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왕국 신라,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민족의 형성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사라져간 신라. 그러나 신라는 사라졌지만 천년의 세월과 무게가 남겨놓은 유산은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이땅을 지키고 있다.
천년의 왕업을 이어온 신라이지만 한번도 경주땅을 벗어나 도읍을 정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더욱 경주는 신라의 유적으로 가득하다.
992년 56왕이 살았던 궁궐과 왕을 도와 신라를 이끌어 갔던 수많은 귀족들이 살았을 왕경은 어디였을까?
<월지>
일반적으로 일국의 도읍지를 지칭해서 도성(都城), 왕도(王都), 왕경(王京), 왕기(王畿)라고 부른다.
이는 국왕의 거처인 왕궁과 그것에 인접한 지역이라는 뜻이지만 흔히 도성(都城), 왕도(王都), 왕경(王京)은 정궁(正宮)을 중심으로 하는 핵심지를, 왕기(王畿)는 그 주변지역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삼국문화의 합작품, 월지
왕경이란 그야말로 임금이 살던 궁궐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을 말하는 것이다.
왕경지구 가운데서도 먼저 찾은 곳은 통일신라시대의 동궁터로 알려진 안압지였다.
<월지의 호안석축, 가운데에 작은 섬이 보인다.>
우리는 신라시대의 많은 역사유적들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아는 것이 너무나 없는 실정이다.
역사유적이 "위대하다" 또는 "훌륭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개입되었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진시황이 8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30년 동안이나 만든 것으로 알려진 진시왕릉이지만 그 비인간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훌륭한 예술품으로 남아있기에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남긴 작품에서 "창의성과 노력이 얼마나 기울어졌느냐"를 밝힐 때 위대성을 느끼는 것이다.
신라의 역사유적에서도 시대적, 문화적 진행을 이해할 때 좀더 유적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월지의 호안석축>
이 연못은 우리 나라 전통 연못의 조경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1975년과 1976년 사이 학술발굴 조사로 출토된 다종 다량의 유물들은 통일신라 궁중 생활과 문화상의 일부를 밝히게 되어 우리 문화사에서 비중 높은 통일신라 문화유산으로 꼽힌다.
안압지의 신라시대 이름은 월지(月池)이다.
월지라는 명칭은 1980년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 한병삼에 의해 주장돼 대체로 학계에서 이같은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김시습의 시에는 "안하지(安夏池)"로 표현돼 있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와서 등장한다.
왕궁터가 폐허가 된 채 오리 떼와 기러기 떼가 떠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임해전의 못이 조성된 뒤 700여년이 지난 뒤에야 "안압지"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병삼은 "안압지의 명칭은 월지(月池)다"라는 논문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태자궁인 동궁관(東宮官)에 속해있던 "월지악전(月池嶽典)"은 조경을 관장했던 곳이며 여기서 말하는 월지가 바로 안압지라는 것이다.
또 월지를 발굴할 때 "세택(洗宅)"이라 적힌 목간의 묵서가 나왔고 "용왕신심(龍王辛審)"이라 음각된 토기편이 출토됐는데
이들은 동궁관에 들어있는 세택, 월지전, 승방전, 월지악전, 용왕전 등의 관청명의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월지의 큰섬>
다시 말해 안압지의 원명은 "월지"이며 "월지"는 동궁 안에 있는 연못으로 동궁은 월지궁으로도 불렀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므로 중국풍의 이름으로 적절치 않은 "안압지"라는 명칭 대신에 "월지"로 불러야 타당할 것 같다.
<월지의 잔잔한 수면>
안압지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몇몇 기록에 등장한다.
안압지는 신라시대의 왕궁의 일부분인데 특히 동궁(東宮·태자가 거처하는 공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압지의 서편에는 정궁이었던 반월성이 있어 이 지역 전체가 왕궁이 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반월성과 안압지 사이로 찻길이 나 있고 안압지 동쪽은 철로가 지나고 있으니 역사적 환경이 얼마나 심하게 파괴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월지의 동편에서>
서기 674년. 나당전쟁이 끝나기 3년 전이다.
이때는 이미 백제가 멸망한지 14년, 고구려가 멸망한지 6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는 당나라 군대와 한창 전쟁을 하던 중이었다.
전쟁은 물자와 사람의 수많은 이동을 수반한다.
삼국간의 통일전쟁도 예외가 아니어서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들이 신라로 망명 또는 전쟁포로가 되어 붙잡혀 왔다.
이들 가운데에는 장인(匠人)들도 많이 있어 안압지 공사에도 참여했는데, 안압지의 곳곳에 고구려나 백제문화의 흔적이 베어있음을 볼 수 있다.
대체로 안압지 조영의 마스터플랜은 백제식으로 짜여졌고, 세부적 계획은 고구려식으로 이루어졌다.
<임해전지의 복원건물>
먼저 백제적인 요소를 살펴보면 조경사상이다.
연못을 파서 신선사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백제의 정림사, 궁남지, 미륵사지 등에도 연못이 있다.
즉 안압지의 전체계획은 백제식이었다.
다음 고구려적 요소를 살펴보면
호안 석축의 기운 정도가 거의 수직인 점,
호안 석축 축조방법으로 산의 돌과 가공석을 동시에 쓴 점,
돌의 규모가 크다는 점,
연못바닥에 돌을 고르게 깔았던 점,
물의 정화를 위해 입수부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 점,
호안 석축 전방에 일정한 간격으로 괴임돌을 놓은 점등이다.
