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선지 루트 1만km] 3. 천년 고도, 비단길 출발점 - 시안

鶴山 徐 仁 2005. 10. 31. 18:18
[고선지 루트 1만km] 3. 천년 고도, 비단길 출발점 - 시안
양귀비 비파소리 아련한 '문명의 교차점'
당나라 시대엔 장안으로 불렸던 시안, 당시의 성벽은 사라지고 명나라 때 새롭게 조성된 고성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높이 12m, 너비 1218m, 길이 14km. 중국 성벽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다. 시안=조용철 기자
한달 동안 ‘고선지 루트’ 1만km를 다녀와 시리즈를 공동 집필 중인김주영 소설가(오른쪽)와 지배선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황제들이 온천 휴양지로 이용하던 화청지. 현종의 넋을 빼놓은 양귀비가 방금 목욕을 끝내고 나서는 모습의 동상이다.

관련링크
베이징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무려 11시간을 새우잠으로 시달리고 난 이튿날 새벽,비로소 시안(西安)에 도착했다. 시안은 겨울에도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문 온화한 기후의 도시다. 하지만 여름이나 겨울이나 항상 희뿌연 안개가 덮여 있어 이곳 사람들의 표정도 전통적으로 침울한 얼굴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지난밤 내린 비 때문인지 역 광장 앞의 새벽 풍경도 우중충하고 울적했다.

시안은 고선지 장군과 당현종, 그리고 양귀비가 활약했던 당나라 시대엔 장안으로 불렸다. 장안이란 지명은 우리도 도성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자주 사용했기에 낯설지 않다. 장안 혹은 시안은 서한 시대부터 명나라 말까지 약 1600년간 동서 문명의 교통로인 비단길을 따라 들어온 서방 문물이 꽃 피었던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탈라스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온 고선지가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하기까지 우우림 대장군이라는 신분으로 5년간이나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현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영안방과 선양방의 두 저택을 오가며 생활했다. 고선지는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시안에서 동쪽으로 150㎞ 떨어진 동관(潼關)에서 억울하게 참살당한 비운의 장군이었다. 까닭은 섬주(陝州)를 지키고 있으라는 황명을 어겼다는 죄목이었다.

숙소에 여장을 푸는 길로 곧장 시가지로 나섰다. 노점상들이 파는 과일 중 흔하게 시선을 끄는 것은 석류였다. 현종의 비였던 양귀비가 좋아해 석류나무 심기를 권장하면서 석류가 이 지방의 특산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석류나무는 비단길을 통해 페르시아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지금 중국 대도시의 번듯한 가게나 노점상에서 팔고 있는 수박.포도.오이.자두.호박.참깨.마늘.당근 같은 과일과 채소들은 언뜻 중국 토종으로 알기 쉽지만, 모두 한무제가 개척하고 당현종의 고선지가 확장시킨 비단길을 따라 서역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현종의 넋을 빼놓은 빼어난 미모의 양귀비. 관능적 육체미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그녀의 춤과 노래, 그리고 악기를 다루는 탁월한 솜씨였다. 양귀비가 잘 탔다는 '비파' 역시 이란.시리아.터키 등지에서 비단길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왔다. 구자무(龜玆舞).소륵무(疏勒舞).고창무(高昌舞).이주무(伊州舞) 등과 같이 중국 전통 가무의 원형을 이루었던 춤들이 서역에서 중국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그 결과 수.당 시기에는 서역의 음악과 무용이 중국 내륙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양귀비가 추었다는 '예상우의가(霓裳羽衣歌)'와 그 춤의 반주곡인 '예상우의곡'은 중국과 서역의 음악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화의 교류는 무역을 따라 진행돼 왔다. 받는 것과 주는 것이 교차되는 것은 당연. 당나라 때 장안성에는 동시와 서시가 있었는데 모두가 상업구역이었다. 특히 서시는 서역을 비롯한 외국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들 서역 상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이구동성으로 가져가길 원했던 것은 비단이었다. 그 당시 고대 로마에선 중국 비단이 금과 같은 값으로 거래되었고, 중국을 비단의 나라로 불렀다. 장안에서 비단을 구입한 서역 상인들은 타크라마칸 사막을 낙타와 함께 목숨을 걸고 넘어 로마에 도착했다.

