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게재일 |
9607 |
현재위치 |
5/6 |
출
전 |
월조 |
조
회 |
3728 |
조갑제기자의 몽골벨트 취재보고(1)-징기즈칸이 닦은
길(5) | |
5. 카자흐스탄-신생
자원大國
天山 산맥을 넘어서
5월29일
오전 울란바토르 공항을 이륙한 몽골항공 여객기는 그 옛날 투르크系 종족이 西進했던 방향과 나란히 알타이 산맥과 天山 산맥을 넘었다. 알타이
산맥은 비교적 낮았지만 天山 산맥을 횡단하는 데는 거의 2시간이 걸렸다. 1백만 도시 알마타는 天山산맥을 넘자마자 나타났다. 공중에서 보니
天山산맥을 병풍처럼 동쪽에 두고 숲 속에 싸여 있었다. 잘 계획된 도시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은 한반도의 12배나 되는
2백72만㎢의 국토를 가졌다. 대부분이 초원이다. 국토면적으로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이다. 자원도 원소기호표에 적힌 것은 다 나온다고 할
정도이다. 우라늄에서 석유까지. 특히 최근 미국 석유회사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한 원유 매장량은 [中東급]이라 한다.
인구는
1천6백70만 명. 카자흐人이 41%, 러시아人이 38%, 독일인 6%, 우크라이나人 5.8%, 기타 타타르人·우즈벡人·위구르人·벨라루시아人,
그리고 1937년에 블라디보스토크 근방에서 강제이주 당해 온 11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몽골人의 관점에서 보면 카자흐스탄은 동양인의
얼굴을 가진 몽골人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네 나라 중 하나이다. 즉 한국, 일본, 몽골, 카자흐스탄.
투르크人+몽골人=카자흐人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에는 8세기부터 서돌궐(西突厥)의
투르크人하들이 이동하여 살기 시작했다. 13세기에는 징기스칸을 따라 몽골인들이 들어와 先住 카자흐 민족과 혼혈하여 15세기경부터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회교를 믿고 투르크語에 속하는 카자흐語를 써 투르크系 민족으로 분류된다.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 19세기에 러시아의 식민지가
된 카자흐스탄 지역은 1917년의 공산혁명 이후에는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1930∼40년대에 카자흐스탄으로 소련의
소수민족들이 강제이주 당함으로써 이곳은 巨大한 수용소로 변했다. 스탈린이 러시아 원동지역(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 살던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킨
것은 1937년 9∼12월 사이였다. 화물 및 가축 열차에 태워져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한 달 여에 걸친 여행을 하는 도중에 많이 죽었다.
소련 정부는 한인들을 카자흐스탄에서부터 우즈베키스탄까지 기차역에서 짐 부리듯이 흩어 놓았다. 식량공급 등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이때 고려인들은 카자흐人과 우즈벡人들의 도움을 받았다. 외래인에게 친절한 유목민의 전통 그대로, 또 같은 몽골系라는 친근감도 작용했는지 그들은
식량을 주고 집을 내주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여러 고려인들이 {우즈벡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비워서 우리를 들여 살게 하고 옆집으로 이사갔다}고
기자에게 믿기 어려운 증언을 했다. 고려人들은 벼농사 등 농업기술을 이곳에 도입하여 살길을 마련했고, 곧 가장 부지런한 민족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물가상승률 95년에 1백76%
카자흐스탄에서는
1986년에 카자흐人으로서 대중적 인기가 높던 구나예프 당서기장을 모스크바 정부가 러시아人으로 교체하자 3일간 소요가 발생, 군대가 투입되어
무력진압을 했다. 이런 민족주의 기운을 바탕으로 하여 [양치기]의 아들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1990년 10월에 주권국가 선언을
했고, 1991년 12월16일에 독립을 선포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1995년 3월에 국회와 내각을 해산시키고 서기 2천년까지 자신의 임기를
연장하는 국민투표를 실시, 통과시킴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한층 강화하였다. 소련붕괴 후 졸지에 핵 보유국이 된 카자흐스탄은 미국으로부터 4억
달러가 넘는 경제원조를 받고서 핵무기를 해체하고 핵폭탄에서 빼낸 농축 우라늄을 미국에 인도하였다. 카자흐스탄엔 구(舊) 소련시대의
인공위성발사기지, 핵무기 실험기지가 있었다.
