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경남 진주.... 진주성과 촉석루

鶴山 徐 仁 2005. 10. 29. 11:28
경남 진주.... 진주성과 촉석루
  2005
김신묵  

진주(晋州)는
우리나라 도시중 가장 아름다운 '江의 도시'다.
남가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숨 막히도록 인상적인 풍광이다.
이름도 진기한 새벼리 절벽을 돌아들어
굽이굽이 남가람을 따라 도시로 들어가면
뒤벼리 절벽이 다가서고
진주성의 성벽과 절벽이 강을 따라 펼쳐진다.
짙푸른 남가람과 푸르른 진주성의 녹음위로
촉석루가 사뿐히 내려앉아 있는 듯 싶다.


                    - 김진애 '우리도시 예찬'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진주하면
진주라 천리길이라는 싯귀와 노랫말이 생각난다.
그렇다
진주는 서울에서 천리길이며
부산이나 광주, 목포 같은 곳 가기에 쉽지도 않은 곳 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전-통영고속도로가 진주까지 연결되어서 (진주-통영간은 공사중)
서울에서도 편하게 다녀올수가 있어 한번 나들이에 나섰다.

 

임진왜란 3대첩중 하나인 진주대첩...진주목사 김시민~
임진년(1592년)에는 3만여 왜군을 물리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듬해인 계사년(1593년)에는 10만여명의 왜군이 침입하여 7만여 민, 관, 군이 순절한 곳...

그때에 왜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

이러한 역사적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주는 늘 내 머릿속에 맴도는 고장이었다.

 

위의 김진애 글처럼
진주에 도착하여 진주성 푯말을 찾아 시내로 들어서니
이름도 생경한 절벽이 나온다.
남강을 왼쪽에 두고 길을 가다가 오른쪽에 깎아올린 절벽이 뒤벼리이다...
지도를 찾아보니 새벼리는 강건너 시가지 초입에 위치해있다.


아무튼 뒤벼리를 지나면서 바로 좌회전하여 남강을 따라 나아가니
설명하지 않아도 진주성임을 알겠다.

 

진주 8경을 찾아보니
촉석루가 제 1경이요, 남강 의암이 제 2경이니 진주성안에 있음이요
뒤벼리가 제 3경이요, 새벼리가 제 4경이니 진주 들어설때 잘보면 만날수 있다.
기타 망진산 봉수대가 제 5경이요, 비봉산의 봄이 제 6경, 월아산 해돋이가 제 7경, 진양호 노을이 제 8경이니
한번 나들이에 진주 8경중 1, 2, 3, 4경을 한번에 돌아볼 수 있었다.

 

 

진주성 앞마당 주차장은 다소 협소해보였지만
그래도 주차된 차가 많지 않아서 주차를 할 수 있었으며
표를 사서 진주성으로 들어서니 진주성문은 촉석문이요 커다란 누각이 촉석루이다.

 

<진주성의 성문인 촉석문>

 

<성문에서 이어지는 성곽의 외벽....>

 

<진주성 성곽을 이리저리 담아보았다.....>

 

 

<성곽과 어울리는 촉석루 실루엩....>

 

<진주성의 門...촉석문을 들어서면서 바라본 촉석루>

 

<촉석루를 다른각도에서 바라본 모습>

 

<촉석루 단청>

 

 

 

촉석루(矗石樓)...  서울의 경복궁 경회루를 닮은 커다란 누각이다.
남강가 바위 벼랑위에 장엄하게 높이 솟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남원 광한루)와 함께 3대누각으로 손꼽혀 왔으며

고려 고종 28년 (1241)에 창건하여 8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南將臺)로서 장원루라고도 했다.

전시에는 장수가 군대를 지휘하였으며, 평화시에는 주민이 모여 놀고 즐기던 곳이며 향시를 치루는 고사장으로도 쓰였다.
원래는 국보 276호였으나, 6.25때 전란속에 불타버린후 복원된 건물이기에 지금은 문화재자료 8호이다.

 

촉석루에 올라가 남강을 바라보는 풍광도 참 좋았지만
사실은 강 건너편에서 남강의 흐르는 물과 강변의 의암, 그 위에 솟아오른 촉석루를 조망하는것이 더 기가 막힐듯 하였고

특히나 야간조명이 밝혀진 상태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더 좋을듯 하였다. (야간 조명 훌륭함)

 

<촉석루 난간에서 바라본 남강의 경치들....>

 

<다리의 모습이 물에 비친 그림까지 합쳐져 멋있다...>

 

<상류 댐쪽으로 바라다보니, 진주성 밖에 있는 강변 산책로가 멋들어져 보인다>

 

 

촉석루에 올라 남강과 주변경치를 올라보고 다시 내려오니
강변으로 내려갈수 있게 촉석루 아래 담장에 쪽문이 열려 있었고
그리로 내려서니 가파른 절벽아래 남강이 흘러가고 있었으며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했다는 의암이 거기 있었다.

