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욱, 백두산(長白山) 풍경, 2003.
長白山 風景寫眞 論, landscape
photography
부제: 풍경사진은 왜 꼭 자연이어야만 되고, 아름다워야만 하는가?
‘장백산’에 가면 있지만, ‘장백산 사진’에 없는 것은 무엇인가? 반대로 ‘장백산 사진’에는 있으나 ‘장백산’에는 정작 없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무슨 둥 딴지 같은 수수께끼 질문인가! 하겠지만, 이 문제를 풀면 연변의 장백산 풍경사진이 잘 보이게 된다.
장백산을 찍은 사진은 모든 것이 멈 추어져 있다. 그러나 ‘자연의 장백산’은 잠시도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다. 태초에 장백산이 생성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멈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백산을 찍은 사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영혼이 박제된 미이라처럼 방부제 처리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자연의 장백산’에는 없는 것이다. ‘장백산 사진’에는 구도의 법칙이 있다. 노출의 기술이 있다. 작가 선택의 취향과 작품 선정기준의 사회적 약속이 있다. 그러나 정작 ‘자연의 장백산’에는 그 모든 것이 없다.
또 있다. 독자들은 조금 골치 아프겠지만 이 수수께끼 같은 질문: 장백산에는 있지만, 장백산 사진에는 없거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에 답하면서 이 글을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필자는 지금 2004년도 장백산 국제사진콩클에서 입상한 남용해(동상), 온파(동상), 한영(우수상), 허선행(우수상), 최주범(우수상), 이종걸(우수상)의 사진을 보고 있다. 이들 이외에 10폭의 장백산 사진이 전람회에서 입상을 하였다고 한다. 경사스러운 일이다. 연변작가의 위상을 떨쳤고, 더 나아가 연변사진작가협회의 열정어린 노력이 느껴진다. 특히 남룡해, 최주범의<천지사진>, 한영의<천상의 구름과 어우러진 장백산의 골과 능선>, 온파의 <먼발치에서 바라본 아득히 펼쳐진 숲과 장백산의 봉우리들>은 숨이 딱 멈출 만큼 장백산의 웅장함과 신비로움에 넋을 잃어버릴 정도로 아름풍경 속에 푹 빠져들게 한다. 이종걸의 <바위틈에 낀 이끼와 물의 신비로운 흐름>, 허선행의 <아래로 내려다본 노란 단풍이든 자작나무>사진은 세부적이고 자연의 숨결이 느껴지는 조형적인 형태미를 강조하는 사진들이다. 그 누가 이들 사진 앞에서 ‘아름답다’ 말하지 않겠는가? 아니 장백산을 찍은 풍경사진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처음에는 넋을 잃었으나, 이제, 지나치게 많이 본 탓일까! 처음의 그 감정이 많이 희석되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진정으로 아름답다면, 세월이 지나도, 많이 보아도, 변화지 말아야 되는 것이 아닌지. 아쉬움과 무언가 답답한 가슴의 한 구석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필자는 이곳에 와서 줄곤 장백산 사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해서 많은 장백산 사진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그리고 언젠가는 장백산 사진론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오늘 이 기회가 주워진 것은 그러므로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필자는 인터넷을 통해서 장백산 사진을 검색 해보았다. 한글로 입력된 장백산 사진은 100개, 영문 표기로 검색한 것은 105개 사이트 그리고 작년에 연변 조선족 자치주 촬영가 협회에서 출판한 장백산 사진집을 보았다. 그리고 그 이전부터 보아온 장백산 사진을 포함하면 가히 그 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이들 장백산 사진은 하나같이 똑 같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각도 만 살짝 달랐을 뿐 아마추어 서양사람이 찍었던 장백산의 모습과 여느 연변 작가들의 장백산 사진이 어쩌면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이들 사진들은 단지 그 때의 기후 조건이나 촬영각도와 작품의 색상과 선명도의 미묘한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작가가 찍은 사진은 좀더 세련되었고, 기계설비의 우수성과 그 동안의 익혀온 기술적인 완성도로 인한 사진의 선명도와 화면의 안정적인 구도가 아마추어 사진가가 찍은 사진 보다는 더 좋았을 뿐이다.