1995년 카자흐스탄의 경제 성적표는 좋지 않다. 1인당 국민 소득 1천1백 달러,
경제 성장률 마이너스 8.9%, 물가 상승률 1백76%, 무역수지적자 9억5천만 달러. 그래도 94년도의 GDP 성장률 마이너스 34%에 비하면
호전된 것이다. 카자흐 경제는 舊 소련시대에 에너지, 중공업, 광업 중심으로 편성돼 있었다. 대규모 중공업 공장과 광업소가 잇따라 문을 닫고
있으며 러시아 기술자들은 철수하고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對外개방정책으로써 외국 자본을 유치하려고 애쓰고 있다. 외채 상환액이 GDP의
16%에 달해 추가적인 도입이 어려워지고 있고, 일단 진출한 기업도 사회주의 체제의 구습(舊習)과 새로운 체제의 미비로 해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혼란을 기회로 여기는 한국기업인
이런 혼란을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고 진출한 한국기업은 대우, 삼성, 현대, 한화, LG, 털보네식품, 대영모방 등 10여 개에 이른다. 약 60명의 상사원이
주재하고 있다. 회교도가 90% 이상인 이곳에 약 3백 명의 선교사가 파견돼 있다. 지금은 고려인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회교인 상대로 파고 들어가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대우는 1994년 1월 대우 알렘이라는 자동차 판매회사를 합작투자(대우지분 51%,
1백만 달러 투자)로 설립했고, 4월엔 5백만 달러를 투자(지분 80%)하여 대코(DAECO)라는 年産 10만대의 컬러 TV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별도의 대우지사도 있다. 在알마타 대우그룹 직원은 모두 8명. 대우 알렘 자동차 판매회사는 김도근(金道根)이사(52)가 사장으로 있다.
한국인 직원은 金이사와 과장 등 2명이고 현지인은 40명.
대우는 신차 시장에서는 현재 점유율이 30%로서 1위.
일본차(10%)를 누르고 있다. 중고차 시장은 신차 시장의 열 배나 되는 年판매 5만대 수준이다. 金이사는 지난 2년 반 동안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내전중인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을 수도 없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 동안 4천2백 대(약 5천만 달러어치)를 팔았는데
{2만 대만 깔아 놓으면 판매사업이 저절로 굴러갈 수 있다}고 했다. 金이사는 {카자흐스탄이 최근 러시아 동쪽 관세동맹을 맺어 무관세로 러시아
자동차를 수입하고 우리는 최고 60%까지 물어야 하니 경쟁이 어렵게 되었다}고 했다.
대코 TV 공장(사장은 정탁상(鄭卓相)
이사·50)은 국내 시장점유율 1위이다. 지난해 2천만 달러, 올해는 年産 20만대 체제로 증설, 5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릴 계획이다. 그러나
현지서 부품 생산이 거의 안돼 부품을 한국에서 가져오는 데 따른 물류비용이 많이 들고 있어 채산성은 좋지 않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
횡단철도-카자흐스탄의 TSR(Trans Siberia Railroad) 대신에 중국 동해안의 연훈항-우루무치-알마타의 TCR(Trans
China Railroad)을 이용하는 방법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항구가 없는 중앙아시아에 비단 길이란 무역로가 발전했던 것은 어쩌면 필요의
산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극동과 유럽을 잇는 수송로의 최단 거리상에 위치하여 새삼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사상이란 아편
알마타에서 고생하는 大宇사람들은
{사상은 무섭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가장 무서운 힘은 인간에게서 주인의식을 뿌리 뽑아버리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내 운명의
주인공은 나]라는 주체성은 사라지고 당(黨)이나 정부나 상사에게 판단과 결정기능을 맡겨버리고 거기에 따라가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형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이런 중독성 앞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독일인들도 별 수 없었다는 것이 동독(東獨)에서 증명되었다.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는 독일系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2년 前 리비아에서 東亞건설이 맡아서 하고 있는 大水路 공사현장을 찾아가 한국인 관리자들에게 고용된
건설 노동자들의 질을 평가해 보라고 했었다.
