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鶴山의 넋두리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

鶴山 徐 仁 2005. 11. 24. 18:33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 (9)
趙甲濟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 (9)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④-1;
 김대중 주장; 『교통 사고를 위장한암살 기도였다』;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임자도 간첩 사건
 
 1968년 7월20일 金炯旭(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전남 목포 앞 荏子島(임자도)를 거점으로 하여 暗躍(암약)해 온 북괴 간첩단을 적발해 118명 중 간첩 27명을 구속, 검찰에 보냈다고 발표했다. 정보부는 발표문을 통해서 「지하당 전남도책인 鄭泰洪(鄭泰默의 이름을 가명으로 발표한 것-편집자 注) 등 간첩단은 1962~1967년 사이 북한을 오가며 1845만원의 공작금을 받아 지하당을 조직, 활동해 왔다」고 밝혔다. 이 간첩단의 주범인 鄭泰默은 당시 45세로서 전남 목포시 출생, 前 남로당원으로서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6·25 전쟁으로 탈옥, 북한에 4회 왕복, 노동당 입당, 공작금 800만원 수령, 지하당원 포섭 활동을 벌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이 간첩단이 받은 공작 지령 가운데는 「혁신계통 중간 정당에 침투하라」, 「1967년 5월의 대통령 선거 때는 제1야당 후보를 지원하라」, 「국회의원 선거 때는 극렬적인 야당 인사를 지원하라」, 「출판사를 경영하되 반공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反美-反정부 사상을 고취하라」는 내용도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 7월31일자로 육군 계엄 보통 군법회의 검찰부 검찰관 중령 鄭基用(정기용)이 군법회의 앞으로 보낸 金大中 등 24명의 피고인에 대한 공소장에는 임자도 간첩 사건의 주범 鄭泰默(정태묵)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金大中 피고인은)1967년 5일자 미상경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 여관 등에서 북괴로부터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야당인 신민당 입후보자가 다수 당선되도록 김대중 등을 지원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의도적으로 접근해 온 소위 임자도 거점 간첩 정태묵(1972.12.8 대법원에서 간첩죄로 사형판결을 선고받아 집행된 자)을 2회에 걸쳐 접촉하여 그로부터 「6·8 선거는 관의 금력에 의한 관제 선거가 예상되므로 투표직전까지 선거조직을 노출시키지 말 것」, 「여당이 금력공세를 가하면 효력이 감소될 때까지 방임할 것」, 「선거시에는 관을 자극하는 언동으로 탄압을 유도하여 동정표를 얻도록 할 것」, 「선거운동을 도심지보다 변두리에 집중할 것」, 「여당의 금력 공세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거를 포착하여 여론에 호소할 것」, 「지방 발전만을 외치는 여당의 전략에 말려들지 말 것」 등 선거전략을 교도받는 동시에 목포 산정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종사하던 위 정태묵의 처의 동료 교사인 임자도 출신 성명 미상을 그 운동원으로 소개받고 동 선거 전략에 따라 선거운동을 하여 당선되고(하략)>
 
 이에 대한 金大中씨의 해명은 다음에 소개하는 1954~1967년 사이의 행적에 관한 자필 진술서에 등장한다. 1980년 5월20일자 자필 진술서의 해당 부분을 싣는다.
 
 
 金大中 해명
 
 〈6. 1967년 임자도 간첩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주범 鄭泰默은 본인의 목포상업학교 1년 선배며, 선거기간에도 2∼3차 만나서 본인의 선거에 협력하는 의사를 표시한 바 있음. 그러나 당시 누구나 그가 해방 직후의 좌익활동을 중단하고 家業인 염전업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지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하는 줄은 몰랐음. 그는 매일 시내에 나오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서 일반 시민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음.
 
 이 사건이 나자 하루는 당시 정보부의 金炯旭 부장의 보좌관들이 와서 출두를 요청하므로 시청 앞 뉴코리아 호텔에서 金부장을 만났음. 金부장으로부터 『임자도 사건의 주범 鄭泰默을 조사 중 金선생의 이름이 나왔는데,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일단 이름이 거명된 이상 수사절차상 조사를 안 받을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참고인 조사에 응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음.
 
 그리하여 선거기간 중 타인과 동석으로 2∼3차 만났으며 선거 후에도 서울서 1차 만난 것을 사실대로 진술해 주었음. 이것은 후일에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이나 鄭泰默이 조사받던 중 진술하기를 『선거기간 중 金大中의 말을 들으니 반공정신이 투철하여 전혀 다른 말을 꺼낼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아예 공작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었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음.〉
 
 
 李宅敦 증언:『정태묵에게 당하려다가 만 사람』
 
 1980년 8월29일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는 金大中 피고인과 함께 기소된 李宅敦(이택돈) 前 신민당 국회의원에 대한 신문이 있었다. 그는 서울高法 판사로서 鄭泰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사람이기도 했다.
 
