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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열쇠, 저녁의 자물쇠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은 “영국의 모든 군대보다 존 녹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고 말했고 존 웨슬리는 “기도는 나의 발전소”라고 고백했다. 그레이엄은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자물쇠”라고 했는데 이 말은 기도로 하루의 삶을 열고 기도로 하루의 삶을 마친다는 뜻이다.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기도의 힘보다 강한 것은 없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이순창 목사의 ‘쉬지 말고 기도합시다.’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험을 기도로 물리쳤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거나 계속 기도하지 않는 자는 환난을 당하면 비겁한 자가 됩니다. 또한 참 기도는 말이 아니요, 하나님이 내 열린 마음속에 오시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입니다. 그 분의 뜻대로 살려는 경건한 자세로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힘보다 강한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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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옥엽 국제펜클럽 회원 순수문학인협회 상임 이사 크리스챤문학상 수상 대한예수교장로회 숭인교회 유병수 담임목사 사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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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만 있으면=.> |
‘나한테 이런 초능력만 있으면 뭐든 잘 할 수 있을 텐데..’ 자신에게 무언가가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을 이룰 수 없다며, 결국은 주저앉아 있진 않나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졌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인법이나 주문이 아니라 두손 모아 기도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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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무현 일러스트레이터- 그림책아저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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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 깎는 자 앞에서 - 사 53:7-9 |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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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포근한 털을 모두 깎이면서도 잠잠한 양처럼 주님은 그렇게 그 처절한 모든 고난을 묵묵히 당하셨습니다. 털을 모두 깎인다는 것은 곧 벌거숭이가 되는 부끄러움과 추운 시련에 처했음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헤롯이 …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눅 23:9-10).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7절). 세례 요한은 주님에 대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4:29)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의 사명이요 숙명인 속죄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희생양이 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으로 뜻하지 않게 십자가에 달리신 게 아니고 처음부터 도수장으로 끌려가실 어린양으로, 희생양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대로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신 분이십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 집사가 주의 사자의 지시로 광야에 나갔다가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하는데 당시 그 내시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양>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에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가 그 어린양이심을 증거하자 그가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본래는 우리가 다 도수장으로 끌려가야 했는데 주님이 대속의 희생양이 되셔서 우리 대신 끌려가셨습니다. <어린양>, <희생양>, <대속의 양>이신 주님을 기립시다. 주님의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을 묵상하며 진심어린 감사와 영광을 바칩시다.
곤욕과 심문을 당하심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8절). 주님이 중죄인 취급을 당하시며 온갖 곤욕과 심문을 다 당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고 억울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원래 죄가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고후 5:2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주님의 곤욕 당하심과 문초 당하심은 지극히 공의로운 일이었습니다. 주님이야 말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무죄한 분이 아니라 중한 죄인으로 법정에 서신 것이고, 또 재판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사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본디 우리가 법정에 서고 심문 당하고 또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곤욕을 받아야 옳았음에도 그 모든 치욕을 주님이 다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대속이 100% 주님의 은혜인 까닭은 우리의 죄값을 주님이 그렇게 고스란히 다 당하셨고, 나는 더 이상 내 죄에 대해 책임질 부분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내어줌이 되셨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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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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