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엘리 가문의 몰락 (삼상 2:27-36)

鶴山 徐 仁 2020. 8. 20. 11:20

08월 20일 (목)

   

엘리 가문의 몰락 (삼상 2:27-36)

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28.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내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내 처소의 환난을 볼 것이요 네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 내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네 사람이 네 눈을 쇠잔하게 하고 네 마음을 슬프게 할 것이요 네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36. 그리고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이르되 청하노니 내게 제사장의 직분 하나를 맡겨 내게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엘리 가문의 몰락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어느 날 엘리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사람>(27절)이 찾아옵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초자연적 능력을 가진 자인지 등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말씀으로 보아 예언자라 명명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언자를 통해 엘리와 그의 아들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엘리 가문에 약속하셨던 제사장직의 사명을 철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30절). 이것은 단순히 부패한 한 개인의 몰락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직을 수행하던 가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의미가 실로 크다할 것입니다.

 

결국 그 가문은 블레셋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이 크게 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기면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하고 마침내 엘리 마저 죽음을 맞으면서 몰락이 현실화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경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35절). 이것은 엘리 제사장 가문의 몰락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불완전한 인간 제사장 제도의 폐지와 함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언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세움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확실하게 성취되었습니다(히 7:1-28, 9:11-12).

 

그렇습니다.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의 타락과 실패에서 보듯 구약 시대의 인간 제사장 제도는 완전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찍부터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라>고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히 7:24).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간에 중보자 직분입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사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신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잊지 말일입니다.

 

-엘리 가문의 몰락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적어 보십시오.

-엘리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직을 수행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14:3)?

-엘리 제사장은 몇 세에 죽었을까요(4:15)?

 

주님, 결국 엘리 가문은 멸망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엘리는 그렇게 몰락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인간 제사장제의 불완전함을 드러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출현을 예언하셨습니다. 주님만이 완전하신 중보자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시거나 지체함 없이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직 앞으로 나아가신다는 사실을 이 엘리의 가문을 통해, 또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사역을 통해 다시 한 번 깊이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해주시옵소서.

 
   

질(質)보다 양(量)이 중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문화연구소 이인식 소장은 ‘(중략) 천재와 보통사람 사이의 지

적능력의 차이는 질(質)보다는 양(量) 의 문제라는 것이다.’라고 말했

다. 재미있지 않은가! 천재와 보통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지능의 차

이가 있고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저 양적인 차이만

있다고 하니.”

 

김학재 저(著) 《임계점을 넘어라》 글로벌콘텐츠, 3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천재 피카소는 94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남긴 작품은 5만

점이 넘습니다. 그의 생애 중 80년을 활동기로 계산해도 한 달에 50점

이상 그림을 그렸다는 추론이 나옵니다. 피카소는 천재이기에 앞서 엄

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던 노력가였던 겁니다.

“미국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은 예술가들의 작업 방식에 대해 ‘예

술가들이 하는 일은 여러 직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뛰어난 재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기간 축적된 지식과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지며

특별한 것은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뛰어난 예술가들은 대체로 천

재에 가까운 사람들이고, 이들이 생각하고 일하는 방식은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겠느냐는 일반인들의 생각에 대한 답이랄 수 있다.”(31쪽)

기도도 그러합니다. 기도의 양, 즉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믿음의 용사들을 보면 대부분 오래도록 기도합니

다. 계속 기도합니다. 계속 엎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12:23a)

   

잠언 6:27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Can a man scoop fire into his lap without

his clothes being burned?(NIV)

   

주실 것을 믿고 드리는 감사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감사의 사람이 되도록

두 가지 감사절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다.

맥추절 감사와 추수절 감사이다.

보리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가 맥추절이다.

추수절 감사가 거둔 열매를 가지고 감사하는 예배라면,

맥추절 감사는 주실 열매를 믿고 감사하는 예배이다

추수절 감사가 거둔 열매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는 감사라면,

맥추절 감사는 처음 주신 것을 모두 드리는 감사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맥추절 감사보다 추수절 감사가

훨씬 더 풍성하고 잔치분위기가 난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맥추절 감사가 훨씬 더 깊은 감사요,

더 놀라운 감사요, 더 힘 있는 감사이다.

-작자 미상의 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드리는 감사’-

 

감사는 믿음이라는 나무에 맺는 열매 중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중한 열매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풍성한 열매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추수절 감사도

믿음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것이지만

맥추절 감사가 더 귀한 것은

주실 것을 믿고 드리는 감사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궁핍한 중에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중에 드리는 감사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