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남미 이민은 조금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사실 이곳에서 공부하기 전까지 우리 동포들이 남미에 많이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현지의 의류업의 많은 부분에서 활약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질감 있는 한 나라에서 이런 모습은 성공이라면 정말 큰 성공이다. 외모도, 언어도, 문화도 상이한 타국에서 판자촌을 전전하며 그들의 생활을 꿋꿋이 이겨내 온 것은 아무리 아르헨티나로의 이주가 본인의 선택이었을 지라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안정한 정치,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민지에서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이런 과정에서 한인회의 역할을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지금부터 이곳에서의 정착과정을 중심으로 위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고자 한다.
2. 본론
(1) 아르헨티나 이민사
▶ 아르헨티나의 첫 한국인
이차손씨가 1941년부터 한 일본인의 세탁소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아르헨티나의 한인 발자국은 시작되었다. 그 후 강영례씨가 있는 정도였다. 그 후 아르헨티나에 발걸음을 옮긴 사람들은 반공포로 출신의 동포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953년 휴전이 성립되어 포로교환을 하게 되었을 때 중립국으로 가기를 희망했던 포로들은 한국을 떠나 일단 인도로 향했었다. 그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미국으로 이주하기를 희망했으나, 미국은 교전 당사국이라는 이유 때문에 제외되었고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3개국이 물망에 올랐다. 그래서 그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에세이사 공항에 도착한 것이 1956년 10월 21일 이었다. 총 9명 중 2명은 중국인 포로였고, 임익간, 장기두, 박상신, 박창근, 홍일섭, 한영모, 정정희 씨들이 바로 그들인데, 이차손씨가 아르헨티나에 입국한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멕시코로 가기를 희망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수민 여부가 불투명하여 생각을 바꾼 정주원, 김관옥, 조철희, 손재하, 이처균 씨가 1957년 5월 11일에 비행기편으로 아르헨티나에 도착했다.
▶ 라마루께 영농이민단
이후 1965년 10월 14일 한국에서 남미이민 바람을 타고 제 1차 라마루께 영농이민단 13세대 78명이 아르헨티나에 입국하게 된다. 이 1차 영농이민단의 도착을 계기로 파라과이 등지에 가 있던 동포들도 속속 이주해 와서 아르헨티나에 본격적인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후일에 가서 아르헨티나 한인사회는 1차 영농이민단을 사실상의 아르헨티나 한국이민의 기원으로 보고 1985년 10월에 이민 2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가졌다. 이후 몇 차례의 영농이민단이 있었으나, 1977년 5월 남미 이민을 제한하는 5 ․ 4 조치로 이민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파라과이 등을 통한 이민 유입은 계속 되었다.
▶ 3만 불 투자이민
1985년 한 ․ 아르헨티나 간 한국이민 송출 및 접수절차에 관한 의정서 체결로 3만 불 투자이주 허용하여, 1989년까지 연평균 1,000세대 이상 입주를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시점으로부터 이민한 이민자들은 그 전 이민자들과 여러 가지 상이한 양상을 보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전의 이민자들을 구이민자, 후의 이민자들을 신이민자들이라 하겠다.) 신이민자들은 구이민자들과는 이미 이민 동기부터 달리했다. 정년퇴직을 했거나 직급정년이 임박했던 간부사원들 중에서 국내에서보다는 해외에 나가서 변신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을 했던 사람들, 자녀들의 진학문제(특히 대학진학)로 고민을 하다가 역유학1) 등의 방법으로 타개책을 모색하려고 편법으로 이민한 사람들, 선진국으로 이민을 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아르헨티나 이민을 택한 사람들, 상사의 해외 주재원 경험이 있었거나, 해외 건설현장에 파견되어 관리직 또는 기술직 사원으로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해외생활을 선호했던 사람들, 섬유업 분야나 기타 업종에서 몸소 경험도 했고 기술도 몸에 지닌 사람 중에서 외국에 나가서 꿈을 펼쳐 보겠다는 야심이 있던 사람들, 국내의 치열한 산업경쟁에서 패배한 후, 이민으로 재기할 기회를 찾으려고 한 사람들, 친지나 친인척의 권유로 이민을 결심한 사람들 등 그 이유도 다양했다. 대강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투자이민 케이스로 아르헨티나에 이민해 왔었으므로 고학력 소지자가 전보다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2) 아르헨티나 이민자 생활