① 타일랜드 ② 필리핀 ③ 방글라데시 ④ 월남 ⑤ 조선족 근로자 순서였다. 이 순서는
민족적 자질의 순서가 아니라 자본주와 사회주의 체제의 순서라는 것은 상위 3개국은 자본주의, 하위 2개국은 사회주의인데다가 부지런하기로 유명한
한민족이 게으르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핀리핀人보다도 낮은 점수를 받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鄭卓相 이사는 이런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한 번은 한국에서 컨테이너 화물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와서 러시아 직원을 역으로 보냈습니다. 이 친구가 갔다가 와서 보고하기를
[도착을 확인했다]고 해요. 화물의 내용에 대해서 물었더니 모르겠다는 겁니다. 내가 막 화를 냈더니 [지시하실 때 도착 여부만 알아오라고 하셨지
않아요]라고 되레 원망을 해요. 다시 보냈더니 화물의 내용에 대해서만 알아오고 관세가 얼마인지, 찾는 데 무슨 서류가 필요한지도 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일을 시킬 때 일일이 세부적으로 구체적인 지시를 하게 되었는데 시키는 대로는 곧잘 하는데 참
피곤해요}
게으른 이기주의자
자신에 대한 주체성의 상실은
내 것만 소중히 여기고 회사의 것, 국가의 것은 가볍게 생각하는 이기주의를 필연적으로 결과한다. [게으른 이기주의자]로 되는 것이다. 大宇전자
공장 시설을 처음에 인수했을 때 먼지와 때가 좀 과장하면 10cm쯤 쌓여 있었다고 한다. 자기 집안은 깨끗하게 유지하지만 문밖은 공중변소 취급을
한다. 어느 합작회사의 한국인 경영자는
{내 차 운전사가 너무 자주 기름 살 돈을 달라고 하기에 운행일지를 쓰도록 하여 점검을
해갔더니 기름 청구량이 반으로 줄었어요. 회사 차 운전자들 중에는 기름 깡통을 트렁크에 싣고 다니면서 빼돌리는 사람이 많아요. 이런 식으로 남의
것을 축내니 사회주의 체제가 견디겠습니까}
[게으른 이기주의자]도 경쟁상태에 놓이면 생존을 위해 달라져야 하며, 달라지는 게
보통이다. 인간이 외부의 자극이 아닌 자신의 양식에만 근거하여 행동하게 되면 십중팔구는 나태로 가버린다. 사회주의 체제엔 이 경쟁도 없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정해진 봉급을 받고 당과 국가가 관리를 해준다. 잘해보겠다고 나서다가는 우선 동료들의 질시를 받는다. 작업 할당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어느 농업 기술자가 1980년대에 {집단농장을 개인농化 하는 것만이 식량난을 해결하는 길이다}고 개혁안을
냈다. 여기에 반대한 것은 집단농장의 관리층이었다고 한다. 북한 집단농장에선 人力의 45%쯤이 농사일을 하지 않고 농부를 감독하는
행정·관리직인데 이들은 개인농화 할 경우 일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너무나 뻔한 해결책에 대해서도 저항했다. 大宇측에서는 휴일
근무수당이나 초과 근로수당을 이용하여 종업원들의 근로의욕을 유인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도 [돈보다는 쉬는 쪽]을 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상품경제가 의욕 불러
카자흐 사람들에게 경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 것은 시장과 상품이었다고 한다. 비록 GNP는 계속 축소되고 있으나 백화점과 시장에 등장하는 상품(거의가 수입품이지만)은
풍부해지고 질도 좋아졌다. 大宇자동차 현지 판매법인 사장인 金道根 이사는 {처음 부임했을 때인 1993년엔 돈은 있어도 물건이 없어 못 샀는데
요즘은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이 못 사는 형편이 되었다}고 말했다. 시장기능이 활성화되자 비로소 카자흐 사람들은 돈의 중요성을 체감하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면 좋은 자동차와 화장품을 살 수 있고, 게으른 사람보다는 더 큰 아파트를 가길 수 있다는 실감이 확산되면서 근로의욕이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실업자가 많이 생기면서 [일하지 않으면 굶게 된다]는, 사회주의에선 있을 수 없는 자본주의의 비정한 맛을
보게 되면서 태도가 바뀌고 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대규모 중화학공장 등 국영기업체의 민영화를 계속 진행시키고 있다.
