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왕의 진미를 사양한 청년들 외 1

鶴山 徐 仁 2016. 8. 11. 09:27
8월 11일 (목)
왕의 진미를 사양한 청년들 - 단 1:1-7
   
 

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2.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3. 왕이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왕족과 귀족 몇 사람
4.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설 만한 소년을 데려오게 하였고 그들에게 갈대아 사람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고
5. 또 왕이 지정하여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에서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 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후에 그들은 왕 앞에 서게 될 것이더라
6. 그들 가운데는 유다 자손 곧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니
7.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다니엘은 유다왕 여호야김 3년(기원전 605년)에 이스라엘을 침공한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귀족 중의 하나였습니다(대하 36:5-7). 바벨론은 유다에서 사로잡아온 소년 중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찰하며 지식에 통달하며 학문에 익숙한 사람>(4절)을 선발하여 3년 동안 그 나라의 언어와 학문을 가르친 후 왕을 모시는 일에 동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선발된 청년 4명이 바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였습니다. 이들은 왕궁에서 생활하며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왕이 먹는 음식이며 포도주까지 마실 수 있는 특권을 누린 것입니다. 바벨론 당국이 포로임에도 그들에게 그런 특급 대우를 보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바벨론 왕궁에서 왕의 진미를 먹는 것이 하나님 신앙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하면 왕궁의 모든 진미는 이미 그들의 신전 진상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아직 어린 소년이요 청년에 불과했지만 신앙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습니다. 포로요 볼모의 신분으로 왕의 호의와 명령을 거절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게 신앙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안 이상에는 결코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으나 왕의 진미를 사양했습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자주 현실에 굴복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강변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소년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 하나님 사랑의 정절을 지킵시다. 함부로 세상 문화에 굴복하거나 양보하지 맙시다. 신앙의 본질에 관한한 절대 관대함만이 미덕이 아님을 분명히 합시다. 다니엘과 그이 친구들에게서 믿는 자의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배웁시다.

 
   
   
 

-바벨론식 이름인 <벨드사살>이 누굽니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유대식 이름은 각각 무엇입니까?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그의 친구들과 잡혀 갈 때 유다 왕은 누구였습니까?

 
   
   
 

주님, 이 시대 저희가 믿음의 순수성을 지키며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로 살아가는 것보다 다니엘의 바벨론 포로시대가 여러모로 훨씬 더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타협하지 않고 정말 목숨을 건 결단으로 믿음의 정절을 지켜냈습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들의 믿음을 본받게 해 주시옵소서. 현실에 순응하고 타협하는 것만이 미덕이 아님을 깊이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인의 책임

한 번 사랑한다고 하면 쉽사리 배신할 수 없고,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들의 필요를 모른 체 할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을 먹이고 입힌다. 그들이 자녀의 영혼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다. 사랑은 영과 육으로 분석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사랑의 표현이기에, 복음 전도를 넘어서 무엇이 가난한 자에 대한 분명한 책임인가를 미리 규정해 놓을 수는 없다. 사랑을 질식시키는 비성경적 전통의 울타리가 쳐지지 않는다면, 사랑은 각 개인의 특수한 상황에서의 필요가 무엇임을 알고 그 필요를 채워 주려 할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중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세상을 섬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판단을 하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각 개인의 특수한 상황을 인식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나눠주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랑을 말하고 실천하려는 선포는 줄어들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아픔입니다. 사랑이 식는 것은 사랑의 기준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주님께로부터 시작되었기에, 주님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

 

설레임과 향기로움으로 빛나는 사랑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늘기쁜교회 문대식 목사
  양을 잘 지켜라
   
   



8월 10일 (수)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 창세기 8:1-12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2.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4.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5.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오늘 묵상할 말씀은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간 이후에 1년이 지나서 물이 줄어들고, 150일 후에 방주는 아라랏산에 머물게 됩니다. 물이 점점 더 줄어들어서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 40일이 지나서 노아는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았습니다. 까마귀는 날아다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창밖으로 보냈습니다. 비둘기도 지면에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또 노아는 7일을 기다립니다. 또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비둘기는 저녁에 잎사귀를 입에 물고 돌아옵니다. 이제 땅에 물이 줄어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노아는 또 비둘기를 내보냅니다. 그는 비가 그친 이후에도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노아의 ‘기다림’을 생각합니다. 100년 가까운 시간, 비를 기다렸고, 1년이 넘는 시간의 홍수를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노아에게 기다림은 참 힘든 과정이었을 겁니다. 특별히, 노아는 이 마지막 기다림의 순간이 참으로 참기 어려운 시간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고난이란 것이 그 마지막 순간에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하나님을 만나서 어려움의 시간을 잘 지내고 나서, 마지막 순간에 기다리지 못해서, 서둘러서 후회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때로는 10년을 잘 기다리고도 마지막 일주일을 견디지 못해서, 축복의 문턱에서 넘어진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노아는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 날,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날을 말입니다. 욕심으로 시간을 재촉하거나, 실망으로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 축복의 서곡이었습니다. 노아는 그 서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비둘기를 더 내보냅니다. 그 때, 비둘기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CTS텔레비전에서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여러분!
오늘 또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다립시다. 마지막 순간에 실족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욕심을 내거나 실망하지 말고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기다림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다림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주중에 무엇을 하느냐가 제자와 단순한 교인의 결정적인 차이다. 그리고 이 탈기독교화 사회에서는 주일 경험으로 비신자들을 전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비신자들이 주일 예배가 좋다는 소문을 듣고 교회를 찾아오는 경우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화려한 주일 쇼를 기획하는 것보다 제자들이 주중에 교회 ‘밖’에서 또 다른 제자들을 키울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해졌다. 이 시대에는 사람들을 ‘오라고’ 초대하는 것보다 교인들이 ‘가도록’ 훈련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J. D 그리어의 [담장을 넘는 크리스천] 중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볼 때, 우리는 철저히 훈련받은 제자를 세상 속으로 보내는 사역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오늘날의 교회는 얼마나 모였는가로 성공 여부를 평가하려는 유혹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훈련받은 제자를 세상 속에 보냈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로 항상 훈련된 하나님의 백성을 세워 담장 너머에 있는 영혼들에 대해 관심 갖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제자 될 때 또 다른 제자를 세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자리가 선교지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성전 공사 진행 중

 

우리는 ‘함께 지어져 가는 중’입니다.
공사중인 성전이죠. 그래서, 가끔 참 시끄러운 소리도 나고 힘든 일도 있을 거예요.조금 힘들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용남해주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자라져가고 다듬어져서,
지나가던 나그네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한번쯤 들여다보고 싶은. 아름답고 따뜻하고 평안한 성전을 함께 만들어가길 바랍니다.
그러니 부디 저의 연약함을 용서해주시고, 기다려주세요.저도 노력하겠습니다.

 
       
 
   
  늘기쁜교회 문대식 목사
  헌금과 십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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