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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카리스마, ‘神이 부여한 권능’의 이승만

鶴山 徐 仁 2005. 10. 29. 20:01
카리스마, ‘神이 부여한 권능’의 이승만
근대화, 이승만의 업적 위에서 가능   
22일 신반포중앙교회에서는 한국근현대사 연구의 대가인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를 초빙해 이승만 박사의 건국에 대한 강연과 토론이 진행됐다. 아래는 이날 강연요지이다.

이승만 폄하는 ‘연구부족’탓...국내 근현대사 연구 부족으로 외국학설이 석권
로버트 올리버의 책을 들고 설명하고 있는 유영익 교수

이승만에 대한 폄하(貶下)는 근본적으로 ‘연구부족’에 기인한다. 한국근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다보니 외국 학설이 학계를 석권했다. 브루스 커밍스 류(類)의 수정주의 사관이 그것이다.

이 같은 외국 학설들은 원숙한 안목으로 이루어진 연구업적이 아니다. 외국인이 젊은 나이에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도출한 결론들이 대부분이다.

이승만 비판을 위해 가장 많이 원용되는 자료인 리처드 알렌(Richard Allen)의 이승만 전기를 예로 들어보자. 리처드 알렌(본명: John M. Taylor)은 6․25전쟁 중 ‘이승만 제거계획’을 작성했던 미8군 사령관 테일러(Maxwell Tayor) 장군의 아들로서 이 책을 쓸 때 30세였다.

미국의 정보*외교 관련부서에서 근무했던 그는 한국에 약 2년간 머물면서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이 책을 썼다. 특히 이 책은 4`19 직후에 나온 것으로서 이승만 하야에 개입했던 미국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출판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한국 사람들은 20여 권의 책을 쓴 ‘제대로 된’ 미국인 학자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의 이승만 전기를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 이승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놓았다는 게 그 이유이다.

역사라는 것은 지나간 사람과 사건에 대해 엄정하게 심판하는 것이다. 한국역사를 보는 안목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미국사람들의 책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학문적 사대주의’이다. 우리 스스로 애정을 가지고 우리의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이승만 박사

한미동맹 후 평화 정착과 경제성장 기반
  
이승만은 1인당 GNP 50달러, 문맹률 80%에 달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중국만 해도 20여 년간의 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했는데 한국은 3년 만에 이를 이뤄냈다.

이승만이 해낸 업적을 개괄해보자.

이승만은 우선 건국의 주역이었다. 헌법 제정 당시 그는 한민당 세력을 대변하던 유진오의 초안(草案)에 불만을 품고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바꿔놓았다. 이것은 ‘정권욕’때문이 아니라 오랜 신념의 결과였다. 새로운 나라에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며 내각책임제가 되면 조선조의 당쟁이 재현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승만은 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냈다. “안 해 주겠다.”는 미국의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져 간신히 얻어낸 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조약 체결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는 전쟁이 사라졌다. 19세기 말~20세기 초 14년에 한번씩 일어났던 전쟁이 60년 이상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민족생성 이래 가장 큰 경제발전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외교적 바탕위에 가능한 것이었다.

5만 군사, 70만 강군(强軍)으로

군사적으로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건국 초 5만 명 수준에서 이승만 집권 말기에 70만 명으로 증강됐다.

이승만은 미국에 거듭 군사원조를 요구해서 건국 당시 5만의 군대를 갖췄고, 6․25사변 당시 이를 10만으로, 종전 후에는 70만으로 증강시켰다. 조선조가 망할 때 상비군이 겨우 8,500명이었다. 명성황후 시해도 못 막아내던 우리 민족이 역사상 최초로 군사강국 대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80%의 문맹률 10% 이하로 떨어져

교육 측면에서는 더 큰 업적을 이뤄냈다. 6년의 의무교육제를 도입해 80%의 문맹률을 하야 당시 10% 이하로 떨어뜨렸다. 국민의 90%가 문자 해독(解讀)력을 갖게 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의 비율은 영국을 앞질렀다. 60년 이후 경제기적은 이승만 시절 양성된 고급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경제 측면에서 ‘농지개혁’을 통해 자작농을 만들어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이성계의 과전법 이후 최초였다. 농지개혁을 6․25전쟁 이전에 단행함으로써 남한의 농민들이 북한 인민군에 편들지 않게 됐다.  

이승만의 집권을 통해 한국은 기독교국가가 됐다. 1885년 아펜젤러가 한국에 와서 개신교 선교를 시작했는데 1900년대까지 양반계층 중 개종한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 중인이나 상민․천민들이었다. 양반출신으로서 ‘거의 최초’의 기독교인이었던 이승만은 젊은 시절부터 한국을 기독교국가로 만들겠다는 꿈을 키운 사람이었다. 1919년 3․1운동 후 그는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이 된 후 이승만은 청년시절의 비전을 실현해간다. 12년간 기독교를 음`양으로 지원했고 이러한 후원을 배경으로 한국교회는 1950년대에 급성장했으며 1960년대 이후 지속적 성장을 한 것이다.

