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스크랩]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내다 / 전신문왕릉

鶴山 徐 仁 2005. 12. 5. 02:17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내다 / 전신문왕릉

망덕사터에서 다시 도로를 가로질러 걸어가면 전신문왕릉으로 답사길이 이어진다.

울산을 잇는 산업도로에 바짝 붙어서 잘생긴 문인목 모양의 소나무들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신문왕릉이다.

그러나 이 왕릉은 능의 양식 및 여러 가지 증거로 볼 때 신문왕릉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32대 효소왕릉임에 틀림없다.

<전신문왕릉>

1730년까지의 모든 기록에서 이 왕릉은 효소왕릉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망덕사동쪽에 장사지냈다」(葬于望德寺東)고 했으며,

삼국유사에는 「능이 망덕사동쪽에 있다」(陵在望德寺東)고 했으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능이 부의 동쪽 분남리에 있다」(陵在府東芬南里)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경주를 방문하고 쓴 일기가 그의 문집에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효소왕릉의 2단 상석의 모습을 너무나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호석. 門자가 선명하다>

그런데 1730년 경주 김씨들이 11기의 왕릉을 지정하면서 망덕사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삼국사기에 「신문왕릉이 낭산동쪽에 장사지냈다」(葬狼山東)는 기록에 근거하여 감포와 불국사방면을 일반적으로 경주의 동쪽으로 간주하던 당시의 관례에 따라 여기로 지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효소왕릉은 보다 더 남쪽의 도지리에 고분으로 지정해버렸다.

그러나 이곳은 분남리 즉 분황사 남쪽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뿐더러 망덕사동쪽으로 볼 수도 없다.

<전신문왕릉>

신문왕릉으로 추정되는 전진평왕릉까지는 호석을 자연석으로 돌렸지만 이곳 효소왕릉에는 가공석으로 5단의 호석을 돌리고 그 위에 다시 가공석으로 갑석을 얹었다.

호석 주위에는 44개의 삼각형 받침석을 같은 간격으로 세웠는데 이 받침석은 호석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로 십이지신상 조영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또한 정남쪽의 받침석 상단에는 문(門)자를 새겨놓아 추가로 장사를 지낼 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횡혈식 석실분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왕릉은 태종무열왕릉과 함께 신라의 왕릉을 시대적으로 구분하는데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

무열왕릉에는 상석이 1단으로 되어 있지만 이 왕릉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그 이후에는 탁자모양으로 상석이 바뀌게 된다. 또 십이지신상의 조각은 성덕왕릉 이후에 나타난다.

출처 : 불국사초등학교21회 동기생모임
글쓴이 : 최광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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