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불시대칠처가람(前佛時代七處伽藍) 가운데 세 번째인 용궁남(龍宮南)에 해당하는 황룡사는 신라 제24대 진흥왕 때 처음 창건된 절이다.
황룡사는 진흥왕이 나이 21세 되던 553년에 월성 동쪽에 궁궐을 짓게 하였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게 하였다.
그로 인하여 황룡사(黃龍寺)라 하였다.
나중에는 황룡사(皇龍寺)로 고쳐 부르게 되는데 그것은 이 절을 짓게 된 동기 때문에 황룡사(黃龍寺)로 부르다가
대왕의 절이라는 의미가 더해지면서 황룡사(皇龍寺)라고 불리어진 것 같다.
용(龍)은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것이니 뜻은 같다고 하겠다.
또한 황(黃)이라는 색은 본래 황제 또는 천자를 나타내는 색이므로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황룡사(黃龍寺)와 황룡사(皇龍寺)가 혼동될 일은 아닌 것이다.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무).
즉 방위와 색깔을 대비시키면 동쪽은 청(靑), 서쪽은 백(白), 남쪽은 홍(紅), 그리고 북쪽은 흑(黑)이 되고 이때 중앙은 황(黃)색이다.
그러므로 황룡사는 서라벌의 중심, 신라의 중심에 자리잡은 절인 셈이다.
<황룡사터 항공사진. 촬영 오세윤>
황룡사가 세워진 이후부터는 절들이 황룡사 주변에만 세워지게 된다.
이것은 왕경이 가꾸어지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황룡사가 건립되던 시기 즉 공사 중에도 절들은 서천 주변에 세워졌다.
하지만 황룡사 완공 이후부터는 왕경의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황룡사의 위치를 비정함에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즉, 황룡사는 월성 동쪽이라고 하였는데 현재의 위치는 동북쪽이므로 더 남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황룡사 출토 불두(佛頭)도 역시 분황사 약사여래의 불두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경주에 관한 모든 기록에서 방향을 이야기 할 때 지켜지던 규칙이 있었다.
경주의 동쪽이라 함은 감포 방향, 불국사 방향을 말함이고,
남쪽은 내남, 언양방향,
서쪽은 건천, 영천방향을
북쪽은 안강 방향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월성에서 보았을 때 황룡사는 감포 방향과 일치하므로 동쪽에 해당하는 것이다.
<황룡사터 서편 절터>
뿐만 아니라 월성이라는 개념도 기본적으로 안압지를 일컫는 것이지만,
성동동 전랑지(殿廊址) 또한 사원이 아닌 일반 건축물로는 가장 큰 규모이기 때문에
북궁(北宮)이었건 신궁(新宮)이었건 포괄적인 의미의 궁궐에 속하기 때문에 현재의 황룡사 위치는 틀림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룡사와 가람배치
황룡사는 1탑 3금당식의 가람구조로 보아서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회탑식(回塔式)이라고 불리는 1탑3금당 가람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 초기의 가람은 백제의 1탑1금당식 가람구조였다고 여겨진다.
백제의 가람은 부여 정림사지 또는 군수리 절터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1탑1금당 가람에다 탑 앞에 못이 있었다.
지금도 부여의 정림사 앞에는 연못이 있으며, 익산 미륵사지 앞에도 연못이 있다.
신라의 초기 가람에 속하는 영묘사(靈廟寺)나 흥륜사(興輪寺)에도 남쪽에 못이 있었다는 것이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통일 후에 세워진 불국사에도 구품연지(九品蓮池)가 있었다.
이것은 백제양식의 가람배치였다.
<황룡사터 서편 절터의 석재>
황룡사에서 이루어졌던 중요한 정치적 행위는 정치적 난제가 발생했을 때 고승을 모시고 국왕이 법문을 듣고 문제를 해결하는
이른바 백고좌강의(百高座講義)가 이곳 황룡사에서 벌어졌고, 가금 왕의 즉위식도 거행되었다고 한다.
황룡사의 국통(國統)은 신라의 불교를 총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다.
초대국통은 고구려 승려이었던 혜량(惠亮)이었는데
『삼국사기』「거칠부열전」에 의하면 혜량법사는 신라의 첩자로 고구려에 밀파된 거칠부에게 자신을 신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물론 고구려에서 불교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대 국통은 자장이었다.
황룡사는 신라 호국불교의 본산이었으며 왕실 권력과도 밀착되어 있었다.
전국 모든 절의 주지 임명권도 황룡사 국통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황룡사는 정치 사찰이었던 것이다.
중국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모든 승려들은 황룡사에서 법문을 설할 수 있어야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황룡사 금당터. 멀리 남산이 바라다보인다.>
황룡사를 답사할 때는 두 가지 원칙을 지켜야만 더 깊은 맛을 볼 수 있다.
물론 황룡사뿐 아니라 모든 건축물을 답사할 때에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다.
첫째로 건축물 안으로 들어갈 때에 정문을 통해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래야 만이 건축물의 구조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둘째는 건축물을 바라볼 때 감상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지말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 건축물의 진정한 멋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즉 황룡사에 들어갈 때는 현재 만들어진 길을 통해서 들어갈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 돌아서 남문터와 중문터를 거쳐서 들어갈 것이며
구층목탑자리에 서서 남산을 비롯한 주변 공간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유홍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절집이건 서원이건 여염집이건 우리는 관객의 입장이 아니라 사용자의 입장에서 그 집을 살펴야 그 건축의 본뜻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남에게 으스대기 위하여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편의에 입각하여 배치할 줄 아는 당연한 슬기를 이 시대 우리는 마땅히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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