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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안(西安)-진시황(秦始皇)의 꿈 답답한 농경사회 5월25일 오전 9시25분 우루무치 공항 이륙. 서안(西安)까지의 비행은 오른쪽으로는 눈덮인 天山산맥, 왼쪽으로는 회색빛 타클라마칸 사막, 그 사이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1시간30분을 달려도 사막 상공이었다. 사하라 사막에 이어 세계 제2의 넓이를 가진 사막이다. 유입수로(流入水路)의 고갈, 또는 변화 탓인지 옛날에는 호수였던 곳이 바닥이 드러난 채 사막이 돼 버린 곳도 보였다. 우루무치에서 西安(漢唐시대엔 長安)까지의 이 거친 땅에 난 길을 [비단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상당한 시인적(詩人的) 감각이다. 비단 길의 출발점인 西安공항에 내려 시내로 들어오는 한 시간의 드라이브는, 잠시 신강의 유목·오아시스 文化에 젖었던 우리로서는 농경사회로의 복귀였다. 우루무치와 天山산맥에서 느꼈던 이국적이고 개방적이며 발랄했던 분위기는 정체된 듯 가라앉아 있는 西安 교외의 농경사회 분위기와 대조적이었다. 馬上의 草原 戰士들은 이런 농경사회의 삶을 경멸하고, 다만 약탈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안내인 박용길(朴勇吉)씨(24)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흑룡강성 출신의 조선족 청년이었다. 고향을 떠나 西安의 여행사에 취직한 지 여섯 달이라고 했다. 西安시내로 들어오는 고속화도로 왼쪽으로 산 같은 무덤이 나타났다. 朴씨는 {서안 근방에는 73명의 황제가 묻혀 있는데 무덤은 72기(基)랍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라고 했다. {당 고종(高宗)과 그의 부인이자 중국 최초·최후의 여자 황제였던 칙천무후(則天武后)를 합장했기 때문이에요. 저 무덤은 한무제(漢武帝)의 무덤입니다} 漢武帝와 西域 한무제(漢武帝)는 무서운 황제였다. 前漢 5代 황제인 그는 기원전 157년에 태어?70세를 살았는데 황제로서 재위(在位)기간이 54년이나 되었다. 이 기간에 흉노를 격파하고 서역(신강)을 개척하여 실크로드를 개통시켰다. 서쪽으로 쫓겨난 흉노는 4백년 뒤 홀연히 유럽에 나타나 게르만族을 서쪽으로 밀어내고, 이 게르만族의 이동이 西로마제국의 붕괴를 유발하였다. 武帝에 의해 궁형(宮刑)(거세하는 벌)을 당한 사관(史官) 사마천(司馬遷)은 고통의 나날들 속에서 과거의 인간들 이야기를 미래의 우리를 향해 남긴 위대한 기록 사기(史記)를 썼다.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 업적을 많이 남긴 漢武帝는 위(位)에 오르자마자 전례에 따라 자신의 무덤을 짓기 시작했다. 53년간 매년 국민 납세액의 3분의 1을 무덤 건조 및 부장품(副葬品) 매입에 썼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무덤은 높이 46.5㎞, 4각형인 밑 부분의 둘레는 약 1㎞이다. 원래는 능묘(陵墓) 주변에 성을 쌓아 도시를 만들어 고관들을 살게 했는데 그 인구가 27만 명에 이르고, 능을 관리하는 인원은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덤은 나중에 약탈되고 도굴되었다. 이 무덤에서 1㎞쯤 떨어진 곳에 武帝가 총애했던 청년장군 藿去病(곽거병)의 무덤이 있다. 24세에 요절한 藿去病은 무제의 황후(皇后)의 남자 동생으로서 18세에 장군이 되어 북방의 흉노(匈奴)를 격파, 서역으로 통하는 회랑을 안전하게 확보, 무역로를 열었던 인물이다. 그가 죽자 무제는 황제의 무덤을 방불케 하는 큰 무덤을 만들게 했다. 변방에 살고 있던 흉노人들을 소집하여 검은 갑옷을 입게 한 뒤 藿去病의 관을 장안에서 이곳까지 호송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무덤 주위를 지키고 있었던 기괴한 짐승 모습의 석상(石像)들은 무릉(茂陵)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흉노를 짓밟고 있는 말] 등 이들 조각품은 기발하면서도 생동하는 모습으로서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예술품이다. 팽창하던 漢제국의 힘과 국민들의 야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大宇의 기마군단식 戰法! 이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박재석(朴在錫) 과장으로부터 大宇의 기업文化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기자는 몽골 유목민의 전략적 시각에서 朴과장의 설명을 듣고, 분석해 보았는데 재미있는 일치점들이 많았다. ▲기동성이 가장 높은 기업이 大宇라고 한다. 의사결정이 빠르고 관료적 제약이 약해 속전속결식으로 행동에 옮겨진다는 것이다. 대리부터 회장까지 전결 범위가 넓어 일은 벌이고 보자는 풍토란다. {뛰면서 생각해야지 생각한 뒤 뛰면 늦다}는 주의(主義)다. 