삼성(三星)은 구리광산, 최근 독일 회사는 카자흐內 전화사업의 운영권을 맡았다. 많은 국영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가동률이 0에 접근중이며
종업원들이 몇 달째 봉급을 못 받고 있다. 大宇의 金道根 이사는 {차라리 경제가 더 내려 않아 바닥까지 가서 카자흐 사람들의 의식 속에 박힌
사회주의의 뿌리를 뽑아 다시 시작하는 게 낫겠다}고 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실업자들 속에서 미래의 기업인과 부자들이 나타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패 확산
사회주의→자본주의로의 어려운
이행과정에서 부패가 전면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어느 한국인 상사맨은 {우리는 물건을 살 때 깎는 데 신경을 쓰지만 여기서는 비싸게 사줄 테니
얼마를 뇌물로 줄 것이냐 하는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분위기다}라고 한탄했다. 회사나 정부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회주의적 습관의
연장선상에는 회사나 정부를 이용하여 사복을 채우는 부패가 필연적으로 등장한다. 나태는 사회주의의 소극적 병폐요, 부패는 적극적 병폐인 셈이다.
여기에다가 법과 현실의 괴리가 있다. 카자흐스탄은 근대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다.
최근에 들어서야 변호사·판사 시험제도가
도입되었다. 그 전에는 法大 졸업생이 바로 변호사가 되고 판사가 되었다. 이런 판에서도 외국의 좋은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자동차 바퀴
시험장비도 없는데 합격증을 받아야 수입허가를 내주는 식이다. 이런 형편에서는 法을 운용하는 사람의 재량권이 커지고 법의 적용을 받는 이들은
모두가 위법자가 된 형편에서 부패는 구조화된다.
공무원들이 요구하는 뇌물의 수준도 GNP 수준에 비해서는 너무 심할 정도라고
한다. 이런 나라에서 일하는 외국기업들은 자본주의를 가르쳐주는 교육기관 역할을 하고 있다. 외국회사에서 일하는 카자흐 사람들이 가장 먼저 적극적
인간형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얘기다. 金道根, 鄭卓相 이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국민학교 교사나 군대 내무반장의 체험담을 연상시킨다.
철없는 코흘리개를 학생으로, 버릇없는 젊은이를 군인으로 단련해 가는 교사와 내무반장은 숙명적으로 악역(惡役)을 자임(自任)할 수밖에 없다.
악역을 맡은 사람은 위악(僞惡)을 행해야 한다. 위악(僞亞)이란 사람을 만들기 위해 아들을 매질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위선(僞善)은 당대에 인기를, 후대엔 경멸을 받는다. 아르헨티나를 망친 페론이 그러했고, 오늘날 한국 정치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僞惡은 당대에는 비난을, 후대에선 존경을 받게 된다. 朴正熙의 경우이다. 카자흐스탄 사람들도 한 세대쯤 지나면 자신들을 들볶던 金이사,
鄭이사 같은 이들에게 고마워할지도 모른다.