 검찰관 金大中 피고인이 해방 전후 좌익활동을 한 사실을 아는가요.
 
 李宅敦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이 건으로 수사받으며 (장금성의 - 편집자 注) 남로당 당원증 재교부 신청서에 공산주의 활동상황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알았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정치를 단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 과거 공산당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뻔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가슴이 아프며 이번에 그러한 자료가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대중 자기는 충분히 자기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기 자신을 기만했다고 하는 것을 이 자리에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검찰관 피고인은 임자도 간첩 정태묵을 아나요.
 
 李宅敦 예, 제가 고등법원 판사로 있을 때 직접 판결한 사실이 있습니다.
 
 검찰관 (前略) 이와 같은 내용이 정태묵의 판결문에도 나오는데 사실인가요.
 
 李宅敦 예, 10여 년 전 일인데 김대중이 정태묵의 포섭대상이었다는 것이 기억납니다.
 
 변호사 김정환 고등법원 판사 때 정태묵을 판결하고 판결문을 썼나요.
 
 李宅敦 예.
 
 변호사 지령 내용을 기억하나요.
 
 李宅敦 상세한 기억은 못하나 정태묵이 다방 등지에서 김대중을 만났다는 것은 기억에 납니다. 그때 왜 좀더 검찰에서 추궁을 안 했나 하는가를 기록을 보면서 느낀 생각이 납니다.
 
 변호사 정태묵 사건 취급과정에서 김대중을 의심해 본 적이 있나요.
 
 李宅敦 정태묵에게 당하려다가 만 사람으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李宅敦 변호사는 최근 기자에게 『그때 나는 주심 판사였다. 임자도 간첩사건 기록을 읽어 보니 鄭泰默이 金大中씨를 만난 것은 목적을 갖고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주님이 암살 음모의 위기 속에서 구해 주었다?」
 
 이 金大中 연구는 시간대와 쟁점을 따라 진행되고 있다.
 
 金大中을 연구함에 있어서 1971년 5월24일에 있었던 교통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 全斗煥 집권 후 청주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金大中씨는 「민족을 위한 나의 기도」라는 글을 써 가족에게 보냈다. 이런 구절이 있다.
 
 <주님은 1971년 국회의원 선거 지원차 전국을 지원 유세하는 제 차를 14t 대형트럭으로 들이받아 교통사고를 빙자해서 죽이려는 음모를 間一髮의 위기 속에서 좌절 시켰습니다>
 
 金大中씨는 자신이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었다고 말하곤 한다. 이 트럭 사고는 그 중 하나다. 金大中씨는 1985년 봄 月刊朝鮮 吳交力鎭-趙甲濟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사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당시 나는 국회의원 선거 때 전라도 지방의 지원 유세를 끝내고 목포에서 비행기로 상경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약이 취소돼버렸어요.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뜬다는 거예요. 이것도 뒤에 알아보니 정부의 음모였어요. 그런데 광주에서는 비행기가 뜬다는 거예요.
 
 광주로 비행기를 타러 가는데 무안 입구의 1차선 도로를 지날 때였어요. 마주 오던 14t 트럭이 거의 90도 각도로 확 꺾으며 중앙선을 넘어 내 차를 덮치는 거예요. 마침 그때 운전사가 살려고 속도를 확 냈어요. 그래서 트럭은 내 차의 뒤트렁크를 살짝 받았는데, 워낙 큰 차가 받아놓으니까 내 차는 붕 떠서 길 옆 논에 처박혔어요. 100미터 앞에는 저수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빠졌으면 죽는 거지요. 나는 뒷자리 오른 쪽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차 뒤에는 결혼식에 다녀오는 손님을 태운 택시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려고 택시를 경호차 앞으로 몰았어요. 내 차를 받은 트럭이 잇따라 이 택시를 정면으로 받았어요. 앞에 탔던 3명이 즉사, 뒤의 3명이 중상을 당했습니다. 나는 피를 흘리면서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택시에서 부상당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金大中 선생은 죽지 않았느냐」고 묻더군요. 그런데 트럭운전사가 없어져 버렸어요. 조수만 있는데 「난 모른다」는 거예요』
 
 ―누가 시켰습니까.
 