<스면에 반사된 모습>
이후 연회와 관련된 기록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군신간에 풍류를 즐겼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곳에 지었던 전각 중에서 임해전(臨海殿)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인들은 이곳을 바다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안압지에 대한 신라시대 기록 중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을 안압지로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지난번 견훤이 쳐들어왔을 때는 승냥이 떼가 온 것 같더니 왕건이 왔을 때는 어버이가 온 것 같다" 는 기록인데
신라는 고려와는 비교적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끝없이 이어진 호안석축>
한시대의 영화를 직접 보고 겪었던 안압지는
고려가 후삼국 통일한 후에는 권력과 사람이 개성으로 이동하면서 돌보는 이 없이 서서히 퇴락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조선 초기에 매월당 김시습이 찾았을 대에는 부평초가 떠 있는 물위로 기러기와 오리 때가 한가로이 오가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1669년 경주부사 민주면이 편찬한 동경잡기에는 경주향교를 중수하면서 안압지의 초석과 장대석을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고
이때 27동의 건물이 모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안압지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월지의 입수부>
발굴결과 바닥에는 자갈을 깔고 회를 발랐는데 이것은 고구려 양식을 이은 것이며,
연못 전체의 마스터플랜은 부여 궁남지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통일전쟁을 통하여 이루어진 문화이동의 현상으로 보인다.
바닥에 회를 발랐지만 통나무를 이용하여 특정한 공간을 설치하여 풀이 자랄 수 있도록 했으며 나무배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뱃놀이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월지의 중섬>
연못 안에는 크고 작은 세 개의 섬을 만들었는데 이는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보냈다고 전하는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을 표현한 것인데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이라고 하는 산을 가리킨다.
하지만 어느 섬이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같은 삼신사상은 도가사상(道家思想)에서 출발한 것으로 백제가 수입하여 신라로 전해진 것이다.
연못의 축대 밑에는 자연석을 기대어 놓았는데 이것은 중국 집안의 장군총을 비롯한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데 통일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편은 직선으로 호안을 쌓았고 동편에는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의 모습을 하였는데 어디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아 작지만 넓게 보이게 되므로 마치 바다와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월지의 중섬>
북쪽 건물지 아래에서 불상을 비롯한 많은 불구(佛具)가 출토되었는데 이곳에 내불당(內佛堂)이 있었던 것 같다.
현재 발굴결과 건물지의 초석이나 적심석(積心石)으로 보아 건물 내부에 기둥이 많았던 것 같은데, 아직 건축기술이 부족했던 신라건축의 특징이다.
당시의 수많은 건물 가운데에서 임해전을 제외하고는 건물이름을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안압지의 동남쪽에 입수부가 있는데 시설이 매우 복잡하고 화려하다.
보문단지에서 물을 끌어들여 구황동을 거쳐서 이곳으로 물이 흘러들었는데 입수부에는 홈이 파여져 있고 4번의 낙차를 거쳐 연못으로 물이 흘러들도록 하여 이곳에서 깨끗하게 걸러서 연못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월지의 봄맞이 준비>
그런데 동해남부선 서쪽 지역만을 발굴하였기 때문에 안압지의 전체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를 알 수 없는 것이 발굴의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1975년부터 이듬해인 1976년까지 2년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연못 안과 주변 건물지등을 발굴 조사하였고,
1980년에는 발굴조사결과를 토대로 밝혀진 서쪽 호안에 세워졌던 5개소의 건물지 중 3개소에 건물을 추정 복원하였으며, 밝혀진 건물지의 초석들을 복원하여 노출시키고, 주변의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복원하였다.
그러나 무산십이봉에 심은 나무의 수종을 잘못 선택하여 너무 키 큰 나무들이 서있기 때문에 무산십이봉과 나무의 비례가 맞지 않다.
300여년간 잊혀졌던 안압지는 1970년 경주관광개발공사에서 준설작업을 하던 중 뻘 아래에서 신라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발굴작업을 하였는데 신라시대의 나무배와 불상을 비롯하여 약 3만여점의 궁궐유물이 출토되면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유물들은 당시 왕과 군신들이 이곳에서 향연(饗宴)을 할 때 못 안으로 빠진 것과,
935년에 통일신라가 멸망하여 동궁이 폐허가 된 후, 홍수 등 천재로 인하여 이 못 안으로 쓸려 들어간 것,
신라가 망하자 고려군이 동궁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못 안으로 물건들을 쓸어 넣어버린 것 등으로 추정된다.
<월지의 봄맞이>
유물들은 지금까지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고분 유물들과는 달리 그 성격이 다른 것으로 신라시대 궁중생활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는 실생활품들이다.
그리고 그 종류와 수량이 다양하고 방대하여 통일신라 문화뿐만 아니라 당(唐)과 일본과의 문화 교류를 살피는데도 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다.
신라의 서울 경주에는 일찍부터 여덟 가지의 괴이한 현상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팔괴(八怪)라고 하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팔경(八景)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중에서 안압부평(雁鴨浮萍)이라는 것이 있는데 안압지에서 자라는 말밤은 괴이하게도 뿌리가 땅에 닿지 않고 수중에 떠서 자란다고 한다.
이를 안압부평 또는 압지부평(鴨池浮萍)이라고 부른다.
<월지의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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