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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해방시키시는 분을
준비하라
이스라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70년 후에 포로에서 놓여날 것이라 하셨다. 그 프로그램대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다. 언약하신대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해빙시키시는 분이다. 그것도 기쁘게 언약하신대로.
그래서 우리가 주안에서 소망을 품고 있어야 한다. 소망만 아니라 주님께서 지시하신 말씀,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을 행하여야
한다. -김혜수 목사의 ‘소망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에서-
구원하러 오실, 구출해 주실 하나님을 대망하면서 말씀을
항상 들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하러 오셨는데도 미련한 다섯 처녀처럼 신랑 맞을 준비를 못하면 구원의 날 구출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생이 너무나 좋아도 안 됩니다, 너무 좋아 천국에 안 가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행하고 기름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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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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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만일=置熏恝痢� |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며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잠
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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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무현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책아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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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렘 12:1-4 |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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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론>이란
실존적 세계 속에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며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묻는 고색창연한 신학적 담론입니다. 신학은 때로 우리가 가진
왜곡된 신앙의 틀을 깨고 참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사실 우리는 지금도 어쩌면 거짓된 신앙의 틀에 갇혀 진정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기독교 교양서적의 고전이 되어버린 책 찰스 쉘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는
갑자기 찾아오신 진짜 예수님을 내가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물으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필요하여 내 구미에 맞도록 만든 신이 아닌
진짜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우리는 부단히 물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신정론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한
이유는?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여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1절). <악한 자의 형통>, <반역자의 평안>. 이른바 신정론의 문제입니다.
욥기의 화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정의로우신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세상이 이렇게 불합리할 수 있는가? 악인은 떵떵거리며 잘도
사는데 의인은 어째서 날마다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이런 신정론적 문제에 대해 욥기는 이렇게 답합니다. <고통이란 반드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고 하나님의 심오하신 섭리의 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찬양하는 삶의 위대한 가치를 밝히고
이 세상 모든 역사와 인간의 생사화복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임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의 형통과 반역자의
평안을 부러워하거나 너무 고통스러워 마십시오. 그것은 오직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그칠 때까지, 악한 자의 형통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징계를 이루실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허용된 형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이 땅에
슬픔이?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4절).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다윗도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진노보다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마치 잘못한 아이를 회초리로 때리지만 금새 사랑으로 그 아픔을 달래주는 부모의 심정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징계하시지만 곧 다시
그 품에 안아주십니다. 그러므로 <노염은 잠깐, 은총은 평생>이라는 것이고, <저녁에는 울음, 아침에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기억하며 자포자기하거나 끝까지 절망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유다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는 대체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온 땅이 황폐할 때까지>(10-11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는 <언제까지>라는 질문보다 늘
뼈아픈 <자기 성찰>이 훨씬 더 절실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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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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