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祖
임금
조선왕조 제16대 인조(仁祖, 1595~1649)는 이름이 종(倧),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이다.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 어머니는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1623년 서인들이 주동한 인조반정으로 보위에 올라 1649년 사망할 때 까지 조선을
통치했다.
국방태세를 튼튼히 한 光海君
인조의 전왕인 조선 제15대 광해군(光海君)은 1575년 선조(宣祖)와 공빈 김씨(恭嬪金氏)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황급히 북쪽으로의 파천을 논의하는 와중에서 4월 29일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로
지명했다.
광해군이 재위했던 시기(1608-1623)는 이른바 명ㆍ후금(뒤에 청이 됨) 교체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변혁기였다. 만주족의 누르하치(奴兒哈赤)는 1616년에 후금(後金)을 세웠는데 명(明)과 후금의 정면충돌이 다가올수록 조선의
입장은 난처했다. 그런 가운데 1618년에 후금이 명의 요충지인 만주의 무순(撫順)을 점령하자 명은 조선에 대해서
임진왜란 때 자신들이 조선에 베풀었다는 소위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워 2만 명의 원병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이에 광해군은 망해가는
명나라와 욱일승천하는 후금 간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실리외교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명은 원병을 보내라고 거듭 강요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천여 명의 군사를 파병하면서 출정하는 강홍립에게 그 유명한 관형향배(觀形向背)의 밀지(密旨)를
내렸다.
1619년 3월 4일 만주의 부차(富車)방면으로 진출한 조명 연합군은 후금의 대부대와 접전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명군은 거의
궤멸되었고 조선군도 패전하였다. 이에 강홍립은 후금군에게 항복하고 광해군의 뜻을 전했다. 그래서 광해군은 명과 후금
모두를 만족하게 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외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두고두고 음미해야 할 광해군의 뛰어난
외교술이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과 仁祖
1623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김 류, 이 귀 등을 비롯한 600여명의 반란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들 앞에는 광해군의 배다른 조카인 능양군(후에 인조)이 있었다. 이들은 다시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병력
700여 명과 합류한 후 창의문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들이닥쳤다. 곤히 잠들어 있던 광해군은 허겁지겁 창덕궁 북쪽 궁궐 담장을 넘어가
숨어 있다가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잡혀왔다. 그간 광해군에 한이 맺혀있던 인목대비는 참담한 몰골의 광해군을 꿇어
앉혀놓고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킨다.”는 교서를 반포함으로써 인조반정이 성공하였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교서에서 폐위 죄목으로 36개 항목을 적시하였다. 이 중에서 우리를 정말로 웃기는 것은
1618년에 광해군이 출정하는 강홍립 장군에게 관형향배의 밀지를 내려 미연에 조선에 대한 외침을 방지했던 사실을 들어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가장
큰 죄목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잘못된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과 정묘호란(丁卯胡亂)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인조와 서인정권은 불행하게도 전왕 광해군의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반인륜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시대흐름에
역행하는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높이 내걸었다. 이들은 국익에 백해무익한 친명사대를 한다면서 2차에 걸친 호란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조선역사에서 제일 잘못된 우를 범하였다.
이 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다. 이때 최명길의 강화(講和) 주장을 받아들여서 강화도 연미정에서 양국
간에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우리는 부끄러운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일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입에 담으면서도 실제 그보다 더
수치스러웠던 병자호란의 역사는 잘 거론하지 않고 있다. 인조반정 후 서인정권은 친명배금정책을 내걸었다가 정묘호란(1627년)을
당했으면서도 계속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명분론만 강조하고 있었다.
1636년 4월에 후금이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후 1627년 3월 정묘호란 때 조선과 맺은 ‘형제관계’에서 한 단계 더 높은
‘군신관계(君臣關係)’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 때 우리가 평소 오랑캐족이라고 얕보았던 만주족의 청나라가 아주 강경하게 나오자 조정에서는
이러한 청의 요구에 대한 수용여부를 두고 거듭 논란을 벌였다. 결국 조선이 친명배금정책에 의해 청의 요구를 거절하자 청은 1636년
12월 조선에 침입해 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치욕의 역사를 남긴, 그 유명한 병자호란이다.