 『당시 대통령 측근들이에요. 그 트럭의 소유자가 그 당시 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등록된 모 변호사예요. 그 운전사 사건을 처음 담당한 검사는 갈려버리고 운전사는 교통사고를 냈다고 1년 징역을 받았는데 다 살지 않고 나왔고 나중에 의문의 죽음을 했어요. 저는 다섯 번의 죽을 위기에서 다 살아나왔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써, 당신의 목적에 쓰시려고 그렇게 구해 주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10편에서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10)
趙甲濟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10)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④-2;
 김대중 주장; 『교통 사고를 위장한암살 기도였다』;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죽었다는 운전사는 살아 있었다
 
 필자가 알아보니 사고 트럭은 범한화물(주) 소속이었다. 사장은 洪國泰(홍국태)씨. 그의 아버지가 사고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洪承萬(홍승만·작고·당시 대한변협회장). 洪사장은 기자에게 『그 사고는 단순 교통사고였다』면서 『신민당원들이 사고 운전사 집에 몰려가 괴롭혔다. 수사와 재판은 공정했다』고 말했다. 기자는 金大中씨로부터 『운전사가 의문의 죽음을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운전사와 접촉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알아보았더니 그는 부산시 동래구 연산 6동에서 살고 있었다.
 
 權重億(권중억·당시 51세)씨는 아직도 회사 출퇴근 버스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와 통화를 해서 15년 전의 사고 이야기를 꺼냈더니 이렇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 사고가 문제가 되어 있습니까』
 
 權씨는 이렇게 사고를 설명했다.
 
 『그때 비가 좀 내리고 있었습니다. 경기 영 7-4755호 트럭을 몰고 목포로 가는데 무안군에서 마주 오던 차량 행렬을 보았습니다. 택시가 맨 앞에 있었고, 그 뒤를 따라 오던 세단차―여기에 金大中씨가 타고 있었다는 것을 사고 뒤에 알았습니다―가 중앙선을 넘어 택시를 앞지르려고 하는 것을 제가 보고 당황했습니다. 급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비탈길에 비가 내려 그런지 왼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세단을 약간 스치고 뒤따라오던 택시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그 안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죽었습니다. 저는 뛰어내려 택시 승객부터 끌어냈고, 지나가는 차들한테도 구원을 청했습니다. 세단차는 길 아래로 처박혔는데 그 차에 탔던 사람들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현장에서 달아났습니까.
 
 『아뇨. 거기에 있다가 경찰차가 조사하러 와서 경찰로 끌려가 구속되었지요. 금고 10개월의 형을 받았습니다. 형을 다 살고나와 보니 살림이 엉망이 되고, 결국 아내와 헤어진 뒤 두 딸을 키우며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세단차에도 사고의 책임이 있다는 말씀 같은데?
 
 『법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사고를 유발시킨 것은 세단차의 중앙선 침범이었어요. 그래도 저의 잘못이 크지요』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고의성 있는 사고라는 쪽으로 추궁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없었습니다. 지금 선생님한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1997년 11월15일 도서출판 산하에서 출간된 당시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自傳的 에세이 「나의 삶 나의 길」에도 트럭사고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암살음모설을 유지했다. 金大中 당시 국민회의 총재는 이 에세이에서 「나는 그(사고) 때문에 반년 이상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고 다리와 허리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서 진찰해 보니 股關節(고관절)에 장애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야만적인 독재정권이 선물한 교통사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고 썼다.
 
 1998년 7월 하순 月刊朝鮮 禹鍾昌 기자는 부산으로 내려가 權重億씨를 찾아갔다. 62세인 그는 여전히 부산시 연산동 달동네에서 재혼한 부인과 어렵게 살고 있었다. 모 회사의 야간 경비 근무로써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權씨는 트럭 사고의 피해자가 대통령이 되어 상당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는 『동네에서도 직장에서도 모르고 있는 일』이라면서 『제가 이 사실이 알려져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세 식구가 굶어죽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당시 수사 검사:『외압은 없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전에 그는 광주 경찰서에 불려가 트럭 사고와 관련하여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權重億씨는 사고 상황에 대해서는 1987년에 趙甲濟 기자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되풀이하였다.
 
 『사고가 난 날은 비가 왔습니다. 왕복 2차선 도로이고, 커브를 지나자마자 맞은 편에서 중앙선을 침범해 달려오는 차를 보았습니다. 급 브레이크를 밟았지요. 빗길에 차가 밀리는데 아무리 핸들을 틀어도 틀려야 말이지요. 차가 90도 각도로 10m쯤 미끄러졌는데 스키드 마크 자국이 선명히 났습니다. 조사한 사람들이 그것을 다 보았고, 조사 기록에도 다 나와 있습니다』
 
