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한 선지자 왕상 20:13-21

鶴山 徐 仁 2022. 1. 19. 21:04

한 선지자 왕상 20:13-21

 
 
01월 19일 (수)
   
한 선지자 왕상 20:13-21


13.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14.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15. 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
16. 그들이 정오에 나가니 벤하닷은 장막에서 돕는 왕 삼십이 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중이라
17. 각 지방의 고관의 청년들이 먼저 나갔더라 벤하닷이 정탐꾼을 보냈더니 그들이 보고하여 이르되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 나오더이다 하매
18. 그가 이르되 화친하러 나올지라도 사로잡고 싸우러 나올지라도 사로잡으라 하니라
19.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20.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21.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13절).
이 선지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아합에 대한 엘리야의 예언은 언제나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인데, 이것은 기쁨과 승리의 예언 아닙니까? 따라서 이 선자자는 당시의 한 무명의 선지자 생도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엘리야의 투쟁과 아합의 범죄를 고발하던 지금까지의 내용과는 달리 본문에서는 느닷없이 아합의 승리를 예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합이 비록 심판 받아 마땅한 왕임에도 하나님이 당신의 크신 권능을 드러내심으로써 오직 여호와만이 절망의 날에 구원이 되심과(시 9:9), 모든 축복과 은혜의 근원이 되심을 계시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으셨던 것으로 이해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영원하신 언약을 상기시키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8:9, 삿 2:1, 대상 11:3, 대하 23:16).


물론 아합은 이후에도 하나님의 그 은총 앞에서 감격하여 회개하기는커녕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의 한갓 위기 극복의 한 수단 정도로 간주할 뿐입니다. 아합이 결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면치 못한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 였습니다(22:29-40). 


<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15절). 
이 대목은 당시 이스라엘 군대의 병력 규모를 알림으로써 더욱 그 전쟁의 승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소수의 병력으로 그처럼 대군을 격파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그렇지 않습니까? 
불과 7,232명의 이스라엘 군대가 최소한 10만 이상이었던 아람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패배를 안겼으니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느니라>(삼상 14:6)고 한 말씀 그대로 아닙니까? 


<...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벙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20-21절).
 
-오늘 본문과 창세기 14:14-16, 사사기 7:16-22 말씀을 비교해보십시오.
-벤하닷의 자만심이 잘 드러난 18절 말씀을 읽고 당신의 느낌과 소감을 적어보십시오.
-벤하닷 군대에 대한 기적 같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이 끝내 돌이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 무명의 한 선지자의 예언대로 만 명도 안 되는 이스라엘 군대가 10만도 넘는 아람의 벤하닷 군대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뒀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신 기적이었습니다. 
대군을 믿고 오만하고 교만하게 굴며 은금과 아합의 아내들이며 자식까지도 다 내게 넘기라며 협박하던 벤하닷이 도망쳤다고 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삼상 17:47)이라는 말씀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하신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고전(古典) 중의 고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
만큼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의
미한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급격히 달
라졌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삶의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삶과 죽음, 사랑,
증오, 선과 악, 쾌락, 고통, 도덕,공동체 등이 그렇다.”


사이토 다카시 저(著) 김효진 역(譯)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
는다》(걷는 나무, 16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고전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랫동안 살아남은 책을 의미합니다.
《용비어천가》의 첫 부분에 이러한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일새 꽃 좋고 여름(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마를새 내에 이러 바랄(바다)에 가느니”
모든 나무가 다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샘물이 다 바다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옛날의 문학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고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가뭄을 견뎌낼 만한 깊은 뜻을 지닌 작품, 즉
개성이나 시대성이나 지역성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것이 고전이 됩니다.
삶과 죽음, 사랑, 증오, 선과 악, 쾌락, 고통, 도덕,공동체 등이 고전
속에 있는 인간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그런 인문 고전이 아무리 인간의 본질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할지라도
만물의 시작과 마지막, 천국과 지옥 그리고 죄 용서에 대한 해답을 주
지는 못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답을 줍니다. 고전보다 더 깊은 고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
니라.” (딤후3:15)
   
역대하 27장 6절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Jotham grew powerful because he walked steadfastly before the LORD his God.
2 Chronicles 27:8 [NIV]
   
계시
하나님의 큰 이야기를 전해 듣는 어려움과 고뇌 때문에 열린 하박국의 영혼은 이제 무엇이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기를 갈망했다. 결국 하나님은 경청하기 위해 열린 목마른 영혼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박국이 들은 말씀은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운행 원리를 간추려 들려주었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계시했다.
-래리 크랩의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계시, 자기를 드러내심을 날마다 간구하며 살아가는 일이 말씀이 들려질 때 가능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감춰진 섭리를 바라볼 때, 진정으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삶이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