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3.27 08:50
미국 국무부 비밀전문 단독 입수
1975년 월남 패망때 월맹 정부에 억류됐던 한국외교관 3명중 1명이 북한으로 데려가겠다는 북한측 협박을 이기지 못해 북한전향서에 서명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또 억류외교관 석방협상 때 북한이 1명당 한국내 체포간첩 150명을 교환하자고 최초 제의했었다는 일부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북한은 당초 외교관 1명당 70명을 제안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한국정부가 1978년 미국측에 통보한 외교전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공국장은 “북한측의 심문목적은 외교관 3명으로부터 전향서를 받으려는 것이 명백하며 외교관들에게 남한내 애국세력들의 혁명과업수행을 방해하지 말 것,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철회 등을 명시한 서류에 서명을 강요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공국장은 “협조하지 않으면 북한으로 송환하겠다는 협박이 가해졌고 시니어급 외교관 2명은 전향서 서명에 거부했지만 주니어급 외교관 1명은 그같은 종류의 전향서에 서명했음이 명백하다”고 주미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에게 말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정부가 이들 외교관중 1명이 북한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전향서에 서명했다고 미국측에 통보했음은 사상 처음 밝혀지는 것으로 적지 않은 논란이 일 것으로 보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대용 공사가 지난 2010년 5월 출판한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라는 자서전에는 공국장이 외교관 1명의 전향을 미국측에 통보한 날인 1978년 11월 2일 치화형무소 내에서 처음으로 한국정부의 훈령을 받았다며 그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정부가 외교관들의 북한 전향을 우려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 공사는 이 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1978년 11월 2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우리 외무부 장관 훈령이 나에게 하달되었다. 옥중에서 처음 받는 본국훈령이었다. 1. 현재 한국대표단, 월공대표단, 북괴대표단은 월남에 억류되어 있는 이공사, 서영사, 안영사의 석방을 위해 3자회담을 하고 있음. 2. 억류되어 있는 한국외교관 세명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으로 강제 납치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임. 3. 북괴요원들의 어떠한 협박, 공갈에도 겁내지 말고 북한에 가겠다고 동의하지 말 것.”
이 공사는 또 “1978년 9월 25일부터 약1주일간 ‘남한 불바다 발언’으로 유명한 박영수 등 3명으로부터 외교관 3명이 분리심문을 받고 전향서를 쓰고 북한으로 가자는 협박을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공 국장이 미국에 외교관 1명의 전향사실을 통보한 날, 옥중의 이 공사에게 외교관 석방을 위한 3자회담 개최사실을 알리고 북한에 강제납치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훈령이 전달된 것은 억류 외교관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1978년 9월 26일 미 국무부에 보고한 ‘베트남억류 한국외교관-뉴델리협상’이라는 제목의 비밀전문[서울 8578]에 따르면 공로명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은 같은 날 아침 주한미국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뉴델리협상 전반에 대해 설명하고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명시돼 있습니다.
이 전문에 따르면 한국정부는 1978년 6월 뉴델리협상 제안을 처음 받았습니다. 이 전문에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이 협상은 프랑스 정부가 중재에 나선데 따른 것입니다. 이 전문에서 공국장은 회담의제만을 정하는 예비회담에 수석대표로 참석했으며, 북한측은 회담명칭을 ‘베트남의 한국인과 한국에 억류중인 남조선 혁명전사에 관한 토론’으로 정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공국장은 외교관을 마치 간첩으로 보는 듯한 이같은 명칭에 반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공국장은 이 예비회담에서 남북한과 베트남 등 3자는 회담의제로 교환비율, 대상자 이름, 교환절차 등 3가지로 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회담에서 북한과 베트남이 교환비율은 국제관례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 한국도 동의하자 북한은 1970년 브라질의 선례를 따르자며 외교관 1명당 한국에 체포된 북한 간첩 70명꼴로 교환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브라질의 선례란 브라질 게릴라에게 납치됐던 주요국 대사와 공사 등의 석방교섭때 브라질 정부와 게릴라간 맞교환 비율을 말합니다. 스웨덴 공사 납치때는 1:70, 독일대사 납치때는 1:40, 미국대사 납치때는 1:15, 또 다른 외교관 납치때는 1:4등의 비율이 적용됐습니다. 1970년 사례란 스위스공사 석방때 비율 1:70을 일컫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정부는 북한이 브라질의 선례를 언급함에 따라 북한의 요구가 70명에서 40명, 15명, 4명 등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협상에 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지금까지는 이대용 공사나 이종찬 전 국정원장등을 인용, ‘북한이 억류외교관 석방대가로 북한 간첩 5백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외교관 1명당 150명의 석방을 요구했다’는 보도나 다큐멘터리가 잇따랐으나 실제 북한의 첫 제의는 이처럼 브라질의 선례를 따라 외교관 1명당 70명의 석방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9월 13일 베트남이 전면에 나섰습니다. 이날 비공식접촉 때 베트남측은 “한국이 9월17일까지 전향적인 새 제안을 하지 않으면 북한대표단은 평양으로 돌아갈 것이며 한국외교관 석방은 북한동의 하에서만 가능하다. 특히 현 회담체제를 통해서만 외교관 석방이 가능하다”고 한국측을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1979년 이후 베트남과 중국과의 갈등에서 북한이 중국편을 들자 베트남이 진노하고 북측을 불신하게 되면서 이 합의는 교환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스웨덴 정부의 중재 노력 등에 힘입어 이대용 공사 등은 1980년 4월 11일 극적으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