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월 21일 (금)
말씀하옵소서 (삼상 3:1-9)
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1절). 이는 어둡고 부패한 당시의 영적 상황을 반영한 말씀으로, <이상>과 <말씀>이 희귀했다는 것은 그 시대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일종의 심판이었다고 봐야 옳을 것입니다(암 8:1). 따라서 이 말씀의 바른 의미는 ①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지 않았고(시 74:9), ② 이스라엘 역시도 하나님의 계시에 극도로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마 7:6).
이어지는 엘리에 관한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2절). 이미 100세를 바라보는 엘리의 고령을 감안할 때 이는 당연한 현상이었음에도 이 말씀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노쇠만을 지적하는 말씀이 아니고 그와 비례해 점점 더 무뎌가는 엘리 선지자의 영성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흑암한 시대에도 어린 사무엘에게만은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3절). 물론 이 말씀은 사무엘이 언약궤가 안치된 지성소 안에서 잤다는 뜻은 아닙니다. 넒은 의미에서 지성소가 있는 성전을 거처로 삼고 지내며 잔 것입니다. 아무튼 어린 사무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고, 사무엘은 엘리 선지자가 부르는 줄 알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며 무려 세 번이나 달려가기까지 합니다. 그제서야 엘리 선지자가 깨닫습니다. 따라서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9절)며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이게 이 시대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자세입니다. 시대가 어둡고 악할수록 깨어 있어야 하고 말씀하옵소서 듣겠나이다>하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내 뜻이나 내 주장을 관철하려는 구실로 말씀을 이용하지 않고 오직 겸허한 자세로 영적 귀를 열고 그게 어떤 말씀이든 수용하고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질 때 우리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육성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던 시대에 엘리가 아니라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에게는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하고 기도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의 사무엘의 나이를 12세로 보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님, 그 어두운 시대, 여호와의 말씀도, 이상도 희귀했던 시대에도 어린 사무엘에게는 계시가 임했습니다. 엘리 선지자도 들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사무엘은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육성을 들을 때는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하며 엎드려야 합니다. 오늘 저희에게도 사무엘과 같은 겸손과 또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다짐과 결단을 허락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바르게 들을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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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힘을 숭배하는 이유
“판타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초반부에 ‘도쓰라키’라는 야만족의 추장이 새롭게 맞이한 이방인 신부에게 혼인 예물로 아름다운 백마를 선물하는 장면이 나온다. 신부가 통역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달라고 말하자 통역사가 말한다. ‘도쓰라키 언어에는 ‘감사한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감사에 대한 개념이 없는 도쓰라키 부족은 그래서 오로지 힘을 숭배하 고,힘없고 온순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습격하고,약탈하고,불지르 는 일을 낙으로 삼으며 산다.”
윤민 편저(編著) 《태양 아래 새로운 명언은 있다》 (마름돌, 205-206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누에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실을 가지고 자신이 들어갈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로 존재의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살게 됩니다. 즉, 우리는 자신이 소유한 아파트 평수가 아니라 활용하는 언 어의 세계가 바로 자신이 사는 세계의 크기입니다.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도쓰라키 족속처럼 ‘감사’에 대한 말이 없는 민족은 감사에 대한 개념도 희미합니다. 세상의 타락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타락의 집에서 삽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주님의 은혜입니다. 믿습니다.” 등 하늘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하늘의 집에서 삽니다. 성도들의 사명 중의 하나는 타락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살리는 하늘의 말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데 쓰임을 받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 하니라.”(느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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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NI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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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보화는 역시 은혜를 아는 것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의 속박에서 건져 주시고,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통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공급해 주시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고, 대적을 막아 주시고, 친히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돌보아 주셨다. 그런데 그런 은혜에 감사하기보다 조금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원망하고, 불평했다. 그러한 불신앙적인 그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질병으로 혹은 불뱀을 통해 심판하셨다. 우리 마음에 감사 대신 불평, 원망의 마음이 생기면 마음에 사랑과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대신 미움과 다툼과 근심의 마음이 자리 잡게 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병들게 된다. -임방환 목사의 ‘풍성한 감사가 주는 유익’에서-
많은 사람들이 늘 은혜 받을 생각만하고 받은 은혜를 망각하거나 알더라도 갚을 줄 모르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삽니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어왕>을 통해 “은혜를 모르는 자식은 부모가 독사에게 물린 것보다 마음을 아프게 한다.”고 절규하였습니다. 데일 카네기는 “은혜를 모르는 것은 마치 잡초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깨닫는 것은 마치 잡초 속에서 장미를 키우는 것과 같다.”고 은혜를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과 은혜의 그 아름다움을 지적합니다. 인간이 깊이 깨달아야 할 영적 가치 중에 가장 값진 영혼의 보화는 역시 은혜를 아는 것과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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