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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통영해저터널

鶴山 徐 仁 2005. 10. 30. 02:19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14) 통영해저터널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경남 통영 시내를 호젓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충무교를 빼놓을 수 없다. 1967년 세워진 이 다리는 통영시 당동과 미륵도를 잇는 운하대교. 그 아래 평화롭게 흘러가는 바닷물과 한가롭게 지나는 고깃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서정적인 감흥에 젖어들기 십상이다. 음악가 윤이상,소설가 박경리,시인 유치환,화가 전혁림 등 숱한 예술가들이 배출된 것도 통영의 아름다운 풍경 덕분이 아닐까.

충무교를 잇는 양쪽의 교각 옆으로 슬레이트 지붕의 해저터널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1927년 일제에 의해 착공돼 5년만에 건설된 동양 최초의 바다 밑 도로다. ‘용문달양’(龍門達陽). ‘용궁의 문으로 들어가면 빛고을 산양(山陽)에 이른다’는 내용의 현판이 걸려 있다. 시공 당시 통영군수였던 야마구치 아키라의 필적이라고 한다. 길이 483m,폭 5m,높이 3.5m의 터널 안으로 들어서니 아닌게 아니라 마치 용의 목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양쪽 벽에는 ㄷ자형의 기둥이 3m 간격으로 등골처럼 드리워져 음습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6m마다 설치된 조명등이 그나마 안도의 빛으로 다가온다. 해저터널이라고 해서 해양 수족관처럼 바다 속 풍경을 상상했다면 오산이다. 하지만 희비가 교차하는 해저터널의 역사를 알고나면 그리 실망한 것도 없을 터. 500년 넘게 전해져오는 통영 민담 등을 근거로 이곳에서 왜군 수천명을 물리쳤다는 이순신 장군의 호령을 떠올려본다.

1592년 7월 왜군은 거제와 통영을 거점으로 삼아 해상을 장악하려는 작전에 돌입한다. 이에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은 한산도 견내량으로 왜군을 몰아넣어 그 유명한 학익진으로 물리친다. 패한 왜군들은 지금의 해저터널이 있는 곳으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통영에서 고성으로 나아가는 이곳은 밀물때면 바다가 되고 썰물때는 육지가 되는 요새. 마침 썰물이었다. 왜군들은 급한 나머지 땅을 파느라 혈안이었으나 결국에는 전멸했다.

일제강점기의 야마구치 통영군수는 이를 기리기 위해 해저터널 공사에 착수했다. 장렬하게 전사한 일본군의 영령 위로 사람들이 다닐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해저터널 공사는 양쪽 바닷물을 막는 물막이 공사를 먼저 하고 노출된 해저면을 다지는 바닥굴착 공사로 이어졌다. 그 다음 철근콘크리트로 터널을 만들고 토사로 되메우기를 한 결과 터널과 운하가 동시에 생겨났다. 당시 기술로는 쉽지않은 대역사였다.

1932년 11월 20일 개통과 함께 ‘통영 태합굴(太閤堀) 해저도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태합(太閤)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존칭. 그러나 통영 사람들은 왜군들이 스스로 무덤을 판 곳이라 해서 ‘판데굴’ ‘착량굴’ 등으로 부르다 해방 이후에는 ‘해저터널’이라 명명했다. 건설 당시 강제동원된 김동수(88·통영시 정량동)씨는 “일본이 뭐라하든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승전을 생각하며 공사에 임했다”고 전한다.

그런데,문화재청은 한달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예고하면서 ‘통영태합굴해저도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래의 명칭을 따르도록 돼 있다는 규정을 지키다보니 생긴 오류다. 그러나 통영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치자 문화재위원회는 ‘통영해저터널’로 명칭변경을 결정했다. 비록 일제가 남긴 건축물이긴 하나 지역주민의 애환과 역사적 자긍심이 깃든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문화재 당국의 인식부족이 아쉬운 대목이라 하겠다.

개통 이후 해저터널의 하루 통행량은 5000여명,연간 180여만명. 우마차는 물론이고 자전거와 차량까지 이곳을 지나다녔다. 그러나 40년 세월에 시설이 노후되면서 천장에서 벽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는 바람에 해저터널 위로 충무교를 가설한 뒤 차량 통행은 금지하고 보행자 통행만 가능토록 했다. 이후 미륵도의 상수공급을 목적으로 바닥 양쪽에 폭 1m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터널의 폭은 당초 7m에서 5m로 축소되고 말았다.

해저터널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철근콘크리트조의 터널 본체는 물론이고 양측 출입구 부분의 목조트러스 덮개부분도 건설 당시에 버금가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해저터널의 중간쯤에 이르면 건축공사 당시의 사진이 아크릴판에 전시돼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통영 주민들 사이에서 ‘판데굴’로 불리게 된 내력이나 한산대첩과의 연관성 등 역사적인 설명이 없다는 점이다.

해저터널을 빠져나와 충무공의 혼을 기리는 ‘착량묘’(경남기념물 제13호)를 둘러보고 다시 충무교에서 아래를 굽어본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500년전의 함성을 상상해본다. “죽기로 싸우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는 이순신 장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그리고 70년전 터널공사를 독촉하며 일삼던 일제의 채찍질.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통영 해저터널은 승리와 패배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통영=이광형기자 ghlee@kmib.co.kr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14) 통영 근대건축 명소 3곳


통영 서호시장에서 해저터널로 넘어가는 도천동 초입에는 ‘윤이상 페스티벌 하우스’가 있다.1943년 지어진 건물로 1995년까지 통영시 청사로 줄곧 사용됐다. 철근콘크리트와 적벽돌로 쌓은 이 건물은 제국주의 양식에서 합리적 근대주의 양식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근대문화유산의 가치가 인정됐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기 위해 현관 로비와 1층에 공연장을 설치하는 등 건물 외관을 그대로 두면서 지역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좋은 사례다.

반대편으로 해저터널을 빠져나가면 문화동의 ‘통영청년단회관’을 만날 수 있다. 일제 때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던 통영청년단의 사무실로 사용된 지상 2층(120평) 규모의 건물이다. 주민들이 기금을 모으고 독지가 이영재가 대지를 내놓아 1923년 11월 18일 낙성식을 가졌으나 일제탄압으로 준공검사를 받지 못하고 청년학원으로 사용됐다. 통영청년단은 이곳에서 수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고 조선물산 장려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이같은 계몽 교육을 통해 수많은 통영의 인재들이 배출됐다.

같은 지역에 있는 ‘문화배수지’는 1933년 축조된 근대 공업시설물로 역사적 자료의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출입구에는 ‘천록영창(天祿永昌)’이라는 화강석 현판이 있었으나 2004년 통영 시민단체의 극일 행사로 글귀를 시멘트로 삭제시켰다. ‘천록영창’은 ‘하늘로부터 받는 복록이 길이 창대하고 영원하리라’는 뜻으로 배수지에서 일반가정으로 나가는 물의 의미를 상징하는 축원문. 그러나 일제가 통영의 정기를 억제하려고 지은 건물이라는 이유로 시민들이 근대문화유산 등록을 거부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통영=이광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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