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 때 축조돼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 왔던 백암산성. 그 앞으로 태자하가 흐르고 광활한 평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고사계 일가가 당나라로 끌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영토였다. 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와 소통했던 우리의 항구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의 당은포(唐恩浦)가 대표적이다. 신라 진흥왕 14년부터 나당 사이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해왔었다. 그리고 문무왕 8년(668), 고구려 멸망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던 유인궤(劉仁軌)가 이끌었던 수군도 산둥반도를 출항하여 당은포에 도착했었다.
공교롭게도 우리 일행이 탄 배가 출항했던 인천항 조금 남쪽에 당은포가 위치하고 있다. 옛 고구려 유민들도 필경 우리와 비슷한 연안항로를 이용해 당나라로 끌려갔을 것이다. 정든 땅을 버리고 낯선 이국으로 정처없이 끌려가는 유민의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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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제1 부두를 벗어나 두 시간 정도, 담녹색 바다 위로 잿빛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서 침상을 찾아 봇짐을 내려놓은 승객들이 하나 둘 선미(船尾)쪽 갑판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갑판의 벤치에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고, 소주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 정오쯤 그런 사람들을 태운 낡은 여객선 동방명주는 단둥의 동항에 닻을 내렸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수많은 고구려 사람이 바로 이곳 항구를 거쳐 내륙의 당나라로 끌려갔다. 아마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도 그 치욕스러운 대열 속에 섞여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때 끌려간 고구려 사람들은 대부분 평양성에서 생활하였던 지배층이었고, 수효는 20만 명을 헤아렸다. 단둥 동항에서 배를 내린 우리 일행이 곧장 길을 재촉하였던 선양길 역시 그때 강제로 끌려갔던 유민들의 길과 같았다.
우리는 여장(旅裝)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곧장 압록강으로 나갔다. 오후인데도 짙은 안개가 압록강 하구를 뒤덮고 있었다. 여러 나라의 국경선을 넘나들었던 경험이 있지만,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바라보는 중국의 단둥과 북한의 신의주만큼 대조적인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은 아직 없었다. 보트를 타고 강 하구 쪽으로 가보면 예나 지금이나 강가에 방치한 폐선 가녘에 올라앉아 오르내리는 보트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는 북한 사람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마주 바라보이는 단둥에서는 수많은 고층빌딩이 지금도 하늘 비좁은 줄 모른 채 치솟고 있다.
이튿날 미니버스편으로 선양에 당도하였다. 여장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남쪽으로 120㎞ 떨어진 백암산성(白岩山城)으로 내달았다. 도중에 랴오양(遼陽)이란 곳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이곳도 한때는 고구려의 영토였었다. 다시 말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그 당시 중국의 패자나 다름없었던 후연(後燕)으로부터 요동왕(遼東王)이란 칭호를 받았었다.
이것은 광개토대왕 재위 때 통치영역이 대방(帶方)은 물론이고, 랴오둥 전 지역을 망라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곳 사람들은 연주산성(燕州山城)으로 부르고 있는 백암산성 역시 고구려 시대에 축조되어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왔던 성이다. 산성 곁으로는 태자하가 흐르고 그 앞쪽을 바라보면 광활한 평원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성의 정상에는 지휘소가 있었는데, 무엇보다 성곽을 견고하게 지탱해주기 위하여 사용된 반원주 형태의 건축구조에서 고구려 건축기술의 진수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기술적으로 완벽에 가깝고 또한 견고하기 그지없는 건축기술을 느끼게 한다. 권력자 남생(男生)과 그의 아우들의 권력투쟁만 없었더라도 고구려의 영화가 그처럼 허망하게 마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는 그 생애를 마감하였다 하더라도 그 백성들이 터놓은 길은 아직까지 천 수백 년 동안 한결같은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바람과 먼지들까지 용틀임으로 일어나며 끓어오르는 것을 쉴 새 없이 반복해 왔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 일가가 당나라로 끌려갈 때만 해도 당연히 고구려의 영토였던 이 길.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인천과 랴오둥반도의 단둥, 그리고 선양을 이어주는 중국 서북쪽의 이 경로뿐만 아니라 산둥반도까지 거침없이 아우르는 또 다른 길들도 모두 한국 상인들이 개척한 상로가 되었다. 고구려 사람 고선지가 개척하여 중국의 국토 한중간을 가로지르게 구성된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오늘의 한국인들이 한반도까지 연장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와 명분이 상당하고 뚜렷하다.