 

원래는 위험한 바위라서 위암(危巖)이라고 불리웠으나
논개투신 이후 의암(義巖)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


진주시민들 사이에는 이 의암이 움직여 벼랑에 닿으면 국가에 전쟁이 난다는 얘기가 있다.
거기에는 1629년 정대륭이 새겼다는 의암(義巖)이라는 글씨가 있고
기타 강변 바위벽에는 이런저런 속인들이 자기이름을 새긴 글씨가 난분분(?)하다...

 

의암에는 위험하니 올라가지 말라는 푯말이 있으나
한걸음 건너 뛰면 올라가볼수 있다.

 

<의암... 따로 떨어져 보이는 작은 바위가 義巖이다.....>

 

<의암에서 올려다본 촉석루.....바위에 새긴 글씨들이 보기에 좀 그렇다~~>

 

 

<의암에서 올려다 본 성곽모습...>

 

 

진주성의 핵심은 바로 이 촉석루와 의암이며
그밖에 촉석루 바로 뒤에는 의기사(義妓祠)라 이름지어진 논개의 사당이 있고

논개의 영정이 걸려 있었는데 친일파가 그린 그림이라하여 떼어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듯 하다.
나머지 공간에는 국립진주박물관과 임진대첩및 김시민장군을 기리는 이런저런 설치물들이 있다.

 

<의기사(義妓祠)....논개를 모신 사당으로 촉석루 바로 옆에 있다....>

 

 

그리고 진주성 아래 남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멀지않은 곳에 남강댐이 있고
그 댐이 물을 가두어놓은곳이 바로 진양호이다.
진양호 주변도 호반의 아름다움과 함께 갖가지 위락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기타 진주는 소싸움이 유명하다.

 

밖으로 나오니

성문 밖에는 변영로님의 '논개'가 적힌 시비가 서있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위에
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논개)

 


<팁 1>
논개(論介)....전북 장수 출생, 姓은 주(朱)씨라고 하며
왜군의 2차 침략으로 진주성이 함락된 후 촉석루에서의 승전잔치에 참석하여
적장인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의암바위에서 남강에 투신.
원래 장수현감(진주병사?) 최경회의 측실(첩)이라고 전해져 오며 그의 묘역에 묻혀있다.
지금도 장수 사람들은 논개를 기생이라고 부르지 않고‘주논개부인’으로 부르고 있다 한다.


<팁 2>
의암별제....논개 순국 후 진주사람들은 그녀의 충절을 기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민과 관이 혼연일체가 된 것이다.

‘관기’에게 민과 관에서 함께 제를 올리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이래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1740년 조정의 명으로 의기사가 건립되자 진주 사람들은 논개를 위해 제사를 지냈다.

경상우병영에서는 제례에 필요한 모든 제수품을 보조하였다.
그 뒤 1868년(고종 5년) 당시 진주목사 정현석은 경상우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의기사를 다시 중건한 뒤,

춘추로 두 번 지내던 제사와 별도로 매년 6월중 좋은 날을 택하여 논개에 대한 제향을 실시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의암별제이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제례와 가무로서 의암별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진주목사 정현석은 당시 부패한 탐관오리와는 전혀 달랐다.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지방관이었다.

그는 당시 다른 수령들과는 달리 기생의 문화에 대한 애정 어린 생각과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국악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판소리와 가무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이때 시작된 의암별제는 매년 6월 중에 좋은 날을 정해 지냈다.


그가 지은 ‘교방가요’중의 의암별제 가무조를 보면 의암별제는 3백명의 기녀가 가무를 곁들여 연 3일동안 제를 치르는

화려하고도 격조 높은 대제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감격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무진년 6월에 단을 만들어 향불을 피워 3백명의 기녀들이 정성으로 제를 올리니 논낭자의 충의의 영혼이 내려오는 듯 하구나.”


의암별제는 모두 기생들로만 진행되었다. 악사를 제외하고는 제관과 연희자가 모두 여자들이었다.

초헌관을 비롯해 아헌관과 종헌관은 신망있는 늙은 기생중에서 뽑고 당상과 당하의 집례는 글을 아는 기생을 선임했다.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이 상실되면서 의암별제의 맥이 끊어졌다.

진주 기생들은 교방의 전통을 이어 진주권번 또는 진주기생조합을 만들어 의암별제를 전승하고자 했으나 이어갈 수 없었다.

당시 기생들은 조선말 의암별제에서 가무를 했던 늙은기생들의 뜻을 받들어 향불이라도 피우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의암별제는 결국 일제 때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1992년 의암별제가 복원되어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하며, 지난해인 2004년에는 137주년 의암별제가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열린
제3회 진주논개제의 서막으로 13일에 열린후 음복행사로 1,000인 비빔밥 비비기 행사후 이를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팁 3>
논개의 출생, 그의 신분, 최경회와의 관계, 그의 무덤....등등에 대하여 아직도 많은 논란과 주장이 있다 함...
(자세한 내용은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