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세계문화유산답사기(1)에스코리알궁전

鶴山 徐 仁 2005. 10. 28. 21:46
이 름   조갑제 날 짜   2005년 10월 28일 금요일
세계문화유산답사기(1)에스코리알궁전
스페인의 혼이 서린 에스코리알궁전

16세기의 서양사를 대표하는 인물은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필립2세이다. 필립 2세는 아버지 칼1세로부터 상속받은 스페인, 네덜란드, 부르고뉴, 나폴리, 밀라노, 아메리카 식민지에다가 1581년엔 포르투갈까지 병합한다. 필립 2세는 신교도와 오토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카톨릭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그는 검소하고 경건하며 신실한 신도였다. 카톨릭 세계의 수호자인 그의 관심은 유럽 각국에서 봉기하는 신교도 세력을 진압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는 아메리카 식민지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富(부)를 전쟁에 썼다.
처음에는 필립 2세가 유럽의 주도권을 쥐는 듯했다. 1557년 그는 프랑스 군대를 센트 퀜틴에서 대패시켰고 이를 기념하여 마드리드 근교에 에스코리알이라 불리는 거대한 궁전 겸 교회당 겸 가족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수도를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옮겼다. 1571년 필립 2세는 베니스 및 교황청과 연합함대를 만들어 지중해를 위협하는 오토만 투르크의 함대를 레판토 해전에서 격멸시켰다.
필립 2세는 네덜란드에서 신교도들이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2만 군대를 보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는 포르투갈을 병합하여 신대륙의 식민지를 獨食했다.
1588년 필립2세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사주한 영국을 치기 위하여 무적함대를 보냈으나 영국해군에 의해 전멸하고 만다. 네덜란드의 신교도들도 영국의 도움을 받아 결국은 스페인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고 영국의 카톨릭 세력은 엘리자베스 1세의 탄압을 받아 약화된다. 國富를 전쟁에 때려넣어 국가를 파산상태로 몰고간 필립2세는 에스코리알 궁전에서 1598년 71세에 죽었다. 그는 스페인의 전성기를 만들었으나 쇠퇴기를 열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서 지금부터 필립 2세의 숨결이 남아 있는 에스코리알 궁전을 탐험해보자. 마드리드에서 약30km 떨어진 山中에 있는 이 화강암 궁전은 화려한 맛보다는 필립 2세의 성격을 반영하여 장중하고 엄격하다.
이 건물은 1563년부터 1584년까지 21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건축양식이 단순하다. 1200개의 문과 2600개의 창을 가진 이 건물은 206X161m의 크기이다. 교회당의 돔은 높이가 91m이다. 궁전, 교회당, 가족무덤, 도서관의 용도를 가진 복합건물이다. 필립 2세는 이 도서관에 책 1만권을 소장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근엄하기 이를 데 없어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마드리드에 있는 스페인(부르봉 왕조) 왕궁의 호화스러움과 대비된다. 에스코리알의 장중함은 필립2세를 배출한 독일계통 합스부르그 왕조의 고유 분위기이기도 하다.
에스코리알 궁전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이지만 한국인 관광객들은 잘 가지 않는다.

이 궁전의 필립 2세 집무실은 뜻밖에 작고 검소했다. 그가 썼던 중국제 접는 의자는 아무 장식이 없이 딱딱하다. 침실은 예배당 바로 옆에 붙어 있어 일하다가도 언제든지 예배를 올리기 위하여 들릴 수 있게 설계했다. 그는 통풍으로 죽어가면서도 이 방 침대에 누워 교회의 성찬대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필립 2세는 카톨릭의 개혁을 주도했던 제수이스트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보니 그 자신도 금욕적 생활을 보낸 것이 아닌가 느껴졌다. 19세기 스페인 철학자 미구엘 우나무노는 "무슬림 신도들이 메카를 순례하듯이 스페인 사람들은 에스코리알을 찾아가야 스페인의 혼을 느낄 수 있다"고 썼다. 이 건물의 내부도 군대 사령부처럼 엄숙하여 구경꾼들의 마음을 짓누른다. 구경을 끝낸 뒤 건물 바깥으로 나오면 해방감을 느낄 정도이다.
스페인은 미국을 제외하면 외국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오는 나라이다. 관광수입도 연간 약400억 달러이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수도 38개(2004년 기준)로 가장 많다. 에스코리알 같은 장엄한 독일적 건물이 있는가 하면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처럼 동양적인 이슬람 문명의 정수가 있고 스페인 왕궁처럼 화려한 라틴문명의 숨결도 느낀다. 동서양의 혼재, 서양적인 것중에서도 라틴적인 것과 게르만적인 것의 혼합, 현대적인 것과 중세적인 것의 공존이 스페인의 매력이다. 스페인을 여행하고 나면 뇌리에 찍힌 殘影(잔영)이 아주 오래 간다.

에스코리알에서 약15분 거리에는 '죽은 자의 계곡'으로 불리는 동굴 무덤이 있다. 스페인 내전 때 죽은 4만 명의 양측 시신을 묻었다. 동굴을 262m 파고 들어가서 만든 추모회랑 끝에는 철권 통치자 프랑코의 무덤이 있다. 프랑코는 뭇솔리니와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스탈린의 지원을 받던 공화파를 무너뜨리고 스페인을 재통합했다. 헤밍웨이 같은 1930년대의 서구 지식인들이 공화파를 지지하는 바람에 프랑코의 이미지는 매우 나쁘지만 적지 않는 스페인 사람들로부터는 존경을 받는 편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도 그의 무덤 위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 동굴무덤이 파인 岩山 위에는 시멘트로 만든 높이 125m, 너비 46m의 돌 십자가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스페인의 문화재는 일단 스케일이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