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왕 삼십이 명 왕상 20:1-12

鶴山 徐 仁 2022. 1. 18. 12:08

왕 삼십이 명 왕상 20:1-12

 
 
01월 18일 (화)
   
왕 삼십이 명 왕상 20:1-12


1.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
2. 사자들을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보내 이르기를 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3.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
4.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
5. 사신들이 다시 와서 이르되 벤하닷이 이르노라 내가 이미 네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너는 네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을 내게 넘기라 하였거니와
6. 내일 이맘때에 내가 내 신하들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하들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져가리라 한지라
7.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
8.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 한지라
9. 그러므로 왕이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왕께 말하기를 왕이 처음에 보내 종에게 구하신 것은 내가 다 그대로 하려니와 이것은 내가 할 수 없나이다 하라 하니 사자들이 돌아가서 보고하니라
10. 그 때에 벤하닷이 다시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사마리아의 부스러진 것이 나를 따르는 백성의 무리의 손에 채우기에 족할 것 같으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하매
11.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
12. 그 때에 벤하닷이 왕들과 장막에서 마시다가 이 말을 듣고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진영을 치라 하매 곧 성읍을 향하여 진영을 치니라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1절).
당시 벤하닷이 아합을 위협하며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진을 친 것은 이스라엘 침공에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앗수르와의 전투에 이스라엘을 끌어들여 연합군이 되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앗수르의 살만에셀이 아람에게는 가장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아람은 여러 개의 소규모 지역 국가로 이루어진 연합국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왕이었던 벤하닷이 주도권을 잡자 타 지역의 왕들이 벤하닷에게 조공과 병역을 바치는 군주 봉신 관계가 형성됐던 것입니다.


<사자들을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보내 이르기를 벤하닷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은금을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2-3절).
즉 벤하닷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의도였습니다.
① 그가 은금을 요구한 것은 실질적인 국력을 약화시켜 이스라엘을 완전히 굴복시키려는 조처였고 
② 아합의 아내를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의 왕권을 무력화시키고 왕실의 존엄을 상실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③ 그리고 자녀들을 요구한 것은 일종의 인질, 볼모로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4절).
물론 아합 왕의 이런 태도는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 국면을 모면하려는 전술적인 항복일 뿐  아합이 실제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 아합은 대단히 나약한 인상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그는 당시 아람의 막강한 위세에 겁을 먹고 어떻게 해서든 벤하닷과 화친을 맺으려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반면 장로들과 백성들은 강경했습니다. 
벤하닷의 첫 번째 요구에 이미 큰 분노를 느끼고 단호한 거절의 뜻을 표명한 것입니다.
 <모든 장로와 백성들이 다 왕께 아뢰되 왕은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8절).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서 인간의 진정한 교만이란 하나님과 인간 모두를 자신의 적으로 삼는 죄악아리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벤하닷을 보십시오 
결국은 그 오만함으로 인해 자신이 얕보던 이스라엘에게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습니까?
 
-아합이 아람 왕 벤하닷에게 <내 주 왕이여>(4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이해한 본문 11절 말씀의 의미를 적어보십시오. 
-벤하닷의 협박과 공갈에 대해 아합 왕은 지극히 나약하고 비굴한 모습을, 백성들과 장로들은 강경하게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어디서 온 차이일까요?
 
주님, 예상대로 아람 왕 벤하닷은 하늘을 찌를 듯한 교만으로 아합을 위협하며 <네 은금은 다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도 다 내 것이라>고 했고, 나약하고 비굴했던 아합 왕도 <내 주 왕이여 말씀하신 것 같이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로들과 백성들은 다 <벤하닷의 말을 듣지도 말고 허락하지도 마옵소서>하며 강한 저항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주님, 사탄이 저희에게 굴복을 강요할 때 저희도 아합처럼 허무하게 투항하는 일이 없도록 성령으로 지키시며 다스려주시옵소서.
 
   
그 생각이 문제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하루에 약 6만 번의 생각을 한다고.
그리고 이 중 99.9퍼센트는 어제와 똑같은 무의미한 공상이라고.
만일 당신 삶이 문제투성이라면 원인은 간단하다. 당신이 어제와 똑같은
생각을 매일 6만 번씩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이지성 저(著) 《생각하는 인문학》(차이, 12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
다.
“염소는 묶인 곳에서 풀을 뜯는다.”는 경구가 있습니다.
“새장에 갇혀 지냈던 새는 풀어놓아도 날아갈 줄 모른다”는 말도 있
습니다. 고정관념과 같은 틀에 묶여 있는 사람이 그러합니다. 새로운
변화와 자유를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즉 생각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가장 강력한 발상의 전환이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을 ‘자기
부인’이라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
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내 속에 있는 부정적인 생각과 욕망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자기 부인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 속에 진정한 역발상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짓눌러 왔던 고난의 의미를 알게 되고 부족함과 약점의 의미도 알게
됩니다. 심지어는 실패와 넘어짐의 의미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 들이면서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역대하 1장 6절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
Solomon went up to the bronze altar before the LORD in the Tent of Meeting and offered a thousand burnt offerings on it.
2 Chronicles 1:6 [NIV]

   
매력적인 삶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삶에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류와 화해하시고 인류를 회복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해되고 생동감을 느끼게 된 사람들의 삶 안에는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인 힘이 있었습니다. 삶이 생동감이 있고 자유로울 때, 자신의 소유를 나누며 원수를 사랑하고,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을 품고 살아가거나 죽어 가는 모습 속에서 그런 매력적인 힘이 발현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해 주면서 생명을 전하는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알랜 크라이더의 [초대교회에 길을 묻다] 중에서-


믿는 자의 매력적인 삶이 생명을 낳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사람들은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 있는 이웃들의 눈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말씀대로, 말씀으로 살아가려는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