이런 풍토는 大宇가 60∼70년代에 무역회사를 모태로 하여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역은 세계를 무대로 삼아 유목민처럼 여기 저기 옮겨다니면서 신속하게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므로 타이밍이 중요하다. 유목 기마민족의 전략이나 大宇의 상술이나 시간과 기동성을 가장 중요시한다는 점에선 일치한다. ▲大宇의 업무방식은 박종환(朴鍾煥)식 축구와 닮은 공격 위주이다. {공만 잡으면 하프라인을 넘는다}는 식으로 골키퍼만 남겨두고 전원이 공격에 가담하는 식이다. 역공을 당하면 수비에 구멍이 생겨 혼이 나지만 그래도 공격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大宇사람들은 일상적 업무나 내근을 싫어하는 이들이 유달리 많고, 모험적 기질을 높이 사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기마군단의 전법과 일치한다. 기마군단은 공격하는 군대이지 성벽 뒤에서 수비하는 군대가 아니다. 전원 공격은 농경사회의 보병중심 군대의 개념에는 없다. 대우는 보급부대와 전투부대, 즉 후방과 일선을 가르는 농경군대 방식이 아니라 조직이 일선 중심으로 되어 있어 생산성과 기동성이 극대화 될 수 있는 조직형태라고 한다. 다국적軍의 장점 ▲大宇는 다국적軍과 비슷한 조직이다. 22개 계열사 중 반 정도가 인수, 또는 합병에 의하여 大宇 소속이 되었으므로 기업文化가 다른 다양한 조직이 되었다. 이런 다양성이 위화감이 되어 1980년대에는 노사분규로 시끄러웠다. 1990년대에 들어 조용해진 것은 여러 기업 문화가 하나의 질서 속에서 공존하는 법을 배워 이질감이 아닌 다양성으로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김우중(金宇中) 회장은 8人의 회장을 중심으로 하여 업무를 맡겨, 일종의 연방제처럼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학연, 지연별 파벌도 별로 없다고 한다. 유목민족은 전투(기업의 인수·합병에 해당)는 잔인하게 하지만 종교적 차별과 탄압은 하지 않았다. 북방 초원에서 다양한 민족과 싸우고 화해·정복·동화되는 과정에서 개방과 관용의 미덕을 배운 것도 그들이었다. ▲金宇中 회장은 1995년에 2백일을, 올해는 5월말 현재 넉 달을 해외에서 보냈다고 한다. [세계경연]이란 구호를 내걸고 大宇가 본격적으로 해외기지 건설에 착수한 지 4년, 현재 고용인원은 국내가 10만, 해외가 10만 명, 2년 내로 매출액도 국내와 해외 부문이 대등해질 것이라고 한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외에 흩어져 있는 현지법인을 통합관리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로마, 영국 같은 식민지 종주국가의 관리방식 뿐 아니라 징기스칸 몽골제국의 관리방식도 하나의 시사점을 줄 것이다. 몽골은 제국의 판도가 넓어지면서 군대는 다국적군으로, 현지 식민지 통치는 배후조종식으로 했다고 한다. 다국적군의 장교단과 식민지국가의 지휘부는 몽골족이 차지하고 그 이하의 기층人力은 다양한 출신으로 구성하여 소수의 인력으로 다수를 통치했다고 한다. 해외 건설현장을 몇 군데 다녀본 기자의 소감은 우리 민족도 징기스칸의 몽골제국처럼 소수의 人力으로써 다양한 국적의 다수 인력을 관리하는 장악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군대 경험이 좋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작업 현장을 군대조직처럼 관리, 외국인이 한국어로 {충성!} {안전!}을 외치며 거수 경례를 하도록 훈련시켜 놓고 있었다. 유목文化와 해양文化는 공통점이 많다. 해양국가가 무역과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중심세력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지만, 징기스칸의 몽골제국도 내부적으로는 칸(황제나 王에 해당하는 최고 지도자)의 직접 선출 등 여러 가지로 민주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유목, 해양 문화는 또 무역을 존중·보호했다. 상업이란 것은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인간활동이므로 교조화, 관념화와 같은 경직된 경향성과는 대치된다. 농업위주의 前근대사회에서는 상업이 합리성을 키우는 유일한 기반이 돼 왔었다. 반대로 朱子學이란 관념철학을 종교화한 조선시대에는 士農工商이라하여 실리를 추구하는 상업을 가장 경멸스러운 직업으로 놓았다. 