 禹鍾昌 기자는 1998년 月刊朝鮮 9월호에 실린 「대통령님, 오해를 푸십시오」란 題下의 기사를 취재 중 金大中 대통령의 둘째 아들 金弘業씨의 아내 申仙蓮씨의 아버지 申鉉守씨(前 감사위원)가 사고를 낸 트럭회사의 사장이던 洪國泰씨와 인척 간임을 밝혀냈다. 洪國泰씨의 할머니가 申鉉守씨의 고모가 된다는 것이었다. 申씨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 洪國泰씨가 소유하고 있는 한국 컴퓨터의 상임고문에 취임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禹鍾昌 기자는 또 이 트럭 사고를 수사한 검사가 국민회의(현재 민주당) 소속 許京萬(허경만) 전남지사임도 알아냈다. 許지사는 당시 목포 검찰 지청 소속 검사였다. 그는 『상당히 고의적으로 난 사고일 가능성이 있고, 金대통령도 그렇게 주장했었다』면서 『金대통령에게 「그런 의심은 가지만 운전사가 졸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본인이 자백해 주지 않으면 살인 예비혐의로 기소하기에는 참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고 그렇게 처리했던 사건이다』는 요지로 말했다.
 
 許京萬 지사는 金大中씨의 주장과는 달리 자신이 이 사건을 끝까지 맡아 기소했고 그 뒤에 인사발령에 따라 인천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수사할 때 외부로부터의 압력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급제동을 걸 때 생기는 스키드 마크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禹鍾昌 기자는 『그 트럭 운전사가 요즘 뭘하고 있는지 압니까』 하고 물었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현지에서 무슨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그 후 金대통령 측근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도 등장
 
 2000년 12월10일 밤 金大中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필자는 金大中 대통령이 수상 연설에서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에 다섯 번에 걸쳐서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2001년 1월호 月刊朝鮮 「편집장의 편지」에서 기자는 「金大中 대통령이 오해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운전사) 權씨를 살인미수범으로 몰고 있다면 노벨평화상의 수상 자격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에 대해서 許京萬 전남지사는 月刊朝鮮 2001년 3월호에 실린 반론문에서 「사고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서 승용차를 들이받은 것이지 승용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사고를 유발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이 사건은 고의성이 있다고 인정할 만한 중대한 과실이 있는 의문의 사건이 분명했지만, 트럭 운전사의 犯意와 배후를 제대로 입증할 수 있는 자백이나 물증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트럭 운전사를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한 것이지, 그 사건이 살인미수사건은 아니었다고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다」고 했다.
 
 이 반론에 대한 禹鍾昌 기자의 검증 및 조사는 작년 3월에 이뤄졌다. 다음은 禹 기자의 보고서이다. <11편에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11)
趙甲濟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11)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⑤-1;
 6·15선언 제2항은 무허가 통일방안에 의한 「국가 정체성의 변조」 기도?;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언제 우리가 국가의 공식 통일방안을 폐기했던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2000년 6월15일 평양에서 金大中 대통령과 金正日이 발표한 공동선언문의 제2항은 민족과 국가의 운명에 직결되는 거대한 함정과 어두운 그림자를 깔고 있다.
 
 북측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한국內 親北세력을 궐기시켜 애국세력을 거세하려는 對南 적화 통일의 중심 전략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金正日을 통일조국의 수령」으로 모시겠다는 전략에 봉사하는 방안이다. 이런 속셈을 간파한 역대 우리 정부는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여 옥살이를 시켰다. 金大中씨가 1980년에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 여러 이유 중의 하나도 자신의 연방제안으로써 金日成의 연방제안에 동조했다는 죄목이었다.
 
 南韓赤化 전략의 핵심인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와 공통점이 있다는 남측의 연합제안은 누구 것인가. 盧泰愚 정부가 만든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국회 동의를 받은 정부의 공식 통일 방안)의 제2단계인 남북연합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金大中 3단계 통일론의 제1단계인 연합제를 가리키는가.
 
 盧泰愚의 남북연합제는 자유통일을 목표로 한 과도기의 분단관리 체제이므로 적화통일로 가려는 북측의 연방제와 공통성이 있을 수 없다. 과정상으로도 盧泰愚의 남북연합은 남북간의 교류가 충분히 진행된 다음의 결과로서 2단계에 등장하는 것이고, 낮은 단계 연방제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자는 것이므로 金大中의 3단계 통일론 중 제1단계 연합제와 대응한다.
 
 
 金大中 대통령 술회: 나의 통일방안을 설명했더니…
 
 金大中 대통령은 평양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2000년 6월16일) 국무회의에서 중대한 의미의 술회를 했다.
 