중간관리층의 수구적(守舊的)
태도
러시아 및 카자흐族 사람들의 장점도 많다. 우선 이들은 리더에 대한 습관적 복종심이 강하다. 金道根 이사는
현지인 직원에게 수염을 기르지 말라고 현지인 출신 간부를 통해 지시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간부는 {그런 것은 프라이버시의 침해가 아닌가
차마 내 입으로 그런 지시를 전달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그래도 金이사가 강하게 지시하니 결국은 수염을 깎더란 것이다.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지도자에의 순응이란 공산주의 시대의 전통을 잘 活用할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식 직업윤리를 심어주는 전환이 의외로 쉽게 이루어질지 모른다. 그러려면
단점을 죽이는 게 아니라(그렇게 하면 장점도 같이 죽는 게 보통이다) 단점을 장점으로 변환시키는 위대한 리더십이 등장해야 한다. 朴正熙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한국인의 질투심을 오히려 살려서 {사촌이 논을 사면 나는 아파트를 사겠다}는 식의 건설적인 오기로 변환시켰다. 大宇전자
현지법인 대표인 鄭卓相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동안 우리가 몰아세웠던 덕택에 카자흐 사람들의 노동 능률은 우리 노동자의 약
80% 수준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지도부의 경제발전 의욕도 대단합니다. 문제는 그 중간층입니다. 국가기관과
기업의 행정·관리직에 속하는 이들이 펜대를 돌리면서 책임회피·변명·무사안일·권력남용의 구태(舊態)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국가, 어느 시대이든 생활인은 현실과 뒤엉켜 살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활력을 유지한다. 문제는
그런 현실을 떠나 관념·권력·철학 같은 것을 추구하는 지식인과 엘리트층(層)의 리더십인 것이다.
{징기스칸에 대한 과장}
5월31일 오전 카자흐스탄 과학원 소속 동방연구소를 방문했다.
소장인 역사학자 E·Z·카지벡 박사, 부소장인 역사학자 메두네르트 아부세이토바 박사, 고고학자인 아키세브 박사를 만나 세 시간 동안 小세미나를
가졌다. 신설된 한국학부 부장인 고려인 김 게르만 박사가 통역을 해주었다. 세 카자흐스탄 학자는 투르크족과 몽골족이 언어학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2천년 전, 즉 기원전후라고 말했다. 몽골族의 한반도 이주에 대해서는 4천년 전에 시작돼 2천년 전까지 계속되었으며,
2천년 전에 이동인구가 최고조에 달했다고 하여 몽골학자들과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투르크族은 분파가 40개, 더 세밀하면 1천 개로 불어나는데
흉노로부터 오스만 터키까지 30여 개의 국가가 건설한 위대한 종족입니다}
메두네르트 아부세이도바 부소장은 {징기스칸에 대한 과장된
악선전은 주로 제정러시아 학자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다}고 열을 내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징기스칸은 결코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파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과장은 러시아人들이 적은 기록 때문인데 요사이 발굴되는 기록에는 다른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징기스칸의 원정이 있은 직후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가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됐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실크로드도 징기스칸 이후에
아주 안전하게 돼 동서간의 교역이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하게 되었지요』
중동 및 지중해 문명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투르크族의
西進에 대하여 소장 아부세이토바 박사는 {카자흐스탄 남쪽, 즉 지금 이 알마타 근방에 살던 투르크系 오구스族이 서기 10∼11세기부터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세계사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투르크族이 西進하면서 이란, 이집트, 東로마 비잔틴 제국지역(지금의 흑해 남쪽), 팔레스타인
지역을 석권하고 셀주크투르크, 맘루크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을 연달아 건설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우선 왜 이 투르크族은 몽골이나 西域(지금의
중국 신강)등 동쪽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던가.
아부세이토바 부소장은 {동쪽에는 투르크와 친한 몽골族 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래서 서쪽의 이란人등 백인들의 농경 정착 사회를 점령하면서 서정(西征)을 하게 되었다. 대제국을 잇따라 건설한 투르크族의 집단은
기본적으로 군사조직(기마군단)이기 때문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경선주민(先主民)을 정복하고 마치 여러 국가를 잇따라 탈취하듯이 이동을
계속해갔다는 것이다. 유럽 학자들은 요사이의 국가개념을 가지고 이 투르크族의 조직을 후진, 또는 야만적인 것으로 비판하지만, 당시의 서구
국가조직보다 오히려 뛰어난 면이 많았다고 부소장은 지적했다.
