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여호와의 손 (삼상 5:6-12)외 1

鶴山 徐 仁 2020. 9. 4. 14:49

여호와의 손 (삼상 5:6-12)

 

09월 04일 (금)

   

여호와의 손 (삼상 5:6-12)

6.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

7.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게 할지라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

8.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가드로 옮겨 가라 하므로 이스라엘 신의 궤를 옮겨 갔더니

9.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

10.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하나님의 궤가 에그론에 이른즉 에그론 사람이 부르짖어 이르되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다 하고

11. 이에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이 죽임 당함을 면하게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12. 죽지 아니한 사람들은 독한 종기로 치심을 당해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

 

본문에는 <여호와의 손>(6절, 7절, 9절, 11절)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상징하는 말로 <신인동형적 표현>의 전형입니다(수 4:24, 스 7:9, 시 89:13).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한 종기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역을 쳐서 망하게 하니>(6절). 여호와의 첫 번째 응징은 신전 속 다곤 신에게 내려졌었는데 이제는 다시 그 다곤을 섬기는 아스돗 사람들에게 독한 종기로 임했습니다. 이를 두고 아스돗 사람들이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78절)고 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마침내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방백들이 모여 우리가 이스라엘 신의 궤를 어찌하랴>(8절)하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최고의 전리품이요 최상의 실적인 줄로만 알았던 하나님의 궤가 이제는 하루라도 속히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야 할 무시무시한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당황하여 하나님의 궤를 이리저리 급하게 옮겨 간 것은 그들이 그만큼 하나님의 궤를 무서워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옮겨 간 후에 여호와의 손이 심히 큰 환난을 그 성읍에 더하사 성읍 사람들의 작은 자와 큰 자를 다 쳐서 독한 종기가 나게 하신지라>(9절).

 

<이에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에그론으로 보내니라 ... 그들이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와 우리 백성을 다 죽이려 한다 ... 이는 온 성읍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 성읍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사무쳤더라>(10-12절).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몰아닥친 사망의 징벌은 가는 곳마다 성읍을 폐허로 만들고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하는 무시무시한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아스돗, 가드, 에그론이 다 그렇게 극심한 독종과 재앙으로 죽음의 성읍이 된 것입니다.

 

마침내 방백들이 다시 모여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그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백성이 죽임당함을 면하게 하자>(11절)고 합니다. 블레셋 족속들이 그야말로 하늘에 사무치도록 자신들의 완전한 패배를 시인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에서 가드로, 다시 에글론으로 계속 옮겼을까요(8절, 10절)?

-본문 9절에서 말하는 <작은 자와 큰 자>란 어떤 자들을 가리킬까요?

-다곤 신전이 있었던 <아스돗>에 대해 아는 대로 적어 보십시오.

 

주님, <여호와의 손>은 가히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과 권세를 행사하시기에 합당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손의 엄중함을 깨닫고 스스로 하나님의 궤를 그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하기로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다곤 신도, 블레셋의 백성들도 더 이상은 하나님의 궤를 감당할 수 없어 죽임 당함을 면하기 위해 서둘러 그렇게 결의한 것입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에 완전히 승복한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희도 늘 겸허하게 복종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진리에는 웃음이 있어야 한다

 

“웃음이 따르지 않은 진리는 거짓이다.”

 

니체 저(著) 김지원 역(譯)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려출판문화공사, 18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무겁고 진지합니다. 그런데 사실 진

지함도 오만함일 수가 있습니다. 자신만이 진리를 제대로 추구하고

알고 있다는 진지한 교만이 섞여 있을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웃음’이 섞일 때, 겸손이 됩니다.

시인 이성복교수도 위대한 예술가는 ‘진지함’, ‘측은함’ 그리고

‘장난기’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장난기가 섞일 때 공감과 겸

손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 말씀 속에 하나님의 흐뭇한 미소와 웃음이 그려지지 않습니

까? 하나님은 심각하고 장중한 가운데 역사를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기쁨과 웃음 속에서 당신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이 많아 수태를 못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약속하

십니다. 그러자 이들은 허탈하게 웃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들의

이름까지 ‘이삭’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들을 얻게 하십

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허탈한 웃음이 진짜 웃음이 되게 하신 것입니

다. 허탈한 웃음과 진짜 웃음,그리고 아들의 이름이 ‘웃음’이라니!

얼마나 유머러스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런 불경

스러운 표현을 써도 될는지 모르겠지만,하나님의 농담(divine joke),

하나님의 유머로 시작되었습니다. 진리에는 웃음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But among you there must not be even a hint of

sexual immorality, or of any kind of impurity, or of greed,

because these are improper for God's holy people.(NIV)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당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는 것이다.