 『그쪽에서 계속 통일을 얘기하면서 연방제를 주장하는데 연방제는 군사와 외교권을 중앙정부가 갖고 內政은 지방정부가 갖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남북관계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구상해 온 세 가지 통일방안에 대해 설명했다. 1단계는 남북연합, 2단계는 연방, 3단계가 통일인데 1단계는 현재대로 가는 것이다. 현재대로 가면서 남북 양쪽에서 정부대표가 나와서 대표회의, 각료회의, 국회는 국회회의를 하고 의제를 만장일치로 합의하는 것이다. 상시적으로 이것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운영이 잘 되면 미국식 연방제처럼 군사·외교권은 중앙정부가 갖고 내정은 지방정부가 갖는 것이다. 그래서 잘 되면 우리의 원대로 단일 통일 국가로 가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지만 확실하게 어느 쪽도 겁을 내거나 걱정하지 않고 이루어 가는 방안이다. 이런 방안에서 서로 의견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金正日 위원장이 배석한 김용순 비서와 한참 얘기 끝에 낮은 수준의 연방 얘기가 나왔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연합제와 같은 얘기다. 그래서 접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실제로 이번 합의 중에서 가장 역사적이고 분단 55년의 과제인 통일방안에 의견을 접근한 의미 있는 합의다』(2000. 6. 16 오전 국무회의 브리핑-청와대 인터넷 사이트)
 
 그 다음날 6월17일 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金大中 대통령은 말을 바꿨다. 李총재가 『북한의 연방제안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불용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제안한 연합제는 과연 무엇인가』라고 묻자, 金대통령은 『그 연합제는 盧泰愚 대통령 당시 남북연합이라고 말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前後 사정으로 보아서 이 말은 믿기 어렵다. 金大中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이야기가 구체적이고 앞뒤가 맞다.
 
 盧泰愚 대통령의 밀사로 평양에서 金日成을 만났던 徐東權 당시 안기부장이 우리 정부의 한민족 통일방안에 있는 남북연합제(2단계)와 북한의 연방제가 공통성이 있으니 연구해 보자는 임기응변의 제의를 했을 때 金日成은 『두 방안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거부했다. 따라서 金正日이 상호 공통점을 인정한 것은 盧泰愚의 남북연합제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중대한 의혹이 제기된다. 언제 우리 정부의 공식 통일방안인 한민족통일방안이 폐기되었던가. 우리 국민과 국회는 언제 金大中 개인의 통일방안을 국가의 것으로 인정해 주었으며 개인의 통일방안을 평양에 가지고 가서 적화통일 방안과 연결시키도록 위임해 주었던가.
 
 이런 의문보다도 더한 의문은 金大中의 연합제안과 金正日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에는 무슨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하는 부분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두 통일안이 중앙연방정부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남북 지역 정부의 독자적 권한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을 공통점으로 꼽고 있다.
 
 이런 공통점은 남북 頂上회담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서 하등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우리 역대 정부는 그런 공통점은 형식적이고 지엽적인 것이라고 판단하고 무시했다. 통일방안에서 공통점이라 할 때 의미를 가지려면 남북한이 志向(지향)하는 통일조국의 모습(이념, 체제 등)에서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
 
 남북 兩金씨가 인정했다는 남북한의 두 통일방안이 가진 상호 공통점이란 목표의 공통점을 포괄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목표점은 어디인가. 자유의 언덕인가, 赤化의 골짜기인가. 1981년에 우리 대법원은 확정판결을 통해서 金大中씨가 주장한, 연방제를 고리로 한 통일방안은 북한 측 연방제에 동조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金大中 대통령은 우리의 對共수사기관과 대법원이 親北的이라고 확인해 준, 그리고 국회·국민의 同意를 받지 않은 그 개인의 무허가 통일방안을 가지고 가서 金正日과 합의해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6·15 선언의 제2항은 북한의 赤化통일 방안과 그것에 동조한 金大中 통일방안의 연결이며, 그 미스터리의 「공통점」이란 낱말도 바로 그런 의미의 함축이란 말인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李長春 대사가 말한 대로 「국가 正體性의 變造」에 해당하는가?
 
 이런 의문들이 명쾌히 해명되지 않으면 국민들은 6·15 선언에 기초한 남북관계가 국가와 민족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불안에 떨게 된다. 통일열차란 말을 믿고서 당연히 자유역을 향하여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탄 국민들이 뒤늦게 그 열차가 赤化驛으로 달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는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타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문제의 2항에 대한 심층해부가 死活的인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이다.
 
 
 국민은 대통령을 무시하고 대통령은 국민을 무시하고
 
 평양 頂上회담의 2대 성과라고 金大中 대통령이 여러 번 국민들에게 보고한 것은 통일의 방향에 대한 합의와 金正日의 주한미군 관련 발언이었다. 문제는 북한 정권의 그 뒤 언동이 金大中 대통령이 한 말을 뒤집은 점이었다. 북한 정권은 6·15 선언 제2항이 對南 赤化 전술인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라고 주장했다. 金대통령은 金正日이 현재 상태의 주한미군이 통일 이후에도 주둔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고했으나, 金正日은 작년 여름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과 회담한 뒤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주한미군의 철수가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러시아도 이런 입장에 이해를 표명했다.
 