▶ 영농이민의 실패
남미 이민하면 떠오르는 것은 의류업계 관련 사업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민자들이 의류계 사업에 종사했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처음 이민은 영농이민단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영농이민단이 농사 경험이 풍부했던 이들은 아니었다. 같은 교회 교인이자 친지였던 박민흥, 홍종철 두 사람이 해외에 이주에 살기로 의기가 투합되어 이민의 노력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박민흥씨는 외자청장 비서관을 지냈을 만큼 영어에 능통한 영어교사 출신의 관리였고, 홍종철씨는 미국에서 유학도 한 일이 있었던 고등학교 음악교사였던 것이다. 이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집단이민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인을 중심으로 주로 그들의 친인척으로 이민단이 구성되었고, 이들은 농업에 문외한 이었던 것이다. 어렵사리 이민에 성공한 라마루께 영농이민단은 두 달 여에 걸쳐 1965년 10월 부에노스 아이레스 항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여도 그들은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라마루께읍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부터 먼 거리에 있었고, 뱃짐 통관까지 거쳐야할 여러 가지 일들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도착한 라마루께 농장은 그야 말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 400㏊ 라는 대지가 주어졌지만 황무지를 개간할 장비는 물론, 영농자금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살집조차 없어 천막을 치고 그들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남위 40도선 이남지방은 파다고니아 지방으로 그 지역 일대는 연중 강한 서풍이 불기 때문에 천막이 걸핏하면 쓰리지곤 했다. 그래서 한 달 여에 걸쳐 흙벽돌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당초의 계획이 무모하였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져온 기구로 힘들에 호박, 토마토, 감자 등 채소를 심어보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그들의 부식용에 불과할 뿐 소득과 연결될만한 것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모국정부에게 황무지 개간자금을 지원해달라는 청원운동을 벌이는 한편,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을 강구하기 시작했지만 결국 그들이 도착한지 2년이 지난 1967년에 들어가서부터 라마루께 농장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 판자촌에서 의류삯일의 시작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그들이 발견하게 된 곳이 레띠로 판자촌이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말이 필요 없는 막노동의 경우에도 현지인의 체격과 체력에 비교할 수 없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한 일은 구두수선이나 자신의 보따리 속에 넣어온 생필품을 팔고 다니는 일이었다. 더러는 식품점이나 채소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레띠로 판자촌 뿐 아니라 이후 비쟈쏠닷띠, 109촌2) 등으로 한인들의 판자촌 생활은 이어졌다. 그래도 전업회사에 취업했던 노득린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의 부인 조화숙씨는 이웃에 사는 현지인들의 청탁을 받아서 부업으로 109촌에서 편물을 짜기 시작했는데 이는 라마루께 농장에서의 일당에 1.5배정도 되는 일이었다. 편물 짜는 일은 일주일 정도만 배우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많은 사람들이 조화숙씨에게 수강한 후 이 일에 종사하게 되었다. 요꼬 삯일, 편물 삯일, 봉제 삯일 등은 우리 이민자들에게 주요업종이 되어갔다. 1969년 말경에는 편물업이 109촌 동포들의 주업종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감을 얻고, 가져다주고, 배분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 안에서도 일의 세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삯일로 이민지에서 자리잡아가 가고 있던 이민자들은 조금씩 부를 쌓을 수 있게 되었다. 판자촌을 떠나 새로운 거주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으나 일을 하기 위해 사용했던 기계들의 소음으로 쉽사리 거주지역을 떠날 수 없었다. 당국의 판자촌 강제 철거로 할 수 없이 이곳을 떠날 수 없을 때까지 일은 계속되었다.
