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이 떠났다 (삼상 4:16-22)
09월 02일 (수)
영광이 떠났다 (삼상 4:16-22) 16. 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 엘 리가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17-18절). 본문 17절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때 적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싸우는 군사나 지도자가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과연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게까지 참혹했을까요?
하나님은 비참한 굴욕의 순간들을 영광스러운 기회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당시 이스라엘은 최고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그의 두 아들, 그리고 전쟁에 나선 군대까지 총체적으로 죄악과 패배의식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닥쳐온 환란과 죽음을 수습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미 때가 늦은 겁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그러나 엘리 제사장 집의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임신 중이던 비느하스의 아내가 패전과 남편, 시아버지의 비보를 듣고 갑자기 산통을 느끼더니 해산을 하고는 죽는데, 운명하기 직전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21절)며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이는 <영광이 없다> 혹은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그녀는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도, <네가 아들을 낳았다>는 여인들의 소리를 듣고도 일체 <관념하지 않고>(20절)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난 사실에 대해서만 심히 슬퍼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녀는 가족들의 타락, 온 백성의 죄악에 대해 늘 탄식하며 안타까워했던 숨은 성도였습니다. 그랬기에 그 와중에도 자신이 아들을 낳은 사실에 안도하기보다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사실에 더 슬퍼하며 절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한 비느하스 아내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22절)? -엘리 제사장은 왜 기도하며 회개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전쟁 소식만을 기다렸을까요? -엘리 제사장은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몇 년간 치리했습니까(18절)?
주님, 그 최악의 상황에서 출산하며 죽어갔던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곳은 곧 패망과 저주와 죽음의 세계입니다. 수만 명의 이스라엘 군사들이 죽고, 하나님의 궤를 적에게 빼앗기고, 살아남은 자는 도망하고, 나라의 최고 지도자마저 목이 부러져 죽은 당시의 상황은 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저희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게 하사 하나님의 영광이 저희를 떠나는 불행을 겪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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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워 보이는 사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중략) 특별히 싸구려 것,괴상한 것,지저 분한 것,말이 안 되는 것,유치한 것,조잡한 것을 통해 더욱 큰 즐거 움을 찾아내고 기뻐할 줄 안다. 이른바 ‘키치’(kitsch)라 함은 저 속한 공예품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은 키치스러운 것의 미학을 예찬한다. 진지함은 제발 질색이고 절대 사양이다.”
배국원 저(著) 《현대 종교철학의 이해》 (동연, 290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 중 하나인 밀란 쿤데라는 우리를 누르고 있는 ‘거짓된 진지함’에 벗어나기 위해 역설적으로 ‘농담’ 같은 가벼운 삶을 말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상실의 시대》에서 “모든 사물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고 적당히 거리를 두라”며 같은 맥락의 말을 합니다. 쿤데라는 농담같은 ‘의미 없는 이야기’로, 이제껏 ‘의미 있었다고 속여 온 세계’를 질타합니다. 지난 역사 동안 ‘진지한 정 신’을 지녔다는 영웅들의 야망, 허영, 거짓말 때문에 역사의 비극을 겪었다는 것을 에둘러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고는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말자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지해 보이는 거짓 말’은 ‘가벼워 보이는 농담’보다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진지해 보이는 거짓 덩어리였습니 다. 반면,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11:19)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가벼웠(?)습니다. ‘거짓’은 자신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진지함과 무거움이라는 탈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은 가벼워(?) 보입니다. “괜찮아 잘 될 거야!” 하고 축복하는 사람도 가벼워 보 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벼운 사람이 무거운 세상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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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Now I rejoice in what was suffered for you, and I fill up in my flesh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which is the church.(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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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도록 예수 이름을 주신 것 예수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무엇이든 기도할 수 있도록 예수 이름을 주신 것이다. 기도로 크리스쳔의 풍성한 삶, 승리하는 삶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완벽한 기초믿음으로 무장하셔서 기도하시라. 특별히 어떤 확신이나 깨달음이 있다면 즉시 기도를 시작하고 움직이며 시도하시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이것을 무시하면 무시 받게 되고 아무런 역사도 경험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된다. -김치두 목사의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에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영적 암흑기를 믿음의 기도로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살아계십니다. 자격지심의 물결이 밀려올 때도 십자가의 은혜의 방패를 사용하여 반드시 응답받게 되어 있음을 우기십시오.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시험들 일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때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응답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증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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