그러나 언뜻 보면 이들 작품에 좋고 나쁨을 떠나서 작품을 제작한 개별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더라면 한 작가의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매우 유사한 사진들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분이 천지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의 비슷한 풍경과 카메라 렌즈가 만들어내는 화각의 범위와 각도, 촬영거리의 유사성은 장백산을 보는 관점이 의심스러울 만큼 똑 같다. 즉, 특별히 작가의 개성이 느껴지는 사진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년(2004년)에 연변 작가협회에서 만든 작품집에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이 책에는 단 한 장의 사진도 똑 같은 사진은 없다. 이것은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어 독자로 하여금 재미를 느끼고, 관심을 끌기 위한 의도로 똑 같은 사진을 반복적으로 나열할 수 없는 책의 편집상 특성 때문이다. 양쪽 페이지에 걸쳐 펼쳐진 넓은 화면을 차지 하고 있는 사진과 한족 페이지에 한 장 혹은 여러 장으로 작게 배치된 사진에서 느껴지는 시각적인 강도의 힘은 다르다. 역시 이러한 편집적인 장치는 다양한 장백산 모습의 변별력 만큼이나 조화로운 편집상의 기술이다.
그러므로 개별 작가가 장백산을 바라보는 태도와 입장 그리고 감각적 차원의 개성적인 발현을 충분히 발휘하기 어려운 장 인 것이다. 그 보다는 장백산을 바라보는 편집장의 주관적인 관점이 개입되고, 장백산 사진집의 전체를 위해서 각각의 이미지들은 일정한 편집의 목적과 방향 속에 녹아 들 수 밖에 없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이들 작가의 작품이 위계질서에 의해서 크기의 등급과 배열의 위치와 순서가 정해졌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작품의 질적 차이로 판단하지 않는다. 책의 편집을 위해서 거쳐야 할 복잡 다단한 맥락 속에서 편집자의 고민이 선택과 배제, 시각적인 위계등급의 배치는 어절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필자는 편집의 방향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연변 사진작가들이 장백산을 보는 관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서 보지 않았다. 참여 작가의 개성을 보고싶었다. 불행하게도 아직 작가적 영량을 발휘하는 창의적인 장백산 사진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개별작가의 개성적인 특성을 보는 것을 포기했다. 그대신 연변 사진작가들이 장백산을 보는 공통된 인식론적인 관점을 분석하고, 드러난 현상을 풍경론이라는 미학적인 접근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필자가 연변대학에 처음 와서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회화과 교수이자 화가인 어떤 한 분의 장백산 그림을 본적이 있다. 그의 작품은 그 폭이 족히 3메다가 넘는 대작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작품을 완성된 상태로 본 것이 아니어서 무어라 말할 수 없으나, 그가 나에게 들여준 이야기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 난다. 그가 말하기를 “그는 이도백화가 고향인데 어릴 적에 장백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 한 참이 지난 후에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에도 역시 장백산에서 들려오는 ‘웅’~’웅’~. 하는 소리에 지금 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태고 적에 들려오는 어머니 품속 같은 아주 편안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어서 하는 말이 “왜! 사진가들이 찍은 장백산 사진에는 그 소리가 없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장백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전문 사진작가들이 찍은 작품집과 여러 장의 사진을 참조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직접 찍은 장백산 사진도 꽤 있었는데, 기술적으로는 매우 형편 없었다. 그는 전문 사진가들의 사진에 만족 할 수 없어서 본인이 직접 사진을 배우면서 찍고 있었다. 사진기술을 좀더 익히면, 반드시 장백산의 소리를 담아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 있게 강조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사진은 정말이지 형편 없이 못 찍었기에 사진기술을 다 익힌 다음에 그림을 완성하기 까지는 한 참이나 멀어보였다. 초점은 맞지도 않고, 흔들리고, 노출은 지나치게 밝거나 어두웠다. 구도는 화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균형과 조화가 없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기술적으로 실패하지 않고 잘 찍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진기술 배우지 마세요! 