 한국민의 안전과 관련된 두 문제에 대해서 金大中 대통령의 對국민보고와 정반대의 언동을 북한 정권이 하고 있는 데 대해서 언론과 야당이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金大中 정부 측에선 『그것은 북한 정권의 對內用』이라고 변명했다.
 
 지난해 8월29일 국회에서 당시 林東源 통일부 장관은 『金正日의 말은 지금 상태의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주한미군이 북한에 대해 적대적 자세를 버리고 남과 북 사이에서 균형자의 역할을 하는 방향으로 성격이 바뀌면 계속 주둔해도 된다는 뜻이었다』는 요지의 증언을 했다. 이 말은 그동안 金大中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허위보고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할 정도의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金大中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보고한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점 확인과 통일방향에 대한 합의의 성격, 그리고 金正日의 駐韓美軍 계속 주둔 관련 발언은 이제 믿을 수 없게 되었다. 金대통령과 그 측근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관계조차 안개 속이다. 金大中 정부에 몸담았던 고위 외교관이 「국가 正體性의 變造」란 표현을 써서 공격해도 반응이 없다. 이는 대통령은 국민을 무시하고 국민은 대통령을 무시하는 막가는 상황이 아닌가.
 
 이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해야 할 언론과 야당도 한국 사회의 거대한 좌회전에 휩쓸려 들면서 제대로 파헤치지 못함으로써 적당히 넘길 수 없는 사태의 심각성이 제대로 浮刻(부각)되지 못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과연 자체 修正 능력이 있는 존재인가 하는 불안마저 갖게 하는 대목이다.
 <12편에서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12)
趙甲濟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12)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⑤-2;
 6·15선언 제2항은 무허가 통일방안에 의한 「국가 정체성의 변조」 기도?;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한국은 연방제를 받아들이고…』
 
 이 시리즈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미공개 자료 - 「1980년 金大中 내란 음모 및 韓民統 결성 사건 재판 기록」에는 아래의 문서가 첨부되어 있다.
 
 〈계엄사 合同 수사본부
 
 1980. 6. 20
 
 수신: 본부장
 
 제목: 수사보고
 
 1. 다음 名이 1972. 10~1973. 8 間 일본 및 미국에 체류하면서 言動한 내용 중 북괴의 주장에 동조 및 찬양 고무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보고합니다.
 
 가. 인적 사항
 
 원적:전남 신안군 하의면 대리 232
 
 본적:서울 마포구 동교동 31-1
 
 주거:서울 마포구 동교동 178-1
 
 직업:무직
 
 金大中 55세
 
 1925. 12. 3生
 
 
 나. 言動 내용
 
 ※나는 남북이 동시에 UN에 가입하고 세계 각국과 대등한 외교를 맺을 수 있는 연방제를 확립할 것과 이와 병행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諸교류를 盛行시켜 민족의 신뢰와 국민적 합의를 회복하는 평화교류를 추진할 것을 주장한다(1973. 3. 23 東京 외신 구락부 발표성명, 4.14 「콩고르디아」 신학대학 강연, 팜프렛 「한국 사태와 나의 신념」, 저서 「독재와 나의 투쟁」).
 
 ※남북한이 여유 있는 연방정부를 수립하여 100보의 거리를 90보, 80보로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1973. 3. 30 메이후라워 호텔 강연, 4.15 한민신보, 5.21 민족시보).
 
 ※한국은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를 받아 들여야 하고, 북한은 한국이 주장하는 UN동시가입안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6·23 외교 선언은 동서독처럼 남북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므로 반대한다(1973.4.24 시애틀 워싱턴 대학 및 7.6 메이후라워 호텔, 한민통 발기인 대회 강연).
 
 ※남북은 한반도의 외군철수, 쌍방정권의 인정, 정치·경제 제 분야의 전문적 교류를 통해 급속한 동질성을 회복, 연방 공존제를 만들고 통일 선거 후의 5년 동안은 거국정부를 세워야 한다(1973. 7.1 한민신보, 1973. 5. 21 코리아 저널).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 하며 북한이 종래부터 주장해 온 남북평화 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 화해 주장 등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독재와 나의 투쟁 p.192).
 
 ※ 한국이 자유도 빵도 없는 데 반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고 해도 빵이 보장된다. 나의 이러한 입장은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다(1973. 2. 23 내외 타임스 및 뉴욕 타임스 게재).
 
