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로뎀나무 아래서 왕상 19:1-8

鶴山 徐 仁 2022. 1. 11. 11:35

로뎀나무 아래서 왕상 19:1-8

 
 
01월 11일 (화)
   
로뎀나무 아래서 왕상 19:1-8


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2절).
여기서 말하는 <저 사람들>이란 앞서 엘리야와의 갈멜산 대결에서 패해 처단당한 바알 선지자 450인을 가리킵니다(18:22, 40). 따라서 이 협박과 경고에는 엘리야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이세벨의 증오심과 비장한 결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세벨의 이러한 보복 경고에 부딪친 엘리야는 결국 도피 길에 오릅니다. 그토록 위대한 이적과 권능의 종으로서의 면모를 온 백성들 앞에서 펼쳐 보였던 엘리야였지만 불과 하루 만에 이렇듯 황망하게 도피 길에 오르는 모습이야말로 아이러니한 엘리야의 인간적 한계라 여겨집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 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4절).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우고, 비를 내려 수년 간 가물었던 대지를 흠뻑 적시기도 했던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의 적나라한 인간적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게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요나도 이와 비슷한 탄원을 드리지 않았습니까(요 4:8). 따라서 그가 누구든 하나님의 권능으로 큰 기적과 역사를 이룬다 해도 항상 인간의 연약성을 생각하며 늘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아야 옳다는 말씀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5절).
엘리야는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하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땅에서 더 살도록 사자를 보내사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구운 떡과 마실 물을 공급하시며 기운을 차리게 하셨습니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8절).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는 약 350km로 당시 엘리야는 40일을 걸어 당도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산 호렙>은 과거 출애굽 때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곳이고 율법을 받았던 신성한 산 <시내>와 동일한 산입니다(출 19장). 아무튼 과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던 바로 그 거룩한 산을 지금은 엘리야가 실의에 빠져 지친 모습으로 겨우 오르고 있습니다. 
 
-이세벨이 왜 당장 처단하지 않고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 경고를 했을까요(2절)?
-<로뎀나무>(4, 5절)에 대해 아는 대로 적어보십시오.
-옛 출애굽 경로에서 <호렙산> 혹은 <시내산>을 찾아보십시오.
 
주님,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요 불의 선지자라는 엘리야도 이세벨의 공갈과 위협 앞에는 극도의 두려움을 느꼈고, 그래서 도망쳤으며 심지어는 광야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하며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엘리야도 역시 저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나약한 사람임을 드러낸 것이옵니다. 부디 저희로 하여금 더욱 겸허하게 기도하며 늘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겸손하게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발상의 전환을 하는 방법
 
“시인은 어떻게 바다가 욕을 하는 것을 알았을까요? 바로 그 자신이
바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중략). 일체화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히나
요? 일체화라는 이 엄청난 비법을 우리의 삶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 이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분명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발상의 전
환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강신장 황인원 공저(共著) 《감성의 끝에 서라》 (21세기북스, 47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발상의 전환, 생각의 전환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발상의 전환을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일체화’입니다.
예를 들어 판매자가 고객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제품이 되어보는 겁니다.
더 나아가 서비스가 되어보는 겁니다.
그리하여 많은 판매자들이 고객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스스로 제품이 되어보고 서비스가 되어보는 판매자는 거의 없
습니다. 제품이 되고 서비스가 된다면 이제껏 한 번도 듣지 못한 제품의
속삭임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일체화’는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매일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성품을 모두 죽이고 예수님을 닮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체화가 되고 싶은 소망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4절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have you not discriminated among yourselves
and become judges with evil thoughts?
James 2:4 [NIV]
   
긍휼
긍휼을 뜻하는 영어 단어(compassion)는 라틴어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받다’라는 의미가 된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헨리나우웬 외 [긍휼] 중에서-


교회의 자리는 어디인가? 묻는다면 정답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섰던 그곳, 주님이 가신 그곳에 존재(being)해야 합니다. 지금도 주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필요하는 그곳에 존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위치가 아니라 주님이 보내신 곳에 존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