그러면 장백산의 소리가 달아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놀랐다. 나는 장백산의 소리를 사진으로 찍어내겠다는, 그의 발상에 놀랐고, 그는 사진기술을 가르치는 선생이 사진기술 배우지 말라고 하는, 나에게 놀랐다고 했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매력에 끌려서 술 한잔을 멋지게 했다. 이후 그의 완성된 작품을 볼 수 없었으나, 그가 장백산을 보는 관점과 태도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보이지 않는 소리를 어떻게 찍을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소리의 느낌을 시각적으로 표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소리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소리의 존재 감을 관객들에게 전달했다고 해서 작가만이 느끼는 소리의 감정을 다 표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불가능하지만 작가가 장백산을 보는 관점이 단순히 시각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백산에는 소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실제로 장백산에는 무수히 많은 소리가 있다. 그러나 그 소리들을 담아내는 매체는 녹음기가 적절하지,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만 잡아내는 사진매체는 소리를 기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가들은 쉽게 소리를 잡아내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지는 이 엉뚱한 생각이 바로 예술창작의 열쇠가 된다.
서두에 질문 했던 문제제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필자의 질문에 답을 찾았는가? 어느 정도 눈치챘을 것이다. “장백산에는 있지만 사진에 없는 것. 사진에는 있지만 장백산에는 없다면, 왜 연변의 작가들은 장백산에 존재하는 것을 찍지 않았을까? 왜 작가들은 장백산에 없는 것을 담으려 했을까? 이것이 궁금하다. 연변사진작가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현상은 혹시 장백산 풍경을 바라보는 어떤 ‘공통된 인식 틀’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장백산을 찍은 풍경사진에는 언제나 사람이 없다. 태고적의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조용하고 장엄하다. 연변 작가들이 장백산 사진에 사람을 넣지 않고 풍경사진을 만드는 이유는, 풍경은 곧 ‘자연’이다.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의해서 때묻지않은 순수한 자연만이 풍경사진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 인간이 들어가 있는 사진은 어딘가 순수성을 일어버린 불경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순수자연이 아니다. 장백산에 가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풍경들. 예를 들면 장백산 폭포쪽으로 올라가는 콘크리트로 덮혀 있는 구조물과 여기 저기에 있는 ‘전봇대’와 ‘전선줄’, ‘호텔’, ‘도로’, ‘대형수로 관’, ‘자동차’ 그리고 ‘관광객’들과 ‘장사치’들은 연변 작가들이 찍은 장백산 풍경사진에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이 아니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모든 모습이 온전히 다 담겨져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에 떠있는 ‘달’, ‘별’, 날아가는 ‘새’, ‘눈보라’, ‘비’ 내리는 풍경도 없고, 안개 덮여 천치가 보일 랄 말락 하는 광경도 없다. 밤하늘에 떨어지는 천지의 무수히 많은 별들도 없고, 천지호의 물속세계로 없다. 연변의 장백산 풍경은 언제나 ‘기후 맑음’이다. 그런데도 중천에 떠있는 ‘해’는 없다. 그리고 ‘바람’도 없다. 특히 바람의 존재 감을 찍은 장백산 풍경은 없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 존재하는 소리의 존재감은 더욱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변작가들의 장백산 풍경사진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그렇다면 연변작가들이 장백산 풍경을 바라보는 관점은 단지 자연이기 때문에 소재로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들은 장백산에 가면 아름답게 펼쳐진 자연의 여러 요소 중에서 시각적인 조형성의 원리에 부합하는, 볼만한 ‘미적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지는 대상만을 선택한다. 화면 구성을 위한 ‘선’과 ‘면’ ‘색채’, ‘톤’, ‘형태’ 등이 중요 하다. 물론 사람을 포함한 인공적인 대상은 무조건 제외된다.