 ※괴뢰, 괴뢰 하면서 무슨 놈의 괴뢰냐. 공산주의란 기존 사실을 우리는 27년 간이나 무시해 왔는데 以北은 공산당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以南은 민주체제도 안정되지 못했고 오히려 혼란과 불안, 민생고만 극심할 뿐이다. 또한 金日成이 주체성 등을 확립시킨 것은 잘한 일이 아니냐.
 
 朴정권은 말기 현상에 처해 있어 2, 3년내로 붕괴한다. 일본과 미국도 朴정권을 밀어내는 對韓 정책을 수립하고 있는데 朴정권 타도에 다 같이 참가하자(이상 1973. 4. 24 시애틀 워싱턴 대학강연 부록).
 
 ※당신이 북한을 방문할 때는 金日成과 사진을 찍어야 하며, 그 사진을 신문에 보도하여 미국 북한 간의 관계 개선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를 배경으로 북한 측이 주장하는 주한미군 철수를 당신이 국회에서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한국의 朴정권을 타도키 위해서는 미국이 對韓원조를 중지,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등으로 한국 정부에 개입해야 한다. 당신이 朴대통령과 사진을 찍으면 한국은 이를 이용, 당신이 朴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인 양 보도할 것이므로 당신에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이상 1973. 4. 30 하버드大 코헨 교수와의 대담, 金正源 박사 통역).
 
 ※朴正熙씨가 통일을 위해 독재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朴정권은 통일하려는 양심도 자신도 없다. 나는 결코 통일하면 공산당을 죽이는 그러한 반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요, 勝共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공산당의 존립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以北에 金日成 주석을 중심으로 한 엄연한 정권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월남파병은 실패했다. 월남에 끌려간 우리의 청년들은 1만2000명이나 죽고 부상당하고 그러면서도 월맹이나 월남에서는 미움받고 세계에서는 마치 사람 죽이는 국민처럼 오해받고 돈에 팔린 용병이나 전쟁 좋아하는 민족으로까지 오해를 받으면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朴正熙씨는 지금 국민을 속이기 위해 장막을 쳐 놓고 월남에서 개선한 장병들의 환영대회를 한다고 떠들고 있다(이상 1973.3.21 하코네 入管法 연수회 강연, 1973.4.1 민족시보 게재).
 
 ※내가 집권하면 남북연방제와 대중경제를 실시하겠다. 교포들은 앞날의 受權태세를 확립하여야 하며 그 방법으로는 청와대와 백악관에 계속 편지를 내어 항의해야 하는데, 특히 경제원조의 부정사용에 대해서는 백악관에 이를 항의하여 중단토록 주장해야 한다(이상 5.18 샌프란시스코 국제학생회관강연, 6.1 자유공화국, 6.15 韓民新報 게재).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원조와 일본의 경제원조로 유지되고 있는데 나는 미국의 납세자들에게 이러한 돈이 남용에 불과하다고 알려줄 의무가 있다 (1973. 6. 24 달라스 타임스, 7.5 워싱턴 포스트 및 7.1 한민신보 게재).
 
 
 2. 조치 의견
 
 본건 불온 언동 내용을 金大中의 국가보안법 위반 등 피의 사건 구비 자료로 일괄 송치함이 가하겠습니다.
 
 합동수사본부 軍사법 경찰관 육군 준위 梁一根〉
 
 위의 자료는 金大中씨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외국에서 활동할 때의 言動으로서 그의 對北觀을 잘 보여준다. 그의 연방제 통일방안은 해외 망명 시절이던 1973년 3월23일에 발표되었다. 이 연방제안에 담겨진 의미를 해석하는 데는 위에 열거된 그의 對北觀이 하나의 열쇠가 된다.
 
 
 正義·사실·애국심·균형감각이 결여된 對北觀
 
 위의 보고서 내용은 재판 과정에서 金大中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되도록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이 보고서에 인용된 金大中씨의 말들을 분석하면 그의 연방제 통일방안이 딛고 있는 對北觀·역사관·국가관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를 읽어보면 우선 金大中씨가 북한의 실상을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이 자유도 없고 빵도 없는 데 반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고 해도 빵이 보장된다」는 말이 그렇다. 1970년대 유신시절에 朴正熙 정권의 강권통치로 해서 정치적 자유가 제약된 것을 金日成 치하의 자유 말살과 同格으로 놓는 비교법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朴正熙식 권위주의를 金日成-金正日-스탈린식의 전체주의와 같다고 보는 것은 과장법이고 선동이다.
 
 자유의 제약과 말살은 천지 차이이기 때문이다. 金大中 같은 정치인이 金日成 치하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다면 朴正熙와 金日成을 同格으로 놓아도 되지만.
 