근대적 합리성의 씨앗(상업)이 자라지 못했으니 근대화를 내재적(內在的) 사상과 힘으로 해 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 우리는 해양문화권에 편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유목적=상업적 기질을 회복하여 세계를 초원으로 보고 기업을 말로 삼아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진시황릉(秦始皇陵) 유목민적 기질과 비슷한 기업文化를 가진 大宇가 유라시아 대륙을 8백년 전에 먼저 관통했던 징기스칸의 길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5월26일 오전에는 서안에서 동쪽으로 80㎞쯤 떨어진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구경했다. 세계 8大 불가사의가 되었다는 병마용은 농경사회에 바탕을 둔 중국식 전제정치의 힘과 잔혹함을 상징한다. 진시황(秦始皇)은 생전에 70만 명의 노동력을 투입하여 아방궁과 자신의 무덤 여산릉(驪山陵)을 건설했다. 진시황릉의 규모는 높이 1백15m(지금은 풍화돼 45m로 낮아져 있다), 능의 둘레 2.5㎞, 그 주변에 여러 건물이 숲을 이루었다. 이 부속건물군(群)까지 포함한 능원(陵園)은 한 변이 7.5㎞로서 총면적은 큰 도시와 같은 56㎢였다고 한다. 진시황릉의 비탈면은 석류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을 정도로 황량했다. 봉분의 地下에 진시황이 건설한 궁전은 도굴도 발굴도 면한 채 2천2백년간 잠들어 있다. 청동을 녹여 부어 땅바닥을 굳힌 뒤 수백m 깊이의 지하궁전을 만들고 거기에 진시황이 사후(死後)에도 지하에서 통치할 수 있도록 수많은 시설과 신하들의 조각상을 설치했다고 기록돼 있다. 도굴에 대비하여 침입자에게 쏟아 부을 화살과 함정, 수은의 江도 설치돼 있다고 한다. 현존 발굴기술로서는 이 지하궁전을 손댈 수가 없어 후대의 작업감으로 방치하고 있다. 병마용(病魔俑) 진시황릉 동쪽 1.2㎞에 위치한 병마용(兵馬俑)은 1974년에 한 농민에 의하여 우연히 발굴된 것이다. 진시황릉을 호위하는 1개사단 규모의 병사·전차·軍馬가 진형(陣型)을 갖추고 무기를 들고 말을 탄 채 실물 크기의 조소상(彫塑像) 모습으로 파묻혀 있었다. 이들은 원래 큰 건물 속에 들어 있었다가 진시황의 死後 내란이 일어났을 때 불에 탔고 방치된 뒤 땅속에 묻혀 버린 것이다. 시커멓게 불에 타 흙 속에 파묻힌 서까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약 7천 坪의 면적에 3개의 陣(左·右軍과 지휘부)이 있었고 고대의 포진법에 따른 병력의 배치가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천하를 통일했던 秦나라 군대의 부활이며, 당시의 병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자료이다. 발굴된 군인들의 얼굴은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다. 그 표정은 한결같이 위풍당당하다. 북방 草原의 흉노 기마민족과 맞서 만리장성을 쌓은 秦始皇의 신임을 받을 만한 힘과 기개를 느끼게 해준다. 실물 크기대로 만들어진 말은 높이 1.54m, 길이 2m인데, 기자가 天山산맥에서 탔던 말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것은 황하의 서쪽, 즉 西域지방에서 나는 말이라 하여 하서마(河西馬)라고 했다. 군마용(軍馬用)으로서는 최고의 능력을 가졌다고 사서(史書)에 적혀 있다. 콧구멍이 큰 것은 폐활량이 커 멀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 조랑말과 흡사한 이 말은 몽골馬로서 신강, 몽골, 카자흐스탄 지방에서 볼 수 있었다. 속력은 아랍말에 뒤떨어지지만 지구력과 운반능력이 뛰어나 기마군단의 실전용으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西安에서 구한 秦始皇 관련책자는 진시황에 대해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중국을 통일한 뒤 노예제도를 타파하고 법률과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한 것은 역사를 진전시킨 것이며 이에 반대한 수구세력인 유생(儒生)들을 파묻고 책을 불태운 것은 개혁작업의 불가피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한국 관광객은 교양이 부족} 5월26일 오후 4시30분에 西安을 떠난 중국민항(中國民航) 보잉 767은 1시간40분만에 북경에 도착했다. 1년5개월만에 다시 찾은 북경은 또 달라져 있었다. 도시는 더 높게 올라가고, 더 깨끗해져 있었다. 조선족 출신 중국 국적의 안내인은 경북 안동 출신 집안의 27세 청년이었다. 요녕성에서 북경으로 와서 月11만원 짜리 방 한 칸 아파트를 빌어 독신생활을 하면서 여행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아주 예절이 바르고 얌전하게 보이는 그는 한국인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일본 관광객에 비교해서 가이드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다르더군요. 