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책의 향기]‘폭탄주 神學’에 빠진 한국 개신교/ 동아일보

鶴山 徐 仁 2014. 2. 16. 14:57

 

[책의 향기]‘폭탄주 神學’에 빠진 한국 개신교

기사입력 2014-02-15 03:00:00 기사수정 2014-02-16 12:44:08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신광은 지음/512쪽·1만8000원·포이에마


 

 

네덜란드 출신의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왼쪽)와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장 칼뱅이 동맹을 맺는 모습. 개신교 역사에서 이는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될 정도로 두 사람의 신학은 논리적 모순 관계에 있다. 이를 조화롭게 통합하려는 흐름을 서양에서 칼미니즘(Calminism)이라 부른다. 신광은 목사는 한국교회에선 그 반대로 두 신학의 최악의 조합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아르뱅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포이에마 제공
TV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되면서 정도전 관련 책이 앞다퉈 쏟아지고 있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을 디자인한 혁명아로서 그를 조명하는 책들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정도전 붐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운위되는 시대에도 역설적으로 새 시대의 비전을 제시할 ‘신념의 인간’에 대한 무의식적 갈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시대에는 늘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다. 고려의 건국이 선종 불교의 전파와 결부돼 있고 조선의 건국이 성리학의 전파와 연관돼 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기독교 전파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닌다. 중국과 일본에서 주자학이 양명학과 고증학, 천주학으로 대체되는 동안 무풍지대였던 한국사회의 수백 년에 걸친 이념적 갈증과 허기를 채워준 것이 기독교(특히 개신교)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랬던 한국 개신교의 총체적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일부 목사들의 일탈과 비행, 교계 내부의 반목과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가 19.4%로 가톨릭(29.2%)이나 불교(28.0%)보다 낮게 조사됐다.

 

 

저자 신광은 목사 

 

 

양식 있는 기독교도들은 이런 현상을 일부 목회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치부한다. 하지만 침례교 신학자인 신광은 목사(46)의 진단은 다르다. 개개인의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개신교 전체의 신학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핵심은 한국 개신교가 양립하기 힘든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멋대로 짬뽕한 ‘아르뱅주의’에 있다.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 장 칼뱅(1509∼1564)이 창시한 칼뱅주의와 그 손제자격인 네덜란드 출신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가 창시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400년 넘게 대립하고 있다. 한때 패배하는 듯했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18세기 감리교를 창시한 영국의 신학자 존 웨슬리(1703∼1791)를 만나면서 부흥했다.

핵심은 구원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장로교와 뿌리가 닿는 칼뱅주의는 내가 구원을 받을지 말지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미리 정해놨다는 예정론을 토대로 신학을 전개한다. 내가 기독교도가 되느냐 마느냐도 예정된 것이다. 그래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그런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 수 없다. 다만 신실한 신앙생활(내적 증거)과 도덕적 실천(외적 증거)을 통해 구원의 가능성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칼뱅주의자들이 도덕적 삶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이유다.

반면 감리교의 뿌리격인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예정설을 부인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미리 결정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주체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구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부인하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구원받을지 아닐지를 예지로 알고는 있지만 미리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접만 하면 구원이 가능한가? 아니다. 언제든 타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회개와 보속이 필요하다.

불교로 치면 칼뱅주의는 돈오론이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점수론이다. 성리학으로 보면 칼뱅주의는 주리론이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주기론이다. 조선의 당색으로 치면 칼뱅주의는 벽파요,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시파다.

문제는 한국 개신교가 편의에 따라 이 둘을 뒤섞은 ‘폭탄주 신학’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영접했으니 구원받았다는 주장을 할 때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내세우다가 자신들의 윤리문제가 불거지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칼뱅주의로 내뺀다. 남의 신앙엔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신의 신앙엔 칼뱅주의를 적용하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정체불명의 팔자주문만 외워댄다는 것이다.

“목사라고 하는 자들이 간통을 하고, 논문을 위조하고, 여신도들을 성추행하고, 불법으로 세습하고, 교회의 재정을 제멋대로 유용하고, 배임하더라도, 그러한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선택받았으니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칼뱅주의의 무조건적 선택이라는 용어를 기꺼이 가져다 쓴다.”

“아르뱅주의는 구원의 길을 조금이라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있으면 이를 가차 없이 제거하여 가급적 쉬운 길로 만들어버린다. 즉, 아르뱅주의자들은 선택자들에게만 구원의 문이 제한적으로 열려 있다는 칼뱅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기꺼이 선택한다.”

저자는 이런 아르뱅주의가 개신교가 그토록 증오했던 ‘면죄부’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개신교의 정신을 배반하고 예수의 숭고한 가르침을 ‘값싼 구원’으로 팔아넘긴다는 것이다. 어떤가. 드라마 속 정도전이 고려 권문귀족을 향해 토해내는 사자후를 조선후기 사대부들에게 고스란히 적용해도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이는 것과 너무도 닮지 않았는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