이는 연변 작가들이 장백산 풍경사진을 찍을 때에 ‘풍경 = 미(美)’의 등식으로 곧 ‘자연 = 미(美)’라는 것으로 동일하게 보고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연이 아름답지 않다면, 풍경도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진에 찍혀진 풍경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세상에 자연은 반드시 아름답다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러나 정말 우리의 자연은 늘 아름답기만 한 것인가? 만약 아름답지 않은 자연을 찍은 사진이 있다면 우리의 인식은 어떻게 작용할까? 객관적인 매체인 사진이 사실을 정확히 기록 한다고 정의 된다면, 장백산의 아름답지 않은 자연이 찍혀진 사진을 우리는 무어라 말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름답지 않은 장백산 자연의 풍경을 다만 현실로는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일 것이다. 그것은 감동을 주지 못하고 볼만한 가치가 없는 진정한 장백산의 풍경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의 토대는 우리가 그토록 아름다운 장백산 자연풍경을 보려 하는 욕망이 작동하는 구조가 된다.
생각해 보자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시 밖을 떠나야 한다. 장백산 국립공원의 울타리 안에서 그것도 마음대로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잘 닦여진 정해진 코스의 길에서 벗어 날 수 없다. 혹시라도 꽃이라도 하나 꺾는 날이면, 자연보호법에 위반되는 일이니, 그 속에서 만지고 호흡하고 체험하는 일은 아니다. 정해진 관광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도시 속으로 들어와 TV의 영상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자연을 이해하고 관광기념사진을 통해서 향수 할 뿐이다. 그리고 사진 작가들이 찍어놓은 풍경에 감탄한다. 그러니까 현대의 대부분도시인의 삶은 인공 물로 뒤덮인 기능화 된 환경 속에서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장백산 사진 속에 존재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은 이미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울타리처진 장백산 국립공원에서, 달력의 ‘박제된 풍경’에서 텔레비젼의 자연 다큐멘터리 시리즈 물에서 가상으로 존재한다. 콘크리트 숲에 둘러싸인 현대 거대도시에 살고 사람들은 어쩌다 휴일이면, 도시생활을 접고 자연을 찾아 나서는 것은 곧, 우리들 마음속에 이미,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이다. 잃어버린 자연에 대한 향수가 발길을 재촉한다. 지긋지긋한 현실의 일상의 풍경에서 도피하는 것이다.
연변 작가들은 이 구조적인 욕망의 지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볼품없는 앙상한 나뭇가지’의 풍경이나, ‘이름없는 잡초’와 ‘퇴색된 땅’의 흔적, ‘텅 빈 하늘’,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돌멩이, 좀처럼 천지를 구경하기 어려운 ‘악조건의 기후상태’를 찍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장백산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즐겁게 감상 할 만한 자연풍경은 더욱 못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천지의 장면을 찍은 대분의 사진은 거의 비슷한 각도로 찍혀져 있어 마치 낚시꾼의 포인트처럼 지정된 장소가 있을 정도이다. 사실 장백산의 장엄한 광경, 아름다운 자태를 들어내는 시간은 1년 중 거의 몇 일이 되지 않는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모습을 제대로 만나기란, 사진가 에게는 어려운 행운이다. 그러므로 사진가들은 장백산에 오르기 전에 이미 상상으로 어떤 사진을 어떤 위치에서, 어떤 대상을, 어떤 각도로 찍을 것인가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계산한다. 운이 좋다면 자신의 예상 되로 훌륭한 사진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사진은 매년 전람회와 전국공모전에서 입상을 하게 된다. 만약 등 수에 들지 못한 작가들이 있다면, 앞선 선배의 전처를 따라 그 모범의 기준으로 삼아 역시 입상 권의 사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묻고 싶다. 이들 사진이 과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점이 있는지. 거의 비슷한 유형의 사진들이 반복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즉, 장백산에서 온몸으로 부디 치며 느끼는 어떤 존재감이 있어도 이를 사진으로 담아내기에는 어떤 선행적인 규범이 없고, 공모전의 입상 권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찍지않는 것은 아닌지. 내가 기대하는 아름다움이 아니어서 분명히 존재하는 장백산의 존재감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러나 문제는 자연은 자연에 속하지만, ‘아름답다.’는 판단의 자대는 인간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은 아름답다.”