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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루트 1만㎞] 2. 옛 자취를 찾아 - 선양에서 베이징까지

鶴山 徐 仁 2005. 10. 31. 18:15
[고선지 루트 1만㎞] 2. 옛 자취를 찾아 - 선양에서 베이징까지
사라진 '고려영' … 도로 안내판만 남아 역사 증언
1200여년 전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고선지 장군은 서역을 평정하고 동서문명의 교차로인 실크로드(비단길)를 활짝 넓혔다. 그 길, 고선지 루트를 답사하는 취재팀이 키르기스스탄 고원지대에서 마주친 말들이 차량에 아랑곳하지 않고 길을 건너고 있다. 뒤로 만년설이 쌓인 톈산산맥이 보인다. 조용철 기자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구려인 집단 거주지였던 고려영, 도로 안내판에 그 이름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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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섬에 갇혀 산다는 반성부터 하게 된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가는 단둥을 강 건너 두고도 신의주를 10년 전의 풀죽은 모습으로 남겨 놓은 북한의 지도자들,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과거에 매달리고 있는 남한의 지도자들, 너무나 안타깝다.

단둥에서 선양으로 향하는 순간 온 대륙을 흔들고 있는 개발의 박동이 전해 왔다. 긴장감이 밀려왔다. 선양 주변에서는 어디라도 삽만 대면 석회가 나올 듯, 도처가 석회석 탄광이다. 그 같은 자원을 바탕으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중국은 개발 열풍에 싸여 있다.

"중국이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은 북한 체제의 불안정과 관계있다고 보면 됩니다."조선족이 한 말이니 굳이 부인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동북공정이나 동북3성 개발이니 하는 정책이 우연히 나왔겠는가. 이런 상황이니, 고구려 유민의 아들 고선지의 자취를 더듬는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었다.

선양에서 야간열차로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른 새벽녘인데도 베이징역 앞은 그야말로 사람 천지다. 이처럼 번잡한 오늘날 중국의 수도 베이징도 고선지가 살던 당나라 시대에는 유주(幽州)라는 일개 빈약한 주에 불과했었다.

우리 일행은 베이징역에서 북쪽으로 30여km에 떨어진 '고려영(高麗營)'으로 향했다. 고려영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난 뒤, 고구려인을 잡아다가 집단으로 수용하거나 거주시켰던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시장 상인, 길거리의 노인, 학생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고려영이라는 이름의 연유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중국의 일반인들이 보통 그러하듯 그런 사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찾기란 힘들었다. 고려영이란 이름을 뚜렷이 새긴 도로 안내판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증거다.

우리는 밀운현으로 발길을 돌렸다. 밀운현의 위치는 고려영에서 다시 북쪽으로 40km 지점. 밀운현을 찾은 데는 까닭이 있다. 751년 고선지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있던 석국(石國)의 이슬람연합군을 맞아 탈라스 강변 전투에서 패한 뒤 장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뒤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 현종은 고선지를 진압군의 장군으로 임명하면서 밀운군공이라는 작위를 내렸기 때문이다.