{이 투르크 지배층은 군사·정치·경제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아주
기동성 있고 능률적인 집단일 뿐 아니라 징기스칸 이후엔 그가 반포한 법률인 [야싸]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이 야싸는 지금까지도
카자흐스탄의 생활 규범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징기스칸의 군대는 소수의 몽골인과 다수의 투르크族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군대 조직은 관료주의
폐해가 거의 없는, 상하간의 인화(人和)와 단결이 잘 돼 있는, 능률이 아주 높은 군대였습니다. 여기에다가 유목민 특유의 기마전술을 구사함으로써
농경민족 국가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징기스칸의 법률 [야싸]에 나타난 타 종교에 대한 기본 철학은 존경과 자유였습니다. 즉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존경해야 내가 믿고 있는 종교의 자유도 얻을 수 있다는, 아주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부소장은 또
이렇게 말했다.
{공산당 시절에는 징기스칸에 대해서 나쁘게 설명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도 일부 국민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징기스칸을 제대로 평가하는 방향으로 교과서를 바꿔가고 있습니다}
징기스칸 원정군이 1219년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넘어오자, 이곳에 살던 키프차크族 사이에서는 이견이 생겼다고 한다. 키프차크族에서 몽골어를 쓰는 부족은 징기스칸 군대에게 협조했고,
투르크語를 쓰는 종족은 징기스칸에 대항했다. 몽골族이 주력을 이룬 것이 징기스칸 군대였으므로 아무래도 피는 진한 쪽으로 따라 갔던 모양이다.
이것은 또 언어가 민족문제에서 가치판단을 좌우한다는 점을 엿보게 한다.
키마크族은
예맥族
한반도와 카자흐스탄의 관련성에 대하여 아키세브 박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 카자흐스탄 동쪽에
살고 있는 키마크族은 기원 전후, 즉 2천년 전쯤에 한반도의 북쪽(만주)에 살고 있던 예맥족이 이동한 것이라고 했다. 예맥(濊貊)은 나중에
부여·고구려·동예·옥저 등의 부족으로 갈라져 한민족 형성의 뿌리가 되었다. 예맥족의 제1파는 한반도로, 제2파는 몽골의 예니세이江으로, 제3파는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주장이다. 아랍인이 쓴 문서에 따르면 서기 7세기에 벌써 키마크民族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이들은 15세기까지도
몽골語를 썼다는 것이다. 그 뒤로는 이 부족이 투르크語를 사용하면서 투르크化돼 갔다고 한다. 아키세브 박사는 또 카자흐스탄 남부지방에서 발굴된
서기 11세기의 유적에서 온돌이 발견되었다면서 이것도 한민족系의 유입과 관련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키마크族이 과연 한국人의
뿌리인 예맥族에서 분파된 것인지는 앞으로 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키마크族은 10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中東을
휩쓸고 다녔던 일종의 프로 기마군단인 키프차크族과도 같은 뿌리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키프차크族은 1091년에 헝가리, 1092년에 폴란드,
1093년엔 지금의 터키지방인 비잔틴제국, 1094년엔 키예프에 나타나 약탈을 감행하였다. 키프차크族은 아들을 용병으로 팔기도 했다. 이집트의
아유비王朝는 키프차크族등 투르크族 용병을 사들여 강력한 전사집단을 육성했다. 1250년에 용병장군 아이백이 쿠데타를 일으켜 맘루크王朝를 세운다.
지배층은 대부분 카자흐스탄 초원에서 팔려온 키프차크族이었다. 이들은 1260년에는 시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몽골군을 전멸시키고 대장 키트 부카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몽골군은 페르시아로 후퇴했다. 몽골軍은 이때 본국의 내분 때문에 반격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것은 몽골軍이
당한 유일한 패배였다. 같은 기마민족끼리의 대결이었으므로 몽골전법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 학자에게 {카자흐스탄 사람들도 한국인에게
친근감을 느끼느냐}고 물었더니 카지벡 소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카자흐스탄에 사는 여러 민족 중에서 카자흐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고
닮으려고 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소장은 또 {고려인과 다른 소수민족의 차이는 고려인은 이곳을 고향으로 여겨 정착하려는 데 반해 독일系등 다른
사람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점이다}라고 했다. 그런 고려인들은 한국으로 귀화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은 중국 조선족과는 크게
달라보였다. 조선족이 중국인에 대해 느끼는 감정보다 고려인이 카자흐人에게 느끼는 감정이 더 좋은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몽골族과
漢族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