구원은 죄를 용서받은 당신의 영혼 속에

하나님이 자기의 평강의 영을 부어 주셔서

지금까지 당신이 맛보지 못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체험하는 것이다.

구원은 이웃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과

당신의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한다.

-최용우 목사의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구원은 항상 당신의 마음속에

불안과 불행감을 일으키고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마귀가

당신 속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언젠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또는 온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될 때,

이것에 상관없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09월 03일 (목)

   

포로가 된 하나님의 궤 (삼상 5:1-5)

1.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서 다곤 곁에 두었더니

3. 아스돗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

5.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 아스돗에 이르니라>(1절).

블레셋 군대로서는 유사 이래 최대의 전리품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아스돗으로 가져간 것은 그곳에 자신들의 신 다곤의 신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궤를 <다곤 곁에>(2절) 두었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다곤 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자 이스라엘 민족의 신 여호와에 대한 다곤 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3절).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졌다는 것은 곧 경배나 항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튿날의 신전 광경은 더욱 참혹했습니다.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또 다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뚱이만 남았더라>(4절).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정하시고 당시 다곤 신과 그 우상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블레셋 족속들을 응징하신 것입니다. 다곤은 거짓 신이며 여호와야 말로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누가 봐도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확실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다곤 신상의 <머리와 두 손목이> 잘렸다는 것은 완전한 패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블레셋 족속의 모든 이들에게 다곤 신의 무능과 무력함을 똑똑히 보여줌으로써 자기 백성들에게 철저히 경멸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블레셋 군대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여호와를 포로로 삼고 자신들의 신 다곤의 신전에 감금했지만 여호와는 결코 포로가 되시지도, 우상의 신전에 감금당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응징하시고 심판하시고 블레셋 사람들과 그들의 신에게 끔찍한 재앙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야말로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스스로 확증하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신 <다곤>은 어떤 우상이었습니까?

-<아스돗>은 원래 유다 지파에 배분된 땅이었는데(수 15:47) 왜 그곳에 다곤의 신전이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다곤 신상의 <머리와 두 손목>(4절)을 자르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 블레셋 군대는 여호와를 자신들의 포로로 잡았다고 생각하며 그 궤를 다곤 신전에 감금했지만 실은 하나님이 블레셋과 그들의 신 다곤을 응징하시기 위해 스스로 그들의 지성소까지 들어가신 것이었습니다. 주님, 이 시대 저희들도 오늘 본문의 이 초유의 사건을 통해 많은 깨달음과 확신을 얻게 해주시옵소서. 언제나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권능을 보다 깊이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 이야기

 

“사람들이 전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가시 많고 기름기 자르르한 생선’

그런데 이 전어가 각광받기 시작합니다(중략). 바로 이 한마디.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생선’(중략)

가시 많고 기름기 자르르한 생선은 생선 이야기입니다. 집 나간 며느

리도 돌아온다는 생선은 사람 이야기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만들어 전

어에 입혔더니 굴비 부럽지 않은 생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정철 저(著) 《카피책》 (허밍버드, 221-22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전어는 귀한 음식을 시킬 때 덤으로 서너 마리 구워주던 천대받는 생선

이었습니다. 실제로 가시가 많고 기름기도 자르르한 생선입니다. 그

런데 어느덧 ‘가을 전어’라는 말이 생기면서 각광을 받았습니다. 그

사이에 전어 맛이 크게 달라진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맛은 그대

로입니다. 대신에 생선에 사람 이야기가 덧붙여져서 가을 대표 생선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전어 굽는 냄새에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

어디서부터 이 말이 시작되었는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말

속에 ‘집 나간 며느리’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은 것입니다.

시집 살이가 괴로워서 누구나 집 나가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전어’가

대변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전어를 먹으며 “내 마음과 비슷한 사람”

들이 많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상품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나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가 있는 인생이 가장 승리한 인생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NIV)

   

바타로 게오

주님이 지적하신 유대인들의 기도에 잘못된 것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였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지적하셨다.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

중언부언이 무엇인가?

'바타로 게오'라는 헬라어 말인데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또 의미가 있는 말이라도 생각을 담지 않고

계속 지껄이는 것을 일컬어서 중언부언이라고 말을 한다.

- 옥한흠 목사의 ‘골방에서의 기도’에서-

 

유대나라 사람들이

규격화된 기도, 세트가 된 기도를 계속 반복하면서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면 하나님이

설득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면,

그 기도는 틀림없이 중언부언의 기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요인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많이 반복합니까? 시간을 오래 끕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설득 당할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반복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 때 생각 없이 하는 기도는

진실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