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성이라는 명칭은 신라시대에는 없던 이름으로 고려시대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신라시대의 궁성 가운데 기록에 등장하는 것으로는 금성, 만월성, 신월성, 월성, 명활성등이 있는데
BC37년에 금성을 쌓았고,
AD101년 파사왕 때 월성을
400년대 중반에 명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신월성(新月城)을 쌓고 그후에 만월성(滿月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중간에 가끔 왕궁을 잠깐씩 이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월성의 모습, 벚꽃이 핀 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이 진짜 월성이냐는 문제인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궁궐의 위치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금성의 위치를 잘 알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운 실정이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의 기록상
금성 동남쪽에 월성이 있고
월성 동쪽에 황룡사가 있으며
월성은 초생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신월성(新月城)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 황룡사터는 월성의 정동쪽에 아니라 약간 북동쪽에 위치한다.
또 경주고등학교와 경주역 사이에 위치한 전랑지(殿廊址)가 경주지역에서 발굴된 건물터 가운데에는 가장 큰 건물로 밝혀졌기 때문에 여기가 궁성이었고
따라서 전랑지가 월성이고 반월성이 신월성일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이곳만을 월성으로 보기는 힘들고 월성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그 범위가 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전랑지가 월성이라면 금성은 현재의 읍성터일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월성 야경>
기록에 의하면 파사왕 때 월성을 축조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당시에는 "신라"라는 국호가 정착되기 이전으로 사로국(斯盧國) 연맹시절이었다.
실제로 "신라(新羅)"라는 국호가 확정된 것은 지증왕 4년(503)의 일로 나라의 규모가 커져 그에 걸맞게
"덕업일신 사방망라(德業日新 四方網羅)"에서 한자씩 따온 것이다.
그러니까 파사왕 당시에는 이렇게 큰 궁궐을 짓기에는 국력이 미약하였다.
신라가 오늘날의 경북지역을 영토로 차지한 것은 대체로 17대 내물왕 이후부터인데 이때 고대국가의 완성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필사본 화랑세기와 구지
최근에 그 진위논쟁으로 시끄러웠던 화랑세기에는 구지(溝池)라는 용어가 나온다.
즉 화랑세기 5세 풍월주 사다함 조에는 무관랑이 도망을 가던 중 밤에 궁의 담장을 넘다가 "구지"에 덜어져 다쳤는데 얼마 안되어 죽었다고 나와있다.
여기서 나오는 궁의 담장은 왕궁인 월성의 담장이 분명하다.
그리고 구지는 "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성 밑에 파뫃은 못 또는 물길"을 뜻한다.
월성주변에 구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198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을 통하여 알려졌다.
특히 월성주변의 구지는 구(溝)와 지(池)가 연결되엇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구지가 발견되기 전에는 구지의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구지라는 용어를 통하여 화랑세기가 위작일 수 없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 같다.
<월성해자. 화랑세기에는 구지라 했다>
1988년에 발굴한 결과 성곽의 방어시설인 해자(垓字)터가 나왔으며 뻘층에서 토기편을 비롯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의 제작시기로 보아 대체로 500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월성이 기능 했던 것으로 결론지어졌는데 이것은 21대 소지마립간 시절인 488년에 명활성에서 월성으로 궁성을 옮겼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BC57년에 건국하여 935년에 멸망할 때까지 992년 가운데 절반의 기간 동안만 이곳을 왕궁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 문무왕 때까지의 유물만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통일 후에는 외적의 침입할 위험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해자가 더 이상 방어시설로서의 의미가 없어져 단순한 물길로서의 기능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이 신라 초기부터 왕성이었다면 주변에도 도시가 발달했을 것이지만 가까운 곳에 고분군이 있다는 것은 이곳이 권력의 중심기관이 있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월성해자. 신라시대의 왕성 방어시설이었다>
월성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첫째, 석탈해가 동해에서 토함산으로 올라와서 월성을 살펴서 월성에 있던 호공의 집을 빼앗았던 일.
둘째, 선덕여왕 시절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진압군 대장이었던 김유신이 이곳을 본거지로 했던 일.
셋째, 경덕왕 시절 찬기파랑가를 지었던 충담스님이 남산의 삼화령에 있던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하고 내려오다 왕을 만나 월성의 서문인 귀정문에서 왕을 위하여 안민가를 지었던 일.
오늘날에는 차가 귀한 음식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차가 매우 귀한 음식이었다.
지금까지도 제사를 차례(茶禮)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으며 삼국지의 유비가 노모의 병을 고치려고 1년동안 열심히 일하여 낙양에 가서 차를 구해올 수 있었던 것 등은 차가 매우 귀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신라하대에는 쿠데타에 관한 기록이 주로 등장한다.
당시에는 월성의 정문이 서문인 귀정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귀정문이라는 이름은 중국의 사신이 서쪽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인데 귀정문을 통하여 금교를 건너서 영천과 대구를 지나 서해안의 당항성이나 당진을 거쳐 중국으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역사과학관에 있는 신라왕경도(新羅王京圖)에는 중심에 주작대로가 있고 북문이 월성의 중심으로 그려져 있는데 발굴결과 주작대로는 13m밖에 되지 않았고, 월성의 주출입문으로서 역할을 한 귀정문을 무시하고 있다.
최근 서기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남궁(南宮)이라는 궁궐이 현 국립경주박물관터에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출토됐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박영복)은 지난해 박물관 경내 우물 속에서 발굴된 기와조각에서 ‘南宮之印’(남궁지인 ·사진 ·3.7 X3.5cm)이라는 도장 글자를 확인했다고 밝혔다.‘남궁’은 삼국사기 등 사서(史書)에도 나오지 않는 전혀 새로운 경주의 궁궐이름이다 .