역사의 비단길 시발점 위에서 다시 오늘날 개척되는 문화 교류의 새로운 비단길을 생각해 봤다. 여러 갈래로 펼쳐지고 있는 '서해의 비단길'. 이 길을 통해 페르시아로부터 들어왔다는 중국의 채소와 과일들이 지금은 물밀듯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다. 한국인 식탁에 오르내리는 미꾸라지.낙지.주꾸미.장어.피조개와 같은 수산물은 말할 것도 없고, 고춧가루.깻잎.무말랭이.김치.고추장.된장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즐겨 먹는 식품의 8할이 중국에서 수입되고 있다. 때로는 중국산 수산물이 북한산으로 둔갑하기도하고 북한산이 중국산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념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그들은 우리와 뚜렷한 구분을 두고 있지만, 입는 것과 먹는 것들은 '서해의 비단길'을 통해 뒤섞여 들어와 네 것과 내 것의 구분이 헷갈려 버린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줄 것은 무엇이고 받을 것은 무엇인가. 얽히고 설키는 주고받음 속에 또 어떤 새로운 문화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싹틀 것인가.

마침 대형 서점 앞을 지나다가 이채로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서점 계단 앞에 '가정교사 자리를 구한다'는 팻말을 든 대학생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중국이 자본주의 경제 제도를 도입하면서 생겨난 학생들의 인력시장이다. 중국의 큰 도시는 물론 작은 읍내에도 이른 아침에 길거리로 나가면, 이른바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는 날품팔이 인력시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제각기 익숙하게 다루는 연장을 들고 있기 때문에 고용자가 일할 사람을 고르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백화점이나 대형 물류센터 앞에는, 발걸음 한번 떼어놓기도 어려울 정도로 근력이 달려 보이는 노인네들이 건물의 정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 봤다. 그랬더니 그 노인네들이 건물을 나서는 젊은이들이 버리고 가는 빈 페트병을 수거하고 나서는 것이었다. 푼돈이라도 잇속을 챙길 만하다는 생각이 들면, 근면성과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치심이나 굴욕감까지도 단숨에 극복하거나 외면해 버릴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오늘날 동남아 여러 국가의 경제권을 석권하다시피 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탁월한 상혼의 바탕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의 밤 풍경은 다채롭다. 그 중에서 동신가(東新街), 북대가(北大街), 금화남로(金華南路)에 위치한 일명 '홍등가'라 불리는 야시장 풍경을 빼놓을 수 없다. 오후 5시가 되면 하나 둘 문을 열기 시작해 새벽까지 이어지는 이곳은 일상에 지친 서민들의 휴식공간이다. 피곤한 여행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찾아와 갖가지 요리를 싼 값에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야시장은, 어느 나라든 빨리 잠들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장소 아닌가. 그렇다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돌출 행동이나 탈선도 응당 눈에 띄게 마련일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러나 두 시간 이상 그곳을 배회하면서 관찰했으나 예상했던 광경 중 어느 것 한 가지도 목격할 수 없었다.

시안에는 유학생을 포함해 3400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의 주재원이나 상사 직원들은 없다고 한다. 이곳으로 온 한국인들이 개업한 업종 중엔 공교롭게도 미용업이 많다. 중국 동북지방이나 베이징에는 한국인 기업들이 즐비하다 할 수 있을 정도로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시안 쪽으로의 진출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된 셈이다. 아마도 중국의 경제정책이 동쪽에 편중됐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 중국은 서쪽으로도 달려가고 있다. 중국 경제의 서진정책은 너무나 그 기백이 활달하고 공격적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05.09.29 04:54 입력 / 2005.09.29 05:24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