미국을 모델로 하는 건국의 꿈은 미국의 제도가 지상에 어떤 나라보다 우수하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일본, 중국, 러시아의 압박을 받지 않는 부강하고 당당한 나라가 되려면 미국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흔히 이승만이 한국을 미국에 예속시켰다고 하는 주장은 ‘세계체제론’을 맹신하는 이들의 얕은 생각에 불과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이 이뤄 낸 기반 위에서 모든 것을 이뤄냈다. 더 어려운 기초 작업은 이승만이 해낸 것이다.  

北공산화 이후 ‘정읍 발언’

이승만의 건국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흔히 46년 6월 3일 정읍발언에서 나온‘남한 單政論’에 근거해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 비난한다. 그러나 이미 45년 9월 20일 소련의 스탈린은 북조선에 ‘親蘇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려 북한을 위성국으로 만드는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에 따라 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실질적 단독정부가 들어섰고 그 이름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토지개혁’이란 보통 정부가 갖는 것 이상의 막강한 권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승만은 북한의 공산화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소(美蘇)공동위원회에서 통일된 독립정부를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성과 없이 무기 휴회되자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보았다. 단독정부 발언은 그렇게 나온 것이다.  

‘인공’은 대표성 없는 박헌영派의 조직

브루스 커밍스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관련 하에 미군정이 해방직후 서울에 선포된 인민공화국(人共)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비난한다. 그러나 ‘인공’은 좌익인 박헌영 계 사람들이 서울 경기여고 자리에서 하루 동안 회의를 거쳐 선포한 조직이다. 모인 사람들의 대표성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절차도 무시됐다. 커밍스는 이러한 ‘인공’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해방 전 이승만은 미국정부에 ‘골칫거리’였다. 미국은 국무성에 찾아가 항상 임정승인을 요구하는 이승만을 껄끄러워했다.

실제 미국은 47년까지 이승만 대신 여운형과 김규식을 지원했다. 조종하기 쉬운 사람을 선호했던 것이다. 미국이 이승만 지지로 선회한 것은 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으로 대소봉쇄정책이 확정되고, 같은 해 5월 8일에 열린 미소공위가 또 다시 유산된 이후였다. 미국이 확실하게 반공(反共)노선을 채택하면서 한반도에서도 꾸준히 반공(反共)주의 입장에 섰던 이승만을 밀게 된 것이다.

경찰, 군대 친일파 등용은 여순 반란 탓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은 근본적으로 인재부족 때문이었다. 나치 치하 프랑스의 비시정권에서는 고급인력이 30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통치 이후 한국의 교육받은 인력은 3천여 명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親獨派 5만을 숙청해도 상관없었지만 한국은 달랐다. 당장 외무장관을 시키려고 해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일주의자였던 이승만은 초대 내각을 만들 때 단 한명의 친일파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경찰에 친일파가 많이 남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여수순천반란사건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세워진지 2개월 만에 남로당 지령에 따라 여순반란이 일어났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앞에서 좌익들을 소탕하기 위해 ‘반공법’이 제정됐고 같은 이유로 일제시대 공산당을 잡던 전문가들이 다시 경찰에 등용된 것이다.

UN통해 명예로운 건국

이승만의 건국은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명예로웠다. 새로운 왕조나 독립국가의 탄생은 대개 내전을 거쳐 달성된다. 그러나 이승만은 UN을 통해 대한민국을 만들어냈다. 이는 이승만이 처음으로 고안한 것이다.‘미국의 괴뢰국가가 되서는 안 된다’는 판단 아래 이승만은 미국에서 로비를 벌여 세계기구인 유엔의 축복 속에서 건국을 이뤄냈다.

95.5%의 투표율을 보인 총선거(제헌국회선거)는 남로당과 남북협상파의 방해 내지 비협조 속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과였다. 이 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이승만은 196표 가운데 180표로 대통령에 선출됐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을 뿐 아니라 세계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명예로웠던 대한민국의 탄생이었다.  

카리스마란 ‘神이 부여한 권능’ 혹은 그러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이승만은 카리스마였다.

이승만은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김구, 김규식, 여운형, 박헌영 등 군웅(群雄) 가운데 가장 탁월했던 인물이다.‘카리스마’란 모세와 같이 초인적인 권능을 가진 인물을 가리킨다.

‘카리스마’는 역사에 돌연 나타나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낸다. 개인적 욕심 때문이 아니라 신이 내린 명령이라는 소명의식으로 그 같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한국사에 나타난 이승만 역시 그와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로 볼 수 있다.

정리 김성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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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욱기자  2005-10-28 오후 5: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