조그만 기와 조각 하나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신라 시대 왕궁의 존재를 밝힐 수 있는 유력한 단서로 떠올랐다.
경주박물관이 부지 내 지하 시설공사를 앞두고 발굴, 공개한 ‘남궁지인’ 명 기와 조각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문헌기록에 전혀 언급돼 있지 않은 왕궁을 고고학 자료를 통해 입증하게 되는 드문 사례다. 삼국사기에는 ‘월성’과 ‘동궁’ 등 10여개의 궁성 이름이 나오지만 ‘남궁’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고고-역사학계는 기와 발굴 당시의 정황이나 주변 환경을 고려할 때 이것이 출토된 현 경주박물관 자리가 바로 남궁이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좁히고 있다.
경주박물관은 신라의 정궁으로 학계가 공인하는 월성(사적 16호)에 인접해 있다는 것이 첫번째 근거. 월성은 통일 이후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좁았기 때문이다.
문무왕 19년(서기 679년), 동궁을 월성 근처 안압지에 건축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남궁도 통일 뒤 궁궐을 확장하면서 지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김동현 문화재위원은 “지난 70년대 초반, 현 경주박물관을 신축하기 위해 기초공사를 했을 때 장대석(축대 등에 쓰려고 길게 다듬은 돌) 등 엄청난 양의 석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한 터라고 생각했다”며 “‘남궁지인’ 명 암키와 출토는 이 곳이 동궁과 마찬가지로 본궁인 월성에 소속된 궁임을 입증하는 자료”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기와조각은 통일신라 시대 것이 맞는 것일까? 만약 후대에 우연히 파뭍힌 것이라면 전문가들의 견해는 설득력을 잃을 수 있다.
발굴을 했던 경주박물관측은 이 기와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확실하다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우물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나, 주변에서 발굴된 도로 유적 등을 종합하면 우물은 서기 8세기 초반부터 9세기 중후반까지 사용됐다.
깊이 10m에 이르는 이 우물은 그러나 인위적으로 매립됐다.
우물 바닥 가까운 곳에서 어린 아이(6~7세)의 인골 1구와 4분의 1 마리 되는 소의 뼈, 서기 9세기 중후반기의 신라토기, 두레박 등이 정연하게 출토됐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 죽자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소와 토기를 빠뜨려 아이의 영혼을 달랜 뒤 흙으로 우물을 메워버린 것이다.
제수로 쓴 유물과 비슷한 깊이에서 출토된 ‘남궁지인’ 명 암키와는 주변 흙을 쓸어 담아 우물을 메우는 과정에서 함께 쓸려 들어간 것이다. 후대의 것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삼국사기를 통해 동궁이 태자궁의 역할을 했고,
북궁은 신라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이 사망했던 곳(서기 896년)임을 알 수 있지만,
남궁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을지 현재로서는 미지수이다.
이기동 문화재위원은 “남궁이나 동궁, 북궁 등은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방위로 이름을 정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남궁은 월성과 가까운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궁과 격이 차이가 났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정궁인 월성과 가깝고 주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격이 높은 궁이었을텐데 왜 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느냐는 점이다.
궁의 이름을 새긴 도장이나, 그 도장을 찍어 명문을 만든 기와 역시 현재까지 발굴된 바 없어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게 됐다.
석빙고
석빙고(石氷庫)는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인데 현재의 것은 조선 영조 때인 숭정기원후재신유(崇禎紀元後再辛酉)에 만든 것이다.
원래는 나무와 풀로 만든 목빙고(木氷庫)였는데 해마다 수리를 하고 다시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천변 경사진 곳에 설치하였다.
하천 변에 설치함으로서 얼음을 뜨기에 편리하고 경사진 곳에 설치함으로서 배수가 잘 되어 얼음이 녹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얼음에 관한 신라시대 기록으로는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하였고 유리왕(노례왕) 때 빙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보인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여름에 사용한 예가 적어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석빙고를 짓는 곳은 먼저 하천과 가까워야 채빙하기가 용이한데 아마도 남천의 얼음을 채빙하여 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녹은 물이 잘 처리되도록 경사진 곳에 만들었다. 얼음이 녹지 않도록 짚과 왕겨를 덮고 갈대를 덮었다고 한다.
이곳에 보관한 얼음은 왕실에 환자가 발생하면 찜질을 하는 데도 사용하였고 공신들에게 선물로 지급하거나 여름휴가 때에도 지급하였다.
얼음은 대단히 귀하고 중요시하여 강력하게 통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이 석빙고는 원래 있던 돌문 대신 철제문(鐵製門)이 달려 있지만 석빙고의 원형에 대한 연구나 분석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석빙고가 축조 당시에는 돌문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학계에서는 돌문을 복원해 달아야 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석빙고 내부모습>
또 돌문은 월성 내에 있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이 있어 이 돌문을 찾아 내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석빙고의 돌문이 월성의 서북쪽 둔덕,
즉 계림에서 월성으로 오르는 길의 서쪽에 파묻혀 있으며, 깊이 파묻혀 있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발굴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지역 노인들의 증언도 있다.
'대한민국 探訪'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역사의 산...신앙의 산(남산) (0) | 2005.12.05 |
---|---|
[스크랩] 시림에 빛나는 황금궤짝 (계림) (0) | 2005.12.05 |
[스크랩] [관광지] 통일전쟁이 이룩한 삼국문화의 융합(월지) (0) | 2005.12.05 |
[스크랩] 내고향 어제와 오늘 (0) | 2005.12.05 |
[스크랩] 여행 동영상 모음 (0) | 2005.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