하게 파손되어 있는데 조선 말기에 선비들에 의하여 무너졌다.

지금 금당터 바로 앞에는 민묘가 한기 남아 있는데 이 탑을 무너뜨린 장본인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때는 불교적 요소는 무참히 파괴하고 무덤을 썼던 시기였다.

무너져 있던 석탑을 일본인들이 복원하였는데 그때 복원하지 않았다면 현재도 미복원 상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니 문화재에 대한 일본인들의 행위에 대하여 감사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일본인들은 동산(動産) 문화재는 열심히 일본으로 훔쳐갔으며 부동산 문화재는 끊임없이 복원하였으니. 경주지역의 탑 가운데 감은사탑과 나원리탑을 제외하면 무너지지 않은 탑이 없었다고 하니 더더욱 만감이 교차한다.

절터 서쪽에는 신라시대의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우물 뒤편에는 범자(梵字)가 새겨진 부도가 한기 있는데 범자문양이 새겨진 부도는 울산 청송사에도 한기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이 지역에서 잠깐 유행한 문화현상이었다고 보여진다.


원원사와 불국사의 관계를 암시하는 속설이 원원사 인근 마을에서 전하고 있다. 불국사의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이 지역에서 머리를 깍아 불에 태워야 한다.

그래서 지명이 모화(毛火)이다. 또 모화에서 경주까지 이르는 도로변에는 긴 행랑들이 즐비했고, 산에는 여러 사찰들이 불국사까지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따라서 모화부터는 경주나 불국사의 영역에 들어서는 꼴이 되어, 그 첫 마을의 이름이 입실(入室)이 되었다고 한다.

원원사는 불국사에 이르는 여러 사찰 가운데 첫 가람이다.

여기서 수련을 쌓아 다음 사찰로 옮기고 최종적으로 불국사의 승려가 된다는 것이다.

 

원원사터 동부도


3기의 조선시대 부도가 나란히 서 있는데 부도의 모습이 꾀나 우렁차 보인다.

그런데 경주 지역에서는 부도를 보기가 어렵다.

기림사 입구 주차장에 한기가 있고 안강 정혜사터에서 하천 건너편, 천룡사 못뚝 주변, 그리고 불국사의 광학부도가 거의 전부이다.

이곳에 부도가 있다는 것은 그 당시까지 큰절이 있었다는 상징적인 증거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신라시대의 조각을 편년할 때에 보통 100년 단위로 구분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시대 조각은 편년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

원원사터 부도 역시 편년을 하기는 어렵지만 조선시대의 부도임에는 틀림이 없고 따라서 원원사가 조선시대까지 큰절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곳에 있는 부도는 이른바 석종형 부도라고 하는 것이데 그 모양이 돌로 만든 범종과 같이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석종형 부도는 주로 조선시대에 유행한 부도로서 여주 신륵사의 나옹선사 부도가 그 효시로 알려져 있다.

나옹선사 부도 이후로 조선시대의 모든 부도는 종형 부도로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통일신라시대와 같은 팔각원당형의 화려한 부도를 제작할 수 있는 조각 기술의 퇴보와 함께 그러한 대형의 부도를 만들 수 있는 사원의 경제력이 그만큼 약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현재 울산의 태화사지 십이지 부도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고려시대 또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여진다.


부도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불국사나 영주 부석사에서나 만날 수 있는 거대한 축대를 만난다.

이러한 축대는 불국사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의 대석단을 보고 문무왕대의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축대를 세워서 산지를 평지로 만들어 가람을 조영했던 것이다.

불국사와 부석사의 대석단도 아름답지만 원원사의 축대도 매우 아름답다.

이러한 대역사 끝에 만들어진 이 절은 왕실이나 왕실에 준하는 귀족들이 만든 격이 높은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불국사초등학교21회 동기생모임
글쓴이 : 최광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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