▶ 온세의류도매상가로의 진출
이후 1977년경부터 온세의류도매상가로 진출하는 동포들이 하나 둘 생기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의류생산업을 시도하는 동포들이 눈에 띄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80년에 접어들면서 본격화하기 시작하여 동포사회의 의류업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동포의류업계의 선두주자들은 다투어 온세의류도매상가로 진출하여 의류도소매업자로 뛰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일부 의류삯일업자들은 속속 의류생산업자로 변신해 갔다. 이러한 변신과정을 통해 동포사회는 급속히 경제력을 지니게 되어, 최하층의 빈민촌 생활에서 중류 내지 중하류생활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 투자 이민시대의 신이민자들
그러나 그 후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신이민자들은 구이민자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신이민자들이 떠날 무렵의 한국은 1985년을 기점으로 경제사정이 급속히 호전되었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므로 국민들은 곡 선진국 대열에라도 진입할 것처럼 흥분을 하고 있을 정도였고, 수도 서울은 88올림픽을 치루기 위해서 하루가 다르게 국제도시화하고 있는 형편이었는데, 모국에서 이런 체험을 하고 온 신이민자들은 그런 것과는 너무 달라 보이는 낯선 아르헨티나 사회와 마주치면서 거부현상을 일으켰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만성적인 이민지 사회의 인플레현상을 보고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 정신없이 벌어지고 있는 파업현상을 보고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다가 군부의 반란사건이 예사로운 일처럼 쉽게 일어나는가 하면 그 사건의 처리방식도 한국적 사고방식으로는 잘 납득이 되지를 않았었다. 반면 구이민자들은 자기들이 이민지에서 해낸 일들에 대해서 긍지도 지니고 있었고, 장차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도 얼마쯤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들이 이민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몰랐기 때문에 이민 초창기에 겪어야 했던 시행착오를 후배 이민자들에게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파심을 가지고 대했다. 그러나 신이민자들은 생각이 달랐다. 이민이 시작된 20년이 넘는다면서 선배 이민자들이라고 뽐낼 줄만 알았지 실제로 이룩해 놓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고작해야 시장바닥의 장사꾼이 아니면 남의 삯바느질이나 하고 있는 것이 구이민자들의 실상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에게 무엇을 배울 것이며,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구이민자들은 낙후한 아르헨티나 사회 속에서 너무 길들여져서 모국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이 대단한 성공이나 거둔 것처럼 선배행세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식품 제조 ․ 판매업, 식당,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 제과업, 채소농업, 또는 자신의 기능을 살려 골프레슨이나 테니스코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이민자들의 동기도 다양하고 최종 정착지가 이곳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 캐나다 등으로 재이주를 하기도 했다.
(3)한인회
아르헨티나의 이민사를 보면서 독일이민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되었다. 그 시기가 비슷하기도 하고, 더 나은 사회로의 진출을 꿈꿨던 이민자들의 모습도 그렇고 말이다. 독일 이민자들 상당수가 광산일이나 간호사(상상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게 된) 일을 하지 않았던 고운 손을 가졌던 사람이었고, 아르헨티나 이민자들 역시 농사일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이민 1세대들이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그리고 이들에게 낯선 타국 땅에서 유연하고 안정적 생활을 하기 위해 이들 가까이에서 도움을 준 곳이 바로 한인회이다.
