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대구 조양회관

鶴山 徐 仁 2005. 10. 30. 02:21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10) 대구 독립계몽운동 산실 조양회관


“‘조선의 빛이 되어라’는 뜻에서 ‘조양(朝陽)회관’이라는 이름을 올립니다.”

1922년 10월 30일. 늦가을 식민지의 땅 대구 달성공원 앞엔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중국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다 고향으로 내려와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던 독립운동가 서상일(1887∼1962)이 역사적인 건축물에 마지막 기왓장을 올린 날이었다.

3·1운동이후 일본의 문화정치에 맞서 우리 청년들의 계몽과 민족사상 고취를 위해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이 뜻을 모아 달성공원 앞에 서양식교육회관을 건립한 것이다.

조양회관 건축비는 대구구락부회원 각자 일정액씩 부담하기로 하고 부지는 현재 달성공원 입구(구 원화여고)에 있던 서상일의 땅 500여 평으로 확정했다. 대구 경북지역에선 가장 규모가 큰 공사였다. 조선총독부는 반신반의 했다. 당시 4만3080원 50전이 들어간 대역사였다.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해 4월에 시작한 공사는 7개월만에 완공했다.

그 날로부터 83년.달성공원에서 자리를 옮겼지만 모양은 그대로다. 대구의 동쪽 관문에 자리 잡은 효목동 망우공원 언덕배기에 우뚝 솟아 있는 조양회관 정문 왼편엔 서상일의 동상이 서있고, 회관에는 체험학습 나온 아이들로 분주했다.

이날 회관에서 신성구(83) 광복회원은 “붉은 벽돌조 2층 건물은 순수한 민족자본과 기술로 지었으며 일본인도 부러워할 정도였다”며 “이 곳에서 대구의 민족지도자들이 민중과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민족계몽운동과 신교육운동을 펼친 유서깊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대구경북 항일운동 사료전시실에는 ‘3·1운동 당시 대구시지역 주모자들에 대한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등 문서자료와 ‘애국지사 김태련이 대구형무소 복역중(1919) 쓰던 밥그릇’ 등 유품,일제시대 애두역·대구경찰서·안동형무소·항일운동가들의 사진 등 400여점의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1000여명을 수용할수 있는 2층 대강당에는 사방을 둘러싼 애국열사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당시 강당에서는 각 부문의 전문가들을 불러 시국강연,국산품 애용,상공업진흥 등에 대한 강연회를 자주 열었는다. 초청된 연사는 최남선,윤백남 등이었으며 강연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 강당이 좁을 정도였다.

밤이면 각종 청년단체에서 주재한 야학이 열려 향학의 열기가 뜨거웠으며 우국충정에 불타는 청년들이 밤낮없이 모여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 들면서 조양회관은 직영하던 오락실 사진실,인쇄시설도 남에게 임대하고 도서실과 대강당을 통한 사회계몽활동에만 주력했다. 1940년대엔 일제의 미녹성말살 정책으로 건물 전체의 기능은 물론 동아일보 폐간에 따른 동아일보 지사의 폐업을 마지막으로 정지되고 말았다.

그후 일본군대가 주둔하며 보급부대로 쓰던 조양회관은 해방후 서상일의 청치참여(제헌국회의원)로 한민당사무실,6·25때는 유격대병영,1955년 원화여중고 설립에 따라 교무실과 도서관으로 사용돼오다 1980년에 건설업체인 월성산업에 학교가 팔리면서 한때 존·폐 위기를 맞기도 했다. 월성건설측은 조양회관을 헐고 그 자리에 사옥을 신축할 계획이었으나 건물의 보존을 원하는 광복회와 시민들의 여론을 받아들여 대구시가 1억 7천700만원으로 매입,1983년 8월 효목동 망우 공원 내에 이전·복원했다.1987년 3·1절부터는 광복회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2002년 2월 28일부터 등록문화재 제4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광복회 대구·경북 연합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후손 이대희(67)씨는 선친에게 들었다며 조양회관 건립에 관한 일화를 들려줬다.

“조선총독부도 결국 서상일의 고집을 꺾지 못한 거죠. 그는 경북 성주에 있던 논과 대명동 산대못(현,즉결재판소)을 팔아 건축비를 충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건물이 지었어요. 건물설계는 당시 대구에서 건축업을 하던 윤학기가 했고 건축공사는 벽돌공장을 경영하던 백남채의 책임 하에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했다고 들었어요.”

조양회관은 1920년대 근대건축 중의 우수한 건물로 마루판,지붕가구,창문틀 등의 목재는 압록강 근처에서 생산된 낙엽송으로 8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형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조양회관의 원적지인 달성공원엔 ‘빼앗긴 들’을 외치던 저항시인 이상화의 시비가 있다. 이곳에서 대구학생운동을 주도하며 항일운동을 편 백기만,이장희,현진건,이상백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들을 키워냈다.

지방의 한 언론인 서상일. 그가 불굴의 항일독립정신으로 세운 건물은 83년 풍상이 지나도록 변색되지 않는 붉은 벽돌로 남아 청소년들의 표상이 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의 요람으로,해방후에는 건국의 주춧돌 역할을 한 유서 깊은 대구의 명물 ‘조선의 빛’ 조양회관은 내년 3월 항일운동기념탑 건립을 계기로 민족정신 교육의 장으로 탈바꿈 할 예정이다.

대구=윤중식기자 yunjs@kmib.co.kr



[근대 문화유산을 찾아서] (10) 조양회관 오른편 마당에 45m 항일운동탑 세운다

‘조선의 아침햇살’을 상징하는 조양회관 오른편 너른 마당에는 내년 3·1절을 맞아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 건립된다. 효목동 망우공원 내 2700평 부지에 들어설 독립운동 테마공원에는 높이 45m의 기념탑과 기념광장,휴식처 등이 조성된다.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건립위원회(위원장 정관)는 지난 2002년 향토 항일운동의 뿌리인 조양회관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기념탑을 건립키로 하고 성금 모금을 시작했다. 한국델파이가 2000만원,이스라엘 출신의 모셰샤론 대구텍 사장이 1000만원을 기탁하는 등 시·도민들의 참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달에는 대구은행이 7000만원을 기탁해 모금목표 10억원의 절반에 가까운 4억5500만원이 모였다. 기념탑 건립사업비는 총 50억원 규모이며 내달말 기공식을 할 예정이다. 사업비 중 국비(15억원)와 대구시비(15억원) 지원은 이미 완료된 상태다.

그러나 최근 경북도가 지원하기로 했던 10억원에 차질이 생겼다. 도의회가 6월 임시회에서 예산을 삭감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명식(대구대 사범대 역사고고학) 부위원장은 “기념탑에 이름이 새겨질 애국지사들의 92%가 경북 출신인데도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업지원을 못하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명환 광복회 대구·경북 연합지부 사무국장은 “1896∼1945년까지 50년 동안 대구·경북지역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주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면서 “독립운동기념탑 사업이 원활하게 이뤄져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나라사랑의 교육장으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윤중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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