 1973년의 한국에서 과연 빵이 없었는가. 1960년대 말을 경계로 해서 春窮期란 말이 사라지고 굶어죽는 사람도 없어졌다. 경공업 국가에서 중공업 국가로 도약하던 대한민국이 과연 「자유도 빵도 없는, 북한보다 못한 국가」였던가. 1960년대의 경제력을 초과하는 군사력 건설로 해서 1970년대에 들어서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날로 악화되어 가던 북한에 남한보다 더 풍족한 빵이 있었단 말인가.
 
 金大中씨는 朴正熙에 대한 미움 때문인지 판단력에 문제가 생겨 한국이 북한과의 힘의 관계를 逆轉시켜 가고 있던 1970년대의 거대한 변화를 놓친 것이다. 그의 연방제안도 그런 상황 오판의 결과물일 것이다. 그의 낡은 對北觀은 化石처럼 굳어졌고 공산권 붕괴와 300만 餓死者 발생이란 상황을 맞은 북한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 데서 오늘날의 혼란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金大中씨는 또 월남파병을 실패한 것이라고 저주에 가까운 단정을 했다. 월남파병은 월남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안보를 튼튼히 했으며(우리 국군을 파병하지 않았으면 미국은 주한미군을 월남전선으로 빼갔을 것이다), 韓美 동맹을 다졌고,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은 성공적 해외진출이었다. 우리가 1970년대에 中東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한 건설 人力이 1960년대에 월남에서 양성되었다.
 
 金大中 대통령은 작년에 베트남 대통령에게 월남파병에 대해 사실상 사과하는 발언을 하여 참전군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30년 前 소신이 국가정책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그의 上記 언동에서는 대한민국이 민족사적 정통성을 대표하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국가라는 관점과 자부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대한민국을 민족사의 이단이며 反國家 단체인 金日成 정권과 동격으로 놓거나 북한 정권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인다.
 
 朴正熙 정권에 대한 격렬한 비판과 金日成 정권의 인권말살에 대한 침묵,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연방제 통일방안에 대한 동조는 매우 대조적이다. 정상적인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갖게 마련인 金日成-金正日 정권에 대한 분노와 正義感의 발로가 그에게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그의 성향이다.
 
 남북한에 대한 金大中씨의 논법은 형식적으로는 제3자 입장에서 균형을 취하는 것 같으나 그 실질로 들어가 보면 朴正熙 정권에겐 가혹한 비판을, 金日成 정권에겐 好評 또는 지엽적 비판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主流를 이끈 李承晩-朴正熙 세력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는 느껴지지만 현대사의 흐름을 逆流하면서 동족에게 온갖 참화를 불러온 金日成-金正日 세력에 대해서는 그런 감정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 지금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을 直視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金大中씨는 朴정권을 비판함에 있어서 정권과 국가를 분리하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이 朴正熙 정부를 경제적으로 지원한 결과는 대체로 국가와 국민한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였다. 국가발전을 위해서 외채를 가장 효율적으로 쓴 나라가 朴正熙 치하의 한국이란 사실은 이미 검증된 진리이다. 지도자와 국민들이 한 손엔 망치, 한 손엔 총을 들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땀흘리고 있을 때 한국에 대한 경제지원에 문제가 있다는 폭로공세를 외국에서 펼친 것은 정권이 밉다고 국가와 국민들에게 해가 가는 행동을 한 것과 같다.
 
 이런 金大中 대통령은 지금 북한을 상대함에 있어서 金正日 정권과 동포들을 분리하지 않고 金正日 정권을 군사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동포들의 고통을 지속시키는 현금지원까지 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을 하는 학생들에게 국민들의 세금을 공짜로 주어 가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金大中씨가 한반도에서의 외군철수를 거론하고 「한국이 북한의 연방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는 부분이다. 이는 한국이 북한 정권의 對南적화 전략을 수용하고 自殺하라는 말과 비슷하다. 1970년대 초에 한국이 연방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反헌법적, 反대한민국적 발언을 한 사람이 권력을 잡은 뒤에 「북한의 낮은 단계 연방제와 나의 통일정책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요즘 와서 새삼 놀라는 사람들은 金大中씨의 사유체계를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던 이들일 것이다.
 
 金大中씨의 上記 발언들은 그의 진심을 잘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를 20代에 좌익 행동대원이었던 사람이 갖게 되는 평생을 가는 이념적 성향의 한 표현이라고만 보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그는 남북한을 보는 데 있어서 균형감각·사실주의·정의감·애국심이 결여되어 있다. 그의 언동에서는 대한민국이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라는 인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1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