대부분의 이민사회에는 한인회가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서는 한인회의 역할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생사가 관련된 건강 문제가 발생해서 병원에 가도 정확한 의사 전달을 할 수가 없고, 이민 1세대 이민지에서 그나마 손쉽게 할 수 있는 자영업조차도 관공서에 일을 보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를 처리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영주권이나 시민권 취득에 있어 개인보다도 단체의 도움은 한 동포 사회에 힘이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이유들을 대지 않고서도 분명 한인회는 이민사회에서 개인이 담당할 수 없는 일들을 대신 담당함으로서 명분이 분명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르헨티나의 한인회는 의미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첫째로, 이민자들을 위한 서반어 교육,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를 담당해줄 기관이 필요하다. 둘째로, 아르헨티나의 경우 대부분의 동포들이 동종 업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예기치 않은 경쟁으로 제 살 깎아 먹기 행위 등이 발생을 중재하고 예방해야만 한다. 셋째로, 이민지 안에서 동포들이 법적 지위 향상을 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과거 아르헨티나에 이주해 체험적으로 한인회의 필요성을 느꼈던 거 같다. 영주권 없이는 무슨 일을 해도 불안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의류 삯일을 위해서는 소음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는데 주변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이민족들(볼리비아 인등)에 의해 신고라도 되어지는 날이면 본국으로 쫓겨나지 않을까 노심초사 해야만 했다. 그런 그들에게는 하루 빨리 영주권이 필요했고, 한인회는 이런 일들을 대사관과의 관계를 통해 좀 더 쉽게 해결했다. 또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 궤도에 접어들어서 자녀들의 민족 교육을 염려하던 이민자들이 한글학교 설립을 원할 때 모금 등으로 일을 쉽게 풀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교민회보를 만들어 동포들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해주었다. 하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교민 대부분이 의류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직종에 교민의 분포가 미미하다. 다시 말해서 안정된 이 분야의 일이 교민들에게는 어쩌면 당연시 되고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자녀들에게 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이 이미 약 40여 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직종에만 종사하고 있다는 것은 플러스가 될 수 있겠지만 또한 굉장한 위험 요소를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같은 업종에 종사하다보니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고, 제 살 깎기 같은 경쟁이 있기 마련이다. 이렇다 보면 단합해야 할 민족이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음은 뻔한 일이다. 게다가 업종 자체에 위기가 닥치게 되면 누구 할 것 없이 이민자들의 생활이 모두 위협받게 된다. 그리고 공부가 필요한 직업을 많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의 자녀들도 대학을 다닐 지언정 졸업자는 그다지 많고, 따라서 사회 주류로 그들의 진출은 제한되어지고 있다. 이런 문제점들을 생각한다면 한인회의 역할이 단지 좁은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좀 더 확장된 한인회의 역할이 필요할 듯 하다.
3. 결론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은 농업이민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의류업으로 안정적 궤도에 있다. 온세지구에 진출하기까지 15년 여 동안 의류삯일을 지속하며 기술과 안목을 키우고, 이런 과정에서 현지인들부터 정직성과 근면성을 인정받으며 차근차근 경제력을 키우기까지 그들의 노력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안타까운 몇 가지가 보였다. 동일 업종에 대부분의 교포들이 종사함으로서 그 외의 분야에는 진출이 상당히 미미함을 보이고, 이민 결정에 영향을 미쳤던 자녀 교육 문제에 관해서 그리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뛰어난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본인 생각이다. 아르헨티나의 대학 과정이 힘들어 졸업까지 그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렵다고는 하나 졸업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이민지에서의 좀 더 힘을 줄 수 있는 주류사회의 진출이 상당히 저조한 것이 현실이었다. 또한 동종업계에 대부분의 동포들이 종사함으로서 같은 배에 타고 있는데, 배가 풍랑에 휩쓸리지 않도록 더욱더 동포들의 합심과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빠르게 동화되어 가고 있는 후세들에게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 또한 필요하겠다.
발표를 위해서 참고한 책은 이미 오래된 책이다. 이 책은 아르헨티나 이민에 참여했던 교민이 쓴 책이다. 그래서 어쩌면 현지의 상황들 더 자세히 서술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표를 준비하면서 자료 구하기에 구애를 받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게으름도 한몫했지만) 예로 인터넷 사용이 많이 않은 남미 지역에서 모든 연락처가 전화뿐이었다. 과거 속에서 잊혀졌던 우리 동포들의 사회를, 이제는 현지인 뿐 아니라 제 3자 입장에서 정리되어진 객관적인 한인 사회 연구가 필요한 때인 듯 하다.
1) 그러나 본국에서 이를 눈치 챘는지 후에 이민지에서 일정 기간, 일정 양의 학업을 이수해야만 입학이 가능하도록 했다.
1) 109촌이라고 부르고 있는 연립 임대 주택단지의 정식 호칭은 ‘바리오 리바다비아’이다. 이 당시 동포사회에서는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주택단지의 호칭을 그 단지에 종점을 가지고 있는 노선 버스의 번호로 바꾸어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이곳에 109번 버스의 종점인 동시에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109촌은 한인사회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의류 삯일의 중심지로서 한인동포들의 생활정보 집산지로서 또는 한국적 식품 및 생활용품 공급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곳이었다.
참고서적 : 아르헨티나 한인이민 25년사 ; 이교범 저;
선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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