가이드가 설명을 잘못한 경우, 일본인들은 끝까지 들은 뒤 조용히 따로 불러 물어보는데, 한국인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중단시키고 창피를 줍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가이드에 대한 손님들의 신뢰가 떨어져 여행이 참 어렵게 됩니다. 한국인들은 사람 차별을 하는 것 같아요.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아요. 저희들을 거지 취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자는 안내인에게 {물론 그런 한국인도 있겠지만 조선족의 경우에도 얼굴도 같고 말도 같은 한국인에게 동족이라고 너무 기대하고, 때로는 맞먹으려 하여 기분을 나쁘게 하는 이들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해주었다. 안내인은 {그래도 자존심이 상해서…}란 말을 계속했다. 하여튼 한국인에게서 이 자존심을 빼면 무엇이 남을지? 이 자존심으로 해서 경제가 발전하고, 이 자존심으로 해서 마음도 상하고, 이 자존심으로 해서 열등감과 자만심이 자라나고…. 밤늦게 캠핀스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6∼7세쯤 돼 보이는 눈 먼 소년을 안고 있는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10元짜리(1천원에 해당)를 주었다. 이걸 시작으로 하여 어둠 속에서 거지아이들이 하나씩 나타나 돈을 받아 갔다. 2∼5원씩 주다가 다섯번째 꼬마에게 10원짜리를 주었다. 이걸 본 다른 꼬마는 갑자기 달려오더니 내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나도 10원을 달라}는 뜻으로 엉겨 붙었다. 길을 건너는 데 엉엉 소리 내 울면서 따라 왔다. {사람은 가난은 견디지만 불공평은 못 견딘다}는 중국 선현의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통일기에 우리 민족이 당면할 최대 과제도 결국은 불공평과 자존심이란 말이 될 것이다. ◎ 鄭鍾旭 대사 인터뷰 정종욱(鄭鍾旭) 駐 中國 대사는 {지난 4년간의 한국-중국 협력관계는 [연간 무역 규모 1백70억 달러, 연간 여행인구 50만(한국→중국이 40여 만, 중국→한국이 약8만), 한국기업의 중국內 투자 20억 달러]의 단계에까지 왔으나 요즈음은 냉각기에 접어든 느낌이다}고 말했다. 鄭대사는 {한국인들도 이제는 중국의 해안지방에서 내륙과 서부지역으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고 충고했다. {강택민(江澤民) 주석, 이붕(李鵬) 총리를 만나보면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이 21세기에 강대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강대국이 돼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방의 성장(省長)들도 모두가 기업체 회장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해외투자를 유치, 지방의 소득을 일으키느냐 하는 문제에 열성이 대단해요. 중국 전체가 하나의 巨大한 붐타운입니다. 지금 중국은 21세기를 향해 3大 국책사업을 추진중입니다. 양자강의 상류를 막는 삼협댐 건설, 북경-구룡반도 철도건설, 남수북인(南水北引), 즉 양자강의 물을 북쪽으로 끌어오는 일종의 대운하(大運河)공사가 그것인데 이런 프로젝트에 한국기업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참여했으면 합니다} 鄭대사는 또 {50여 개의 다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같은 처지의 미국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했다. {미국은 바다에 의해 고립돼 있으므로 자국내의 민족분쟁을 자극하는 외부세력이 없으나 중국은 사방이 외국으로 둘러싸여 있어 영토보존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최근의 대만사태가 그런 예이다}라고 했다. 鄭대사는 또 {중국의 인권문제를 자꾸 거론하는데 천안문(天安門) 사건 이후 그들도 노력하고 있으며, 아직도 이 나라의 선결문제는 기본적 생활의 보장이란 점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한-중 관계가 이렇게 밀접해졌는데도 중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를 전통적 우방, 한국과의 관계를 협력 관계로 정의 내리고 있음을 눈여겨보면서 대처해야 한다}고 했다. 기자가 북경에서 만난 상사맨과 기업인들은 거의가 {올 때보다 나갈 때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인상이 나빠진다}고 했다. 한 상사 주재원은 {중국사람들은 자신들을 상대로 하여 이익을 남기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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