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벧세메스로 가는 길 (삼상 6:10-16)

鶴山 徐 仁 2020. 9. 7. 05:25

벧세메스로 가는 길 (삼상 6:10-16)

 

09월 07일 (월)

   

벧세메스로 가는 길 (삼상 6:10-16)



10.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11. 여호와의 궤와 및 금 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이스라엘로 돌아가는 새수레에는 여호와의 궤 뿐 아니라 그 궤로 인해 발생한 독종 재앙과 쥐 재앙을 형상화한 금독종 다섯, 금쥐 다섯도 함께 실려졌습니다(4절). 그것은 여호와의 진노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블레셋 나름의 속건 예물이었습니다(3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12절).

이것은 암소들에게서 새끼를 떼어놓았기 때문에 벧세메스로 가는 소들이 새끼 송아지에 대한 모성적 본능이 발동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그 드마리의 암소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이끌려 좌로나 우로 치우침 없이 곧장 벧세메스로 갔다는 말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성경에서 종종 철저한 순종을 얘기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신 5:32, 17:11, 수 1:7).

미물의 소도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충실히 응답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날 여호와의 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갔던 암소의 헌신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14절).

여호와의 궤를 벧세메스까지 운반한 암소는 다시 여호와께 번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그야말로 온전한 헌신과 희생을 남김없이 다 바친 것입니다. 그제서야 벧세메스까지 함께 동행했던 <블레셋의 다섯 방백이 ... 에그론으로 돌아갔다>(16절)고 합니다. 법궤의 귀환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며 그동안 법궤로 인해 발생했던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 분명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한 역사였음을 다시 한번 가슴에 깊이 깨닫고 또 체험한 후 블레셋으로 다시 복귀했을 것입니다.

이교도요 다곤 신을 섬기는 그들로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더는 부정할 수 없음을 확신하며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에게 패했으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완벽하게 이기셨습니다.

 

-왜 굳이 송아지를 둔 암소 둘을 택해 수레를 끌게 했을까요(10절)?

-본문 13절을 참고하여 당시 여호와의 궤가 벧세메스로 돌아온 시기 혹은 계절을 확정해 보십시오.

-새끼를 둔 암소를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린 점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 드디어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돌아왔습니다.

블레셋에 있은 지 7개월 만에 다시 이스라엘로 귀환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은 적에게 하나님을 빼앗겼지만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고 스스로 다시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사건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헨리 나우웬이 감동 받은 그림

 

“친구의 사무실에 갔다가 우연히 렘브란트의〈탕자의 귀향〉복제품을

만나게 된다. 그림의 힘과 아름다움에 크게 놀란 나우웬은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 이상이다...’(중략).

하나님은 이 그림을 사용해 정신장애 공동체에서 사역하는 나우웬의 소

명을 확증해 주셨다(중략).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격조 높은 예술은

신앙의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게리 토마스 저(著) 윤종석 역(譯) 《영성에도 색깔이 있다》

(CUP, 68-69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아름다운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이 어느날 최선을 다해 순회 강연을

마친 후 걸음조차 떼어 놓지 못할 만큼 지쳤습니다. 그 때 한 친구의

사무실에 갔다가 렘브란트의 그림〈탕자의 귀향〉복제품을 보게 됩니

다. 그 그림을 보자 헨리 나우웬은 말할 수 없는 영감과 아름다움을

느껴 자신의 소명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모양과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길거리에서 받은

전도지 한 장에서도, 핸드폰으로 전해오는 성경 구절 한 말씀에서도,

신앙의 깊이가 스며 있는 예술품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

습니다. 천지만물에 스며 있는 하나님의 신성과 은혜를 느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

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

계하지 못할지니라.” (롬1:20)

   

디모데후서 2:22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Flee the evil desires of youth, and pursue righteousness,

faith, love and peace, along with those who

call on the Lord out of a pure heart.(NIV)

   

전화위복

부족함을 방치하면 아픔이 되지만

부족함이 사명을 담으면 놀랍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의 경험이 성공을 위해 중요한 교훈이 될 수는 있겠지만,

실패와 성공에는 아무런 함수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 자체가 주는 유익은 반드시 있습니다.

실패는 버려야 할 과거의 아픈 추억이 아닙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지 않더라도,

실패 그 자체의 경험이 인생에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최병락의 [부족함] 중에서-

 

부족함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부족함이 자신의 평생 상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족함의 상처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난에도 처하고 풍부에도 처할 수 있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체의 비결이 있음을 믿는다면

반드시 사명자로 살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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