12월 14일 인조가 강화로 피난하려고 궁을 나섰는데 한양입구인 홍제원(弘濟院) 일대가 청군의 선봉대에 의해 이미 차단되어
있었다. 강화로 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에 부득이 인조는 한양도성을 빠져나가 급히 얼어붙은 송파나루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뒤따라온 청군은 삼전도(三田渡)에 본진을 설치하고 남한산성을 3중 포위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이로써 인조와 대신들 그리고 조선군 장병들은 산성 내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기약 없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산성 밖에서는
청군의 만행에 불쌍한 백성들이 그대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심지어 산성 주변의 마을에서는 갓 시집을 온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청군에게 겁탈을 당하는 비극이 연출되었다. 청군은 만주족과 몽고족 그리고 한족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몽고족 출신들의 횡포가 제일
심했었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성내에서는 척화파와 주화파 간에 끝없는 입씨름을 계속하고 있었다. 51세의 이조판서
최명길은 아무런 대책 없이 명분만을 고집하다가 나라와 백성들을 다 죽이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주화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척화파들은 주화파 최명길의 목을 베겠다고 설치고 있었다. 그러나 적군의 중(重) 포위와 추위, 굶주림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1637년 1월 18일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신(臣)’을 칭하는 항복문서를 만들자 이를 곁에서 본 67세의 예조판서 김상헌은
항복문서를 찢어 버리고 통곡하면서 말했다.
“명망 있는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소?” 그러자 최명길은 웃으면서 찢어진 국서를 주워
맞추면서 말했다. “대감은 찢으나 나는 주워 맞추리다.”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에게 이른바 “정축(丁丑)의 하성(下城)”이라 일컬어지는 항복절차를
밟게 되었다.
청군 측의 요구에 따라 인조는 곤룡포 대신 청나라 군복인 남색 융복(戎服)을 입은 초라한 행색으로 삼전도(지금의 송파) 남쪽
언덕에 쌓은 9층 수항단(受降檀) 위에 폼 잡고 앉아있는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그러고 나서 인조는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려 “무례하게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줄 것”을 청하면서 저 오랑캐들을 임금으로 받들겠다는 항복문서를 바쳤다. 조선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장 치욕적인 장면이었다. 그것은 입만 가지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정신나간 조선 사대부들에게 돌아오는, 하늘이
준 당연한 업보였다.
이때 땅바닥에 엎드린 인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청나라의 현실적인 위협을 무시하고 아무 대책 없이 명분만을 내 건데
대한 반성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이러한 단군 이래 최대의 수모를 당하고도 그 후 13년 동안이나 임금으로서 백성들을
호령하다가 죽은 후 현재 우리나라 제일 명당자리에 누워있다.(금촌 장릉)
불쌍한 여인들, 그 이름 환향녀(還鄕女)
이로써 형식상으로는 병자호란이 끝났지만 또 하나의 절차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조선의 처녀들을 데리고 가는 일이었다. 청군은
20여만 명의 조선 처녀들을 강제로 그들의 수도인 심양으로 끌고 갔다. 여기서 큰 곤욕을 당한 이 처녀들이 후에 어렵게 귀국했을 때에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린 그녀들이 청나라에 붙잡혀 있을 동안 오랑캐인 청군들에게 정조를 상실했다 하여 가족, 친지들이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기피함으로써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을 보호해 주어야 할 조선의 남자들 중에서 죄 없이 끌려가 곤욕을 치른 이 젊은
여인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할복자살한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 죄 없는 여인들만 탓하고 있었으니 지독하게 못난 남자들이었다.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이 호란이 끝나자마자 청나라는 인조가 엎드렸던 삼전도 그 자리에 청 태종의 공덕(?)을 찬양하는 기념비를 우리 손으로 세울 것을
강요하면서 먼저 비문 내용과 비석 설계도를 청 황제에게 가져와서 결재받으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조선은 갖가지 구실을 붙여 이 비의 설립을 회피하려 했고 신하들은 침략자인 청 태종을 찬양하는 글을 짓는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으로 여겨 한결같이 비문 작성을 못하겠다고 버티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조는 청나라의 성화같은 독촉에 하는 수 없이 홍문관 부제학 이경석(李景奭)을 불러 청나라의 요구대로 비문을
지어 오도록 엄명하였고 이 비문이 청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이를 토대로 1639년 2월, 삼전도 나룻가에 높이 3.95m, 폭