는 관념은 이미 자연과 인공 사이의 모순을 포함 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사회의 양자가, 또 그 사이의 관계가 변화하면 아름다운 것 또한 변화 한다. 오늘날 우리들이 바라보는 아름다운 장백산 풍경은 사실, 서양의 중세의 사람들에게는 기독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신’의 손길이 머물지 않은 악마가 사는 곳이었다. 수심을 알 수 없는 천지호의 물결은 두려운 대상 이었다. 그러므로 자연이 아름답다는 가치판단은 문화적인 것이고 시대에 따라 역사적으로 완전히 다른 내용의 판단 기준을 갖는다. 다시 말해 특정한 역사적 시기의 자연의 아름다움은 다른 시대에 와서 전혀 다른 관점으로 해석 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뒤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이 아름답다는 역사적 관점은 해석의 문제이지 자연 그 자체의 형태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천편 일률적으로 장백산 풍경사진하면 ‘천지’, ‘장백 폭포’, ‘소천지’, ‘산림원’ ‘설경’, ‘단풍’, ‘운해 가 걸쳐진 능선’, ‘노을’ 등 아름다운 자연만이 찍혀져 있는 것은 또 우리가 그러한 사진을 풍경 사진이라 정의 하는 것은 절대적일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사진은 일반적인 관광지나, 명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엽서사진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영욱, 백두산(長白山), 2003.
장백산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아름답지 않은 풍경도 반드시 존재한다. 예를 들어보자, ‘장백 폭포에 버려진 플라스틱 물통’, ‘천지에 마구 버려진 쓰레기’, 장백산의 절경과 전혀 어울리지않는 콘크리트 ‘도로’와 ‘인공 구조물’, ‘전신줄’ ‘관광객’들을 찍은 사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달력이나 엽서사진처럼 감상의 차원으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장백산 자연 풍경을 회손 하는 비판적 시각의 다큐멘터리 풍경사진이 될 수 있다.
연변 작가들의 사진은 지나치게 예술적이고 아름답다. 풍경사진이 예술적인 기능을 가지는 것은 반드시 아름다운 자연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현대 풍경사진은 자연적·인공적 경치를 주제로 하여 찍은 사진. 아름다운 자연·전원 풍경·명소 등을 제재(題材)로 하여 사진가의 관조를 통한 해석을 곁들여 찍는다. 최근에는 인공적 건조물이며 인공적 정경을 찍은 사진, 일상적 풍경이나 주민생활과 자연과의 관계를 포착한 사진, 자연의 조형에 초점을 맞춘 사진, 추상화 된 공간 속에 작가의 내면세계를 반영한 작품, 그리고 주관적 심상을 나타내는 심상(心象)풍경까지도 풍경사진의 범주는 매우 다양하다. 이는 작가가 풍경에 대한 어떤 태도와 입장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사회학적, 정치적, 지질학적, 심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모든 입장이 예술사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은 일정한 규칙과 틀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끈임 없이 기존의 규칙과 상식의 법주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행위가 있을 때에 우리는 그를 예술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변작가의 장백산 사진은 모두가 다 자연만을 대상으로 한 예술 지상적 풍경사진 이다. 풍경이 예술사진 형식으로 자리잡은 지점을 살펴보자. 먼저 풍경(風景)이라는 언어적인 해석부터 하면, 영어로는 랜드스 케입(landscape)이다. 땅(Land) + 광경(Scape) 합성어다. 그러니까 “땅의 광경을 본다.” 라는 뜻이다. 누가 보는가? 그것은 봉건영주가 자신의 경작지를 보는 광경이다. 그가 바라보는 광경은 자신이 소유하는 토지에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농사를 짖는 농부와 가죽, 농작물은 말할 것도 없이 땅 위를 날아가는 ‘새’까지도 영주의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양에서 풍경화의 시작은 왕과 귀족, 봉건영주가 자신의 재산이라고 상징되는 하나의 징표였던 것이다. 서양에서 ‘풍경(Landscape)’은 계보적으로 볼 때 17~18세기 서양미술사에서 특정한 장르의 회화를 일컫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귀족적인 회화의 전통에서 회화는 신이나, 영웅들의 능력이 실현되는 하나의 가든(정원)이었다. 그러던 것이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 해양 제패의 사회구조로 바뀌면서 새로운 종류의 풍경이 탄생한다. 부르주아의 형성과 시민계급의 성장은 재산, 소유권, 그러니까 물이나, 풍차, 상인의 배, 농민의 밭, 시민의 재산을 축복하는 배경으로서, 그러나 언 듯 보기에 보다 ‘자연적인’ 풍경으로 보이도록 그렸다. 또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연을 하나의 실험의 모델로서 혹은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영국의 자연주의 화가인 콘스터블이나 터너 등의 기상관측의 일기도가 등장 한 것은 이러한 배경아래서 이다. 이는 19세기초 미국의 개척시대에 정확한 기록으로서의 사진들과 관점이 매우 비슷하다. 다분히 ‘개발로서의 자연’이 그 대상인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감상의 차원으로서의 풍경은 아닌 것이다.
