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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루트 1만km] 7. 비단길 중심, 사막길 - 둔황

鶴山 徐 仁 2005. 10. 31. 18:27
[고선지 루트 1만km] 7. 비단길 중심, 사막길 - 둔황
장군을 따르라 그가 곧 길이다
비단길의 중심인 둔황. 서역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둔황에서 오랜 여정 동안 먹을 양식과 사막을 넘을 채비를 한다. 기련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모래산인 명사산(鳴沙山)은 막고굴과 함께 둔황의 상징이다. 둔황=조용철 기자
‘벽의 도서관’이란 명성을 갖고 있는 막고굴은 불상을 모신 크고 작은 동굴이 1000개가 넘는다고 해서 천불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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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길. 창문만 열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와 삭막하기만 한 풍광이 이어진다. 차창 멀리 눈이 시리도록 바라보이는 기련산맥의 설산이 인적이라곤 없는 고비사막 위로 아득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신기루의 파노라마같은 정경이 고단하기 그지없는 차안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술렁이게 했다.

우리 일행은 안시(安西)를 뒤로하고 둔황(敦煌)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둔황은 당나라 땐 사주(沙州)라고 불린 곳. 오후 1시쯤 도착해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뒤 곧장 둔황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안내인의 말이 "장안에서 로마까지 1만5000km에 달하는 실크로드(비단길)의 실제 중심은 둔황"이라고 했다. 서역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둔황에 일단 집결해 오랜 여정 동안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사막을 넘을 채비를 하곤 했다.

박물관에서 고선지와 직접 관련된 유물을 찾지는 못했으나 고선지가 활약할 당시 둔황 서쪽에 위치한 옥문관(玉門關)의 통행권인 '출입관권'(出入關券)을 찾은 것은 소득이었다. 둔황에서 서역으로 출입하는 두 개의 관(關)이 있는데, 북쪽에 있는 것이 옥문관이고, 옥문관보다 70km 남쪽에 양관(陽關)이 있다. 고선지 일가도 안서도호부에 배속될 때 두 관 가운데 하나를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선지가 어느 길을 통과했는지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둔황박물관에서 마지(麻紙)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를 통해 중국의 제지술이 서방 세계로 전파되었다는 물증이기에 마치 고선지의 영혼을 만난 듯 기뻤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우리 일행은 기련산맥의 끝자락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을 찾았다. 이곳에서 한무제의 명령으로 서역에서 가져다 심은 '목숙'이라는 풀을 발견했다. 흉노나 돌궐 등 유목민족이 타던 한혈마(汗血馬.달릴 때 붉은 땀을 흘리는 천리마)를 입수한 한무제가 그 말들의 먹이로 쓰기 위해 수입한 풀이다.

고선지도 이 한혈마 타고 이 일대를 누볐던 것일까. 그가 탄 말도 한혈마 같은 준마였음이 역사서에 언급돼 있다. 고선지가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최고의 준마를 탔다는 기록이다. 이와 관련 고선지와 동시대 인물인 시성 두보(杜甫)가 쓴 시 '고도호총마행'(高都護馬行)이란 시에서 고선지의 말을 찬미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시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안서도호(安西都護)의 푸른 호마(胡馬)

이름을 날리고 별안간 동으로 왔네

전장에서는 당할 자 없었고

주인과 한마음으로 큰공을 세웠네

공을 이루니 함께 다니는 데마다 대우 극진했네

아득히 먼 곳 타클라마칸사막에서는 나는 듯 왔네



오색 꽃무늬 흩어져 온 몸에 감도니

만리라 한혈마를 이제 보았네

장안의 장사들이야 감히 타보기나 하랴

번개보다 더 빠른 걸 세상이 아는데

푸른 실로 갈기 딴 채 늙고 있으니

언제나 서역 길을 다시 달릴까!



파미르 고원을 넘나든 고선지 장군의 한혈마를 두보가 예찬한 시다. 시 제목에서의 '고도호'와 첫 구절에 나온 '안서도호'라는 용어를 통해 이 시가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를 지냈던 고선지 장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런데 시를 가만히 보면 시 제목과는 달리 준마만 예찬하는 것이 아니다. "장안의 장사들이야 감히 타보기나 하랴"는 시구를 보라. 한혈마를 탈 줄 아는 이는 고선지밖에 없음을 시성이 예찬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두보는 고선지 장군이 고구려인의 후예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디 출신이냐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두보와 같은 대시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인간세계의 부질없는 차별짓기로 보였을 법하다.

이 시의 창작 연대는 대략 740년 경으로 짐작된다. 고선지 장군이 달해부(達奚部.톈산산맥 서쪽 끝 부근에 있던 투르크족의 한 무리가 세운 소국)를 공략해 대승을 거두고 귀환했을 즈음이다. 고선지가 장군으로 활약한 초기의 일이다. 달해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선지는 기병 2000명만을 거느리고 출정해 달해부의 병사를 모두 죽였을 뿐 아니라 말 등의 가축도 다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이를 통해 적은 병사로 대군을 섬멸하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한 인물로 고선지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탔던 한혈마도 우리 일행이 지금 서있는 명사산에서 목숙을 먹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는 고선지의 체취를 직접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의 둔황시는 막고굴을 떼어놓고는 독립적인 평가가 불가능한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돈황 시내에 거주하는 약 8만명의 인구 중 80%가 막고굴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일부는 교외 지역에 흩어져 면화 재배로 생계를 삼는다. 관공서는 물론 주유소.약국.상가 모든 것이 오직 막고굴 관광객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런데 최근 중국과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본인 관광객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막고굴은 천불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기 386년 락승과 법랑이라는 스님이 석굴을 판 것을 계기로 이곳을 지나는 사신과 상인, 병사들이 전문가를 동원해 불단을 세우고 조각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석굴파기는 여러 왕조를 거쳐서도 끓임없이 이어져 당나라 때에 이르면 크고 작은 동굴이 1000개가 넘었다. 서역으로 가는 모든 사자(使者)와 비단을 운반하는 상인들, 그리고 출정하는 장군들은 안전과 강복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살아서 돌아오느냐 죽어서 사라지느냐는 험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수한 훼손을 당했지만 막고굴은 지금까지도 '벽의 도서관'이란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굴 안에는 4~11세기 불교 경전, 경제문서와 문학.과학기술 관련 사료를 비롯해 백화(帛畵).지화(紙畵).직염자수 등 각종 문물 5만여점이 보존돼 있다. 문자는 대부분 한문이지만, 티벳어.위구르어.아리아어.몽골어 불경도 적지 않다. 당시 둔황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동서양과 인종을 망라했던 것이다.



김주영(소설가).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2005.10.14 05:59 입력 / 2005.10.14 06:14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