1.4m의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일명 삼전도비)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비석은 패자인 조선에게는 자자손손 대대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치욕스런 유산이 되고 말았는데 그 후 이 비석은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청일전쟁 때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땅속에 매몰되었다가 1895년 다시 세워졌다. 치욕의 역사도 분명 역사인 것이므로 우리는 이
비석을 땅속에 파묻는 노력 대신에 잘 보존하고 관리해서 역사적 교훈을 전하기 위한 교육보조 재료로 삼는 노력이 더 절실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비석은 지금 사적(史蹟) 제101호로 지정되어 서울시 송파구 송파동 주택지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현절사(顯節祠)'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지점에 위치한 남한산성. 이 남한산성 안에 있는 현절사(顯節祠)는 병자호란(1636~1637)이 끝난
후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가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순절한 삼학사(三學士, 홍익한·윤집·오달제)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다. 이들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당해 고립무원의 비참한 상황인데도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조선이 항복한 후 청나라는 화친을 반대한 척화론자들을 잡아줄 것을 조선에 강력히 요구했다. 그래서 삼학사는 포박당한 채 청나라로
끌려갔다.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압송된 이들은 청 태종이 직접 문초할 때 그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들은 청 태종의 항복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그해 4월 19일 심양성의 외양문 밖에 마련된 형장으로 끌려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이때 홍익한은 51세, 윤집은 31세,
오달제는 29세였다.
한심한 임금 仁祖와 소현세자의 비극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에 9년 간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명분보다는 실용적인
학문과 과학기술의 도입을 시도했었다.
그는 탁월한 국제적 감각과 사상의 개방성을 가지고 그 당시 조선의 제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심양에서 새로운 현실에 눈을 뜨고 새롭게 나라를 바꾸기 위한 원대한 꿈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그는 아버지 인조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소현세자의 꿈이 좌절되고 만 것은 단순히 한 세자의 꿈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한 나라의 꿈이 좌절된
것이었다. 역사에서는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 그렇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못난 임금 인조의 대통을 이었더라면 우리나라가 훨씬 일찍이
나라의 근대화와 기술입국의 단계에 들어설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가 주는 교훈
우리에게는 과거 많은 ‘실패한 역사의 기록들’이 있다.
이 기록들은 주변강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가 앞으로 주변 정세변동에 어떻게 편승해야 하는 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약소국으로서 주변에 있는 강대국들 속에서 어렵게 생존을 영위해 나가야만 하는 처지에 있다. 이런 우리에게
‘명분론’은 결코 합당치 않는 주장이라는 것은 과거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다.
훌륭한 임금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한심한 임금 인조는 그 자신 재위기간 중 3회에 걸쳐 수도 한양을 비우고
도망을 다녔다. 그리고 시대에 역행하는 명분론으로 외침을 불러들였다. 이러한 인조의 외교정책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주변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국력의 뒷받침 없는, 허울 좋은 명분(예컨데 친명사대)만 가지고는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시대에 역행하는 “민족자존(民族自尊) 운운”하는 명분론과 말도 되지 않는 “민족공조 운운”하는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여
입만 벌리면 친북 반미주장을 하고 있는, 동국대 강정구 교수 같은 일부 교수들과 친북좌경 세력들 그리고 일부 젊은이들이 심각하게 연구해야 할
과제가 있다. 그것은 조선시대 못난 임금 인조가 허황된 명분론에 입각한 엉터리 외교정책으로 엉뚱한 외침을 불러들여서 나라와 백성들을
외적의 침략 앞에 무방비로 놓이게 했던 사실에 대해 공부하고 이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만 한다는 것이다.(konas)
김 지욱(성우회 정책연구실장, jeewoog@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