중국에서는 풍경(風景)이라는 말은 매우 철학적인 뜻이 함축적으로 내포되어있다. 풍경(風景)은 말 그대로 ‘바람의 경치’다. 이 얼마나 멋진 말 인가! 그렇다면, 바람의 경치를 찍은 사진이 ‘풍경사진’이란 말이다. 바람이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잠시도 가만히 한 곳에 머물지 않는 바람의 속성은 곧 ‘변화’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자연(自然)이 무엇인가 자연은 ‘스스로 그답다.’ 라는 뜻이다. 그러니 자연은 스스로의 원리와 법칙에 따라서 변화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니까 자연을 대상으로 한 풍경사진은 ‘바람처럼 변화 무상한 스스로 그 다운 존재를 바라보는 사진가의 조망(眺望)’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백산 풍경사진은 우리가 그곳에 가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알고있는 “이것은 ‘장백산’이다.” 라고 쉽게 알아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고정된 표상들이 아니다. 즉, ‘장백산’ 풍경사진은 사회적으로 약속된 상징적 의미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장백산 자연의 ‘변화’ 그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기록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장백산을 여러 번 가본 경험이 있던 사람도, 장백산에 지금현재 살고 있는 사람도 장백산의 변화 그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담아낸 사진 앞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낮선 경험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진에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장백산’이라 이름 붙여진 그런 상식적인 ‘의미’ 틀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단지 무어라 말로 다 할 수 없으나, 반드시 존재했던 흔적만이 있기 때문이고, 작가의 영감에 의해서 창조된 또 다른 말하기의 방식이자 표현인 것이다.
생각해보자 자연은 연속적으로 늘 변 한다. 그것이 속성이다. 자연의 매력은 그 변화 자체에 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실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사진은 한 순간을 파편적으로 고정시켜 기록한다. 여기에서 사진가는 모순에 빠진다. 사진가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자연의 변화 무상한 신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아 올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또한 자연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모습만을 지니고 있지 않다. 자연은 우리의 의식 밖에 있는 그 무엇도 전해준다. 우리가 자연에 감탄하는 것은 의식적인 상태에서만 경험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내가 함께 호흡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에 놓일 수 있다. 자연은 단지 눈으로만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도 귀로도, 촉각적으로도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이 작용하는 총 감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모습은 결코 객관적인 모습으로 외부의 세계에 단단하게 고정된 채로 놓여져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진정한 작가는 자신의 마음속에 다가온 자연을 온전하게 담아내기 위해서 일정한 규칙들의 틀에 억 메이지 않는다. 즉, 자연의 외형적인 모습이 단지 시각적으로만 지각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사진가가 구도를 잡는다든지, 정당한 노출과 인화상의 조절은 자연의 풍경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증거 한다. 장백산 사진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실제의 풍경이 아름다움도 있겠지만, 우선 사진가에 의해서 선택된 풍경을 효과적으로 보여 주기위한 방법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번 찍었던 풍경이라 해서 외면하는 법이 없이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또는 세월에 따라 그 풍경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추구하기 위해 그곳을 자꾸만 되찾아가곤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결국 사진가는 자연의 실체모습을 완전히 담아낸다는 사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이것은 예술가가 자연을 앞에 두고 가지게 되는 운명적인 것이다.
