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고선지 루트 1만km] 5. 동서 교통 요충지 - 우웨이·장예

鶴山 徐 仁 2005. 10. 31. 18:22
[고선지 루트 1만km] 5. 동서 교통 요충지 - 우웨이·장예
"초원길 갖는 자 천하를 갖는다" … 유목민 각축장
왼쪽(남쪽)으로 기련산맥과 오른쪽으로 마종산맥이 나란히 달리는 하서회랑. 우웨이에서 장예로 가는 길이다. 멀리 울타리처럼 보이는 만리장성 토성 앞으로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조용철 기자
날아가는 제비를 뒷발로 밟으며 달리는 천리마. 한나라 장군의 분묘에서 발굴된 부장품을 모사해 만든 조각이 그 무덤 앞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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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쪽의 간쑤성(甘肅省)을
지도에서 찾아보라.오른쪽으로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와 왼쪽으로 칭하이성(靑海省) 사이를 옹색하게 비집고 들어가 남동-서북쪽으로 길게 뻗으며 신장(新疆)웨이우얼자치구와 맞닿아 있다.간쑤성을 중국의 영토로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만만치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지형이다. 오늘 우리 일행은 간쑤성을 관통한다.


유명한 하서사군(河西四郡) 혹은 하서회랑(河西回廊.황허의 서쪽에 위치하면서 남쪽 기련산맥과 북쪽 마종산맥 사이 약 1200여㎞의 긴 골짜기 길)이 놓여 있는 곳. 하서회랑은 우웨이(武威)-장예(張掖)-주취안(酒泉)을 거쳐 둔황(敦煌)에 이르는 동서 교통의 요충지다. 이곳은 지난날 유목민족 사이의 오랜 각축장이었고, 당나라 장안을 공격하는 거의 유일한 루트이기도 했다. 토번(티베트족)은 우리가 지금 차창 밖으로 바라보고 있는 남쪽의 기련산맥을 무대로 번창했고, 돌궐(몽고족)은 마종산맥을 무대로 끈질기게 당나라를 위협했다. 이런 까닭에 당나라는 하서회랑에 많은 상비군을 배치했고, 그들 상비군은 오랜 전쟁과 척박한 환경도 아랑곳하지 않는 한혈마(汗血馬.털빛이 붉고 붉은 땀을 흘리는 천리마)로 무장하고 있었다.

란저우(蘭州)에서 우웨이까지는 약 280㎞의 노정이었다. 란저우 시가지를 벗어나자 왼편으로 곧장 기련산맥이 나타났다. 주변의 산악지역엔 소수민족인 장족이 거주한다. 이들은 산악 구릉지대에 흩어져 살면서 유채를 재배하고 벌을 길러 기름과 꿀을 팔아 생활한다. 장족들은 척박한 산기슭에다 유채밭을 가꾸느라 온갖 고초를 겪고 있겠지만, 그들이 일구어 놓은 피와 땀의 결실은 멀리서 바라보는 여행자들에겐 오직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만 보였다.

이 일대에서 고선지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나라 때 어린 고선지는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하서군에서 생활하다가 우웨이로 이주했다. 토번과 돌궐이 수시로 출몰해 괴로움을 당했던 당나라는 서북 변경에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된 군대를 배치해 방패막이로 삼았다. 때문에 아버지 고사계가 무장의 위치까지 올라갔지만 고선지 가족의 생활은 서럽고 비참하기만 했다. 훗날 고선지가 이곳 우웨이의 태수와 하서 절도사 같은 벼슬을 제수받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하서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우웨이와 고선지는 관련이 많다.

우리 일행은 우웨이에 도착하자마자 당나라 때 하서군의 치소가 있었다는 마을을 수소문해 찾아갔다. 지금은 옥수수 창고로 쓰이고 있는 대저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둥마다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져 있는 등 대부호가 살았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런데 문화재란 안내판이 버젓하게 서 있는 저택이었음에도 한쪽에서 관리인이란 사람이 식당 영업을 하고 있었다. 사십대의 목소리 걸걸한 관리인은 우리가 무슨 질문이라도 던지면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해 뙤약볕을 무릅쓰고 찾아간 우리 일행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당나라 때 "양주(凉州.우웨이의 옛 이름) 7리 10만호/ 호인(胡人)이 여장을 풀고 비파를 타는구나"하는 노래가 유행했을 만치 번창했던 곳이 바로 우웨이였다. 하지만 오랜 동안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던 우웨가 이제 새로운 명소로 발돋움하고 있다. 시가지 전체를 일직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대대적으로 뜯어고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튿날 우리 일행은 부랴부랴 장예로 차를 몰았다. 당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군마를 기르고 있다는 산단(山丹)으로 향하면서부터 차창밖으로 길게 뻗은 가스관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장성에서 생산되는 가스를 동쪽 지방으로 운반하기 위해 두 개의 관을 나란히 설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중국에선 이것을 서기동수(西氣東輸:서쪽의 기체를 동쪽으로 수송한다는 뜻)라 불렀다. 장예에 당도할 때까지 우리의 시선을 빼앗은 또 다른 것은, 진나라.한나라.명나라를 거치며 쌓았던 장성(長城)과 봉수대였다. 장성은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건조한 기후 덕분에 지금까지 크게 허물어지지 않고 대체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토성들 사이사이로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흉노와 토번, 그리고 돌궐과 같은 기마 유목민들이 우리들이 지금 답사하고 있는 하서회랑의 여러 곳을 오랫 동안 유린하며 창궐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들이 좋은 군마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비단길을 개척한 한무제는 그들의 말이 부러웠다. 그래서 한무제는 흉노들이 타던 말과 비단을 서로 바꾸는 마견무역(馬絹貿易)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이를 통해 명마를 확보함으로써 결국 흉노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유목민 입장에서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통탄스러운 마견무역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역사는 흐르고 그 흐름엔 명암이 있게 마련이다. 이 지역에서 말과 함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양떼들의 존재다. 당시 양떼는 스스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최고의 보급품이었다. 언제나 군대를 뒤따라 오면서 고기.우유와 치즈를 제공했고, 나아가 노숙할 때 피할 수 없는 강추위를 견딜 수 있는 털가죽까지 제공했다. 양고기를 소금물에 적셨다가 건져내 말린 다음 육포로 만들어 먹는 건조법은 흉노족들이 개발한 식사법이다. 들개처럼 집도 없고 나라도 없었던 흉노족은 이처럼 음식을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식사법을 개발함으로써 사막에서도 오래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 동안 침체돼 있던 도시를 혁명적으로 뜯어고치는 것은 장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번화가에는 20층 넘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간쑤성에서 오늘의 중국 당국은 국토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산중턱은 물론 산봉우리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계단식 식목을 하고 있었고, 스프링클러까지 설치해 황허에서 끌어들인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그 범위가 하도 넓어 멀리 바라보이는 산등성이까지 희부연 물안개가 끼어 있을 정도였다. 중국의 경제가 이제 서쪽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현실로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산기슭에 배치한 스프링클러는, 달리는 차창으로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아도 계속 이어져 있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2005.10.07 05:02 입력 / 2005.10.07 11:2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