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다시 사신 예수님 (요한복음 20:11~18 )

鶴山 徐 仁 2020. 8. 24. 06:17

08월 24일 (월)

다시 사신 예수님 (요한복음 20:11~18 )

   

다시 사신 예수님 (요한복음 20:11~18 )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부활절을 앞두고 상자를 하나씩 나눠주며 한 주일 동안에 예수님의 부활에 관계된 물건을 하나씩 상자속에 넣어 오는 숙제를 주었습니다. 드디어 부활절에 많은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여 상자를 하나씩 제출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상자 속에 나비를 넣어 가지고 왔고, 혹은 꽃을, 어떤 아이는 개미를, 또 다른 아이는 파란 나무 잎사귀를 넣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빈 상자를 들고 온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지능이 좀 낮은 장애아였습니다. 그래서 말을 잘 하질 못하고 생각이 좀 부족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선생님,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살아나셨다고 그랬지요? 이 빈 상자는 바로 예수님의 빈 무덤이예요". 선생님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 "얘야, 네가 가장 훌륭하게 숙제를 마쳤구나. 정말 잘했다" 그렇게 축하했다고 합니다.

저능아였던 아이도 이 빈 무덤의 비밀을 알았지만, 마리아는 빈 무덤에 대한 비밀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주일 새벽에 향품을 준비해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에 그 향품을 발라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걱정이 되어 울기 시작합니다(11). 왜 울었을까요? 아직 마리아와 제자들은 슬픈 감정이 앞서다 보니 말씀에 우선되지 못했습니다(9). 이젠 감정적인 신앙에서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귀신들려 고생하며 거리를 방황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에게서도 격리되어 소망없이 살아가던 여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영육간의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새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신앙적으로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남자도 찾기 어려운 무덤을 이른 새벽에 찾아 갔던 것입니다(1). 참 사랑은 계산으로 측정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예를 든다면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지식을 향한 사랑말입니다. 이만큼은 되고 안되는 것아닙니다. 오늘 현대인에게도 이런 순수한 사랑과 눈물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만을 생각하고 흘리는 눈물은 있어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아파하는 회개의 눈물도, 받은 은혜에 대한 감격의 눈물도,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흘리는 연민의 눈물도 말라 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길은 이 말라버린 눈물샘이 터지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울고 누구를 찾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15).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사람들은 저마다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찾고 누구를 찾느냐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다른 세상적인 것을 찾은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의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요14:6). 죽고 장사 지낸바 된 주님이 아니라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결국 그녀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전하였습니다(17-18). 신앙은 내가 체험하고 확신한 사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죄와 죽음과 육신적 정신적 질병과 사탄의 권세 아래서 고통당하는 저들에게 나아가 부활의 기쁨과 승리의 소식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 나는 무엇 때문에 울고 있나요? 가치있는 것을 위해 울며 기도하십시다.

- 내가 찾고 있는 것을 점검해 보고 수정이 필요하면 결단하십시다.

- 부활의 주를 만난 사람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주 하나님,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주님을 더 사랑하기 원합니다. 이제는 감정적인 신앙에서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성숙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님 만난 그 기쁨과 감격속에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중요한 포인트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앞으로 필요한

모든 개념은 정확히 한 낱말로 표현될 것이고,그 뜻은 엄격하게 제한

되며 다른 보조적인 뜻은 제거되어 잊히게 될 걸세.”

 

조지 오웰 저(著) 정회성 역(譯) 《1984》(민음사, 75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반이상향적인 미래를 묘사한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이 조지

오웰의 《1984》입니다. 《1984》는 빅 브라더가 철저하게 개인을 감

시하고 통제하는 사회를 그리고 있습니다. 빅 브라더는 과거의 역사와

현재,미래까지 사람들의 인식과 사고를 조종하기 위해 ‘언어’를 이

용합니다. 즉, 신어(新語) 사전을 제작하여 사회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의미와 사용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언어의

통제’를 통해 개인과 사회를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낱말 수는 줄어들고, 그에 따라 의식의 폭도 좁아

지게 되는 거지(중략). 언어가 완성될 때 혁명도 완수될 것이네.”

(75쪽)

탁월한 현대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내 세계의 한계는 내 언어의

한계”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사유는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을 넘

어서지 못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넘어 뜨리는 방법 중의 하나가 악한 말, 죽이는 말, 희

망이 없는 말들을 자꾸 듣게 하고 그 말들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존재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많이 들을 때 살아나고, 마귀의 말을

자꾸 들을 때 죽어갑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1:1,2)

   

에베소서 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But among you there must not be even a hint of sexual

immorality, or of any kind of impurity, or of greed,

because these are improper for God's holy people.(NIV)

   

시기

시인 앤 브레드스트리트는 “청년은 모으는 시기이며,

중년은 향상하는 시기이며, 노년은 소비하는 시기이다.

게으른 젊은이는 무식한 중년기와 공허한 노년기를 갖게 된다.

허영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고 그냥 드러누워 있는 젊은이는

조만간 슬픔이라는 침대에 눕게 될 것”이라고

젊은 시절의 게으름에 대하여 경고하며 염려한다.

결국 게으른 사람은 무식하고, 공허하며,

슬픈 인생을 살게 되고, 부지런한 사람은 열심히 일한 만큼

유식하며,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수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언혁의 [지혜롭게 키운 자녀가 성공한다] 중에서-

 

인간은 늘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에 대해 질문합니다.

잘 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답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인생에 놓여 있는 시기를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야 할지,

내 인생의 때를 가장 좋은 시절이 되기 하려면

하나님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향유옥합을 깨뜨려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지혜있는 자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