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司法'府' 아닌 司法'部'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2.08 03:00
동학농민운동 혹은 혁명은 1894년 초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민란이었다. 조병갑은 동진강에 만석보라는 보(洑)를 만들고 물세를 받았고 아비 조규순의 선정비 비각을 만들겠다며 부자, 가난한 자 가리지 않고 백성에게 돈을 거뒀다. 이를 항의하는 백성을 잡아 족치고 죽였다.
고종 정권이 민란에 대처한 방식은 진압이었다. 왜 백성이 풀 베는 낫으로 관리들 목을 자르겠다고 일어섰는지는 알려하지 않았다. 대신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여 진압을 시도했다. 이에 일본군도 따라 들어와 조선 관군과 함께 농민들을 토벌했다. 고종 정권은 진상조사를 통해 주요 탐관오리를 처벌했다. 조병갑 또한 당연히 처벌됐다. 한성에서 멀고먼 원악도(遠惡島) 고금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그게 1894년 일이다.
바로 이듬해인 1895년 음력 7월 3일 고종은 동학 관련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사면을 받은 사람은 모두 260명이 넘었는데, 그 가운데 이 조병갑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898년 양력 1월 2일,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고종 정권에 인사가 있었다. 지금 법무부에 해당하는 법부(法部) 민사국장에 또 이 조병갑이 임명됐다. 지방에서 백성들 피나 빨아먹고 살던 시건방진 탐관오리를 유배 보내는 척하더니 그자를 고위직, 그것도 사법부 고위직에 승진시킨 것이다.
6개월 뒤 1898년 7월 18일 대한제국 고등재판소에서 동학 주도자들에 대한 상소심 선고가 있었다. 4명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은 ‘겉으로는 선한 일을 수행하나 인민을 선동해서 우두머리가 된 자’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고등재판소 재판장은 법부대신 당연직이었다. 판사는 황제가 임명했다. 재판장은 법부대신 조병직이었다. 황제 고종이 임명한 배석판사는 두 명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또 조병갑이었다. 동학 원인 제공자 조병갑을 동학 재판부에 집어넣은 고종이나, 시켜줬다고 재판부에 얌전히 앉은 조병갑이나 초록이 동색이다. 한 나라 지도자는 탐관오리를 소낙비 긋듯 유배보냈다가 복귀시켰고 기생충 같은 그 탐관은 지도자가 시키는대로 동학 지도자 처형 절차를 담당했다. 이게 나라인가.
1898년 7월 18일 동학 교주 최시형 판결문.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한 재판부 배석판사는 조병갑이었다. /국사편찬위
판결문 끝장. 조병갑 이름이 보인다.
세월이 지나 1981년 4월 15일 전두환 정권 하에서 대한민국 대법원장 이영섭이 퇴임했다. 이영섭은 퇴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법원행정처에 보존돼 있는 그의 퇴임사에는 ‘사법부’가 입법부, 행정부와 동급인 ‘司法府’가 아닌 ‘司法部’로 적혀 있다. 도합 여섯번이다. 여섯 번 오타(誤打)를 냈거나 아니면 정색을 하고 의도적으로 그리 쓴 것이다. 이 ‘司法部’는 어느 부처에 속한 부서일까.
그렇다면 2021년 대한민국 사법부는 한자로 어찌 써야 할 것인가. 대법원장이라는 사람은 “입법부 탄핵을 생각해” 판사 사표를 받지 않았고, 이를 속이려고 거짓말까지 했다. 이 사법부장(司法部長)은 소속이 어디인가.
역사라는 것이, 잔인하고 명백하고 뚜렷하다. 준비 안 된 전쟁으로 낭패를 당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류성룡은 ‘징비록’을 썼다. 징비록은 조선보다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 쓴들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읽은들 반성과 실천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대한민국 백성은 망국을 경험하고, 식민지를 겪고 전쟁을 겪어냈다. 제2의 고종과 제2의 조병갑은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던 그 백성이 기시감(旣視感)을 느낀다. 소름이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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