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누가 능히 서리요 (삼상 6:17-21)

鶴山 徐 仁 2020. 9. 8. 06:57

누가 능히 서리요 (삼상 6:17-21)

 

09월 08일 (화)

   

누가 능히 서리요 (삼상 6:17-21)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19절).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는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범하는 일이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민 4:5-6, 15-20). 그럼에도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 내부를 들여다 본 것은 세속적인 호기심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성을 범한 행위였고, 결국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범죄를 저지른 것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궤를 전리품으로 여겨 포로 취급을 했던 블레셋을 응징하셨듯(5:1, 2), 여호와의 궤를 구경거리로 삼았던 벧세메스 사람들역시도 엄히 징계하셨습니다.

 

학자들은 괄호 속의 (오만)을 필사자의 실수로 봅니다. 후에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도 7만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여기 이스라엘의 작은 성읍 벧세메스에서 (오만)이 죽었다는 것은 거의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고, 실제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도 그냥 <칠십 인>일 뿐이고, 여러 고대 히브리어 사본에도 <칠십 명>으로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 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징계로 죽임을 당한 벧세메스 사람 <칠십 명>으로 인해 백성들이 졸지에 큰 충격에 빠져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돌아왔다고 다들 기뻐하며 좋아했는데 그 날 다시 벧세메스의 수십 명의 가장들이 죽음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금기를 깨거나 범하면 징계를 피하지 못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그럼에도 아담과 하와는 결국 그 금단의 열매를 범했고, 하나님이 <반드시 죽으리라> 경고하신 그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므로써 그 영혼이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범죄한 인간, 하나님의 금기를 무참하게 깬 인간은 누구도 감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권능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지도에서 본문 17절에 나오는 <가사>와 <아스글론>을 특정해 보십시오.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18절)란 누굴까요?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19절) 죽은 수많은 벧세메스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 이제는 더 이상 성역이 사라졌습니다.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와 금도도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 옛날 사무엘 시대에는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봤다고 벧세메스 사람 수십 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지금은 은혜 시대, 복음 시대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함부로 살며 못할 게 없다는 듯 겁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은 저희 중 누구도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의지해, 주님의 대속의 은혜에 기대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저희에게 더욱 겸손하고 겸허한 심령을 허락하사 늘 자제하며 자신 단속하며 주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아프냐? 나도 아프다

 

“드라마 《다모》의 명대사. ‘아프냐, 나도 아프다’는 극 중에서 신

중하고 과묵한 ‘황보윤’의 역할을 맡은 이서진이 할 수 있었던 최대

치의 사랑 표현이었다.”

 

유수진 저(著)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홍익출판사, 18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드라마 《다모》의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덤

덤한 목소리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말합니다.

드라마를 보던 많은 시청자들이 이 대목에서 탄성을 질렀습니다.

‘사랑해’라는 명제를 이야기로 풀어 보면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

픕니다”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아프면 자신도 아프고, 아니, 차라리

자신이 아프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마음 아파하십니다. 신학자 불트만은 그의

명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상처 난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친히 우리의 상처와 아픔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

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

라.” (히4:15)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Come near to God and he will come near to you.

Wash your hands, you sinners, and purify your hearts,

you double-minded.(NIV)

   

사랑의 수고

초대교회가 도시에서 영향력을 지닌 이유중 하나는

역병이 돌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생명을 신경 쓰지 않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치료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병자를 버리고 도망갔는데

그리스도인만이 남아서 그들을 돌봤기 때문에

살아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김형국의 [도시의 하나님 나라] 중에서-

 

결국 세상의 빛은 섬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무 이득이 없어도

주님처럼 살아가는 삶외에는 없습니다.

복음 역시 삶으로 살아낼 때 강력한 에너지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한번 더 살아내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삶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더 많은 손해를 볼 성도와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