선양 서탑거리에 가보면 짧은 기간 안에 그곳에 파고들어 일궈놓은 한국인들의 기적적인 생존기세에 놀라게 된다. 아직은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가게들이 많고 두 달에 한 번꼴로 간판이 바뀌기도 한다지만, 한국인들이 와서 문을 연 가게들이 그 거리에 잘 여문 옥수수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중한우의(中韓友宜)'를 다지자는 대형 전광판이 걸려 있는 이 거리의 중심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바로 중국 신(新)실크로드의 동북쪽 통로에 존재하는 상인들이다.
한국인들이 서탑거리에 자리잡게 된 것은 그곳에 옛날부터 조선족들이 모여 살았던 연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요즈음의 한국인들이 그 낯설고 물선 곳에서 비교적 큰 갈등을 겪지 않고 자리잡을 수 있었던 근저에는 그곳에 옛날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이 먼저 자리 잡고 살았기 때문인 것과 상통하는 일이다.
현재 350여 개의 한국 기업이 선양시에 진출해 있고, 시의 서남부에 있는 경제기술 개발구에는 12개의 제조업체가 진출해 있다. 그중에서 1992년 선양에 진출한 선양동방방직유한공사의 박순경 사장의 성공은 중국 정부 당국으로부터 진작 주목받고 있었다. 초기에는 종사원 3000명 이상의 고용효과를 보았고, 지금도 연 매출 5000만 달러 이상의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한국인 기업으로 우뚝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양의와 중의를 결합한 의원과 파파스라는 퓨전 요식업으로 성공한 이기영 박사도 선양에선 소문난 한국인이다.
김주영(소설가)
지배선(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고선지는 누구
실크로드 장악한 고구려 출신 군인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에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고구려 유민이 많다. 당에서 노예가 신분 상승하는 유일한 길이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사계(高舍鷄)는 고구려인 20여만 명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 그는 당에서 고선지를 낳았고 군인 생활을 하면서 생존을 위해 어린 아들에게 무예를 가르쳤다. 고선지는 신장(新疆)의 위톈(于.오늘날 허톈:和田)에서 첫 지역사령관으로 토번 진압에 공을 세웠다. 그는 고구려 출신 노예라는 조소를 받으면서도 안서도지병마사(安西都知兵馬使).안서도호(安西都護)로 승진을 거듭했다. 특히 1만 명을 이끌고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토번을 정벌한 그의 대원정을 영국의 역사탐험가 오렐 스타인은 "한니발이나 나폴레옹보다 더 위대한 원정"이라 극찬했다. 이 전쟁의 성공으로 서역 72국이 당에 조공했다.
외국 학자들은 중국에서 영토 확장에 기여한 인물로 고선지와 한(漢)의 반초(班超)를 꼽는다. 고선지는 중국의 서방세계를 압도하여 실크로드를 장악한 인물이다.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 패배함으로써 아랍에 포로가 된 제지공에 의해 제지술이 서방세계로 전파된 사실을 외국학자들은 문명사 차원에서 주목하고 있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고선지는 반군을 당나라 서울 장안에서 멀지 않은 퉁관(潼關) 앞에서 막았다. 그런 그는 황명을 어겼다는 죄목이 씌워져 환관이 데려 온 칼잡이에 의해 저항 없이 죽임을 당하고 만다.
◇ '고선지 루트 1만km'의 본격 연재가 필자 사정으로 지연되고 있습니다. 이른 시일 안에 연재가 재개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