영국의 자연주의 화가 윌리암 터너는 자신의 고향 풍경을 만 여점에 달하는 그림을 남기고 200개에 달하는 스케치북을 남겼다. 그가 평생에 설쳐 그린 자연의 풍경은 거의 매일 변화는 대지의 기후와 빛의 변화를 담아내었다. 프랑스의 화가 세잔느는 그의 집 창을 열면 보이는 이름없는 돌산(石山) 생 빅트와르 를 화가로서의 거의 전생에 걸쳐 그렸다. 그가 고집스럽게 그리고자 한 것은 망막(網膜)에 비치는 감각적인 현상의 생 빅트와르 석산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산의 형태와 변화 그 자체의 자연이었다. 그러므로 인식론적 입장에서 앍고있는 생 빅트와르 산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체가 그림이었고, 스스로 변화는 자연의 존재론적인 닮음의 흔적이자 기록이었다.
현대사진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알프레드 스티글츠(Alfred Stieglitz 1864 ~1946)는 말년에 창문을 통해본 구름만 찍어 책 한 권을 냈다. 그 작품 제목이 이큐벨란트((Equivalents 등 가치) 즉, 스티글리츠의 마음이 곧 자신이 찍은 구름과 같은 심정이라는 표현이다. 현대사진에 들어와 미국의 새로운 풍경사진 계열의 작가 중 조엘 메이어로이츠(Joel Meyerowitz, 1938~ )는 자신의 고향 프로빈스타운 해변을 계절과 시간 때별로 같은 위치에서 몇 천장의 대형 필름원판(8 X 10, 11X14 인치)으로 찍었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세계적인 사진가 히로시 스키모토는 한곳의 바다 수평선 풍경을 흑백으로 표현해 책 한 권을 만들었다. 그의 사진에는 언뜻 보면 지루할 정도로 똑 같은 한 곳의 바다 사진으로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에 보았던 첫 장면의 바다와 마지막에 본 바다장면을 비교해보면 현격하게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자연은 ‘변화’ 그 자체인 것이다. 이는 바다 물을 한 컵 떠온다 해서 바다를 직접 가져왔다 할 수 없듯이 끈임 없이 변화는 바다의 존재를 한 장의 사진으로 담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자연은 결코 가져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들이 모두 한 대상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한 도전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다. 자연은 바로 그렇게 예술가를 유혹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달력이나 관광엽서사진으로 장식되지 않는다. 그들의 사진에는 가시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존재를 더 나아가 우주의 섭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론적인 흔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영욱, 백두산(長白山), 2003.
이영욱, 백두산(長白山), 2003.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진들이 “똑 같이” 잘 찍은 사진들로 채워져 있다. 잘 찍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멋진 구도와 정확한 노출 혹은 나를 감동시키는 장면들 그러나 그 사진들은 나를 유혹하지 않는다. 나를 유혹하는 사진들은 못 찍은 사진들, 낮선 사진들, 규정의 틀로부터 해방된 사진들, 나의 상상을 자극하는 사진들이다. 그 중에서도 아무 ‘의미’ 없는 사진들이다. ‘의미’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해석이며, 규정이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의 상상력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장백산’의 모습이 이러 저러하니 나를 이해 시키고 설득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상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잘 찍은 창조적인 아름다운 풍경사진은 해석의 골머리를 썩히지 않아도 되고, 이해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언제 어디서나 긴장 없이 다가서는 바람의 존재 감을 찍은 그런 풍경(風景)이다.
글: 이 영 욱(중국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촬영과 교수 rxli@ybu.edu.c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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