고선지의 작위에 대해 신장성 사회과학원 쉐쭝정(薛宗正)은 "밀운군의 봉록을 고선지에게 준다는 의미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둔황의 막고굴 강해사 리신(李新)과 우리 일행의 생각은 달랐다. "현종은 고선지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고구려 유민의 집단거주지를 작위로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를 확인할 작정으로 밀운현을 찾았으나 도대체 옛 모습을 찾아낼 수 없었다. 다만 밀운현 청사 부근에서 명나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옛 성곽 일부를 찾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너무나 아쉬워 우리는 지난날에 번성했던 역사(驛舍)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근처까지 찾아갔는데도 뚜렷한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버리거나 허물어뜨리기를 싫어하는 중국인들도 그 역사만은 사정 두지 않고 깡그리 철거해 버린 듯했다. 낙심천만이 되어 근처 뒷골목을 배회하던 중에, 낡은 러닝셔츠 바람으로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던 중늙은이에게 길을 재차 묻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 심술궂은 작자가 역사를 바로 자신의 등뒤 불과 몇 미터 거리에 두고도 우리들에겐 모른다고 퉁명스럽게 잡아뗀 것이었다. 이 작자가 왜 그렇게 배타적이고 뒤틀린 심사를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중국인들은 곁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자기와 관련이 없으면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다. 이처럼 배타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일궈 놓은 생활기반과 기업환경을 비집고 우리 민족의 유민과 이주의 역사는 오늘날까지 지치는 법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한국식 자장면을 중국에 퍼뜨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품고 있는 이기영 사장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박힌 돌 빼면서 상처받을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여기서 당나라 장군 고선지와 우리 조선족의 이미지가 겹쳐져 다가왔다. '20원가량'이라는 표현을 '20원 앞뒤로'라거나 '거의 다 왔다'는 표현을 '거진 다 왔다'라고 쓰는 조선족을 보면 우리보다 더 한국적일 수 있는데, 그들의 정서는 어떨까? 한국에 사업차 들어가 보려고 비자를 신청하면 대사관 관계자들이 마치 범인 다루듯 한다고 불만을 털어놓는 조선족이 많았다.

어쨌든 이념 따위에 얽매여 스스로를 짓눌러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살았던 윗세대와 달리 실용지향이 된 중국 젊은이들의 변화는 진실로 눈부시다. 이들은 이른바 낯선 것에도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한류 열풍을 만든 주인공이 되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중국의 젊은이들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베이징 시내의 4층짜리 한 서점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래의 또 다른 웅비를 위해 너도 나도 카트를 끌고 다니며 책을 주워 담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도시를 벗어나기만 하면 중국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길가로는 온통 옥수수 같은 곡물을 심은 들판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포장도로를 소.오리떼가 건너는가 하면 그 뒤를 이어 택시.오토바이.달구지.삼륜차.트럭.버스가 일렬로 달린다. 그 와중에 오리 네 마리가 길거리에서 서로 어울려 애무하고, 서로를 방해하며 사랑놀이를 벌여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시간과 공간의 어제와 오늘을 두루 살필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런데 이것도 북한의 변화를 읽는 가늠자로 봐도 괜찮을까. 여러 차례 중국을 찾았지만 중국 내 북한 식당의 변화를 이번처럼 크게 느꼈던 적은 없었다. 선양의 북한 식당은 아예 한국인들을 겨냥하고 있다. 한 식당 종사원이 "찔레꽃 붉게 피는…"을 부를 때는 한 곡 정도 서비스하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울고 넘는 박달재'등 남한 노래가 이어졌다. 대구 유니버시아드에 응원단으로 참가했다는 여성도 있었다. "선생님, 주량은 곧 인격과 비례하는 것 아닌가요"라는 아리따운 여성의 '애교'에 한 잔 더 들이켜지 않을 남조선 남자가 있겠는가. 남한의 소주도 인기 품목이었다.

종사원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훨씬 쉽고 부드러워졌다는 것이 단둥.선양.베이징의 북한 식당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변화였다. 베이징의 한 북한 식당에서는 종사원들의 복장이 한복의 틀을 벗어나 파격적인 개방형으로 바뀐 것도 예상하기 어려웠던 변화였다.

중국에 진출해서 외화벌이를 하고 있는 북한 업체 중에 식당업 이외에 제조업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 있겠다.

그런데 북한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서 쓰는 말들은 예나 지금이나 북한 방송의 아나운서들이 그러하듯 한결같이 가성을 쓰고 있었다. 가성이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신뢰감을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뒀으면 했다.

김주영(소설가).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 특별기획 '고선지 루트 1만㎞' 연재를 오늘부터 재개합니다. 8월 30일 첫 회가 나간 뒤 필자 사정으로 후속 연재가 지연되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넓은 이해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005.09.27 05:40 입력 / 2005.09.27 05:4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