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인류역사상 가장 비참한 전쟁으로 기록되는 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맞아 대전쟁의 원인, 경과 및 결과를 오늘의 시각에서 재조명해봄으로써 또다시 험악한 국제정치적 격변기를 맞이한 이즈음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교훈을 도출해볼 수 있을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연구한 전쟁이며 수많은 전쟁이론을 산출해낸 전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은 아직도 그 원인, 경과 및 결과에 대해서 논란이 해소되지 않은 전쟁으로 남아 있다. 국제정치학자들에게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이론 발굴을 위한 무궁무진한 광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이춘근 박사의 전략이야기'에서 1년 동안 기획으로 1차 세계대전 기획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19세기에 이룩된 여러 차원에서 인류의 진보는 20세기를 맞이하는 세계인, 특히 유럽인들을 극도의 낙관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했다. 산업혁명을 통한 엄청난 생산성 향상, 소통 및 교통 방식 변화, 국가간 무역 확대는 유럽 사람들에게 전례 없는 부(富)를 가져다 줬다. 노만 엔젤(Norman Angel) 같은 낙관론자들은 국가간 무역 거래가 이처럼 광범하게 이뤄지는 세상에서, 그리고 기관총처럼 엄청난 살상무기를 가진 인간들이 이제 또다시 전쟁을 할 바보 같은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 진단했다. ‘국가간 무역 확대는 국가간 평화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는 논리적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경험적으로는 별로 타당성이 없는, 그저 그런 이론들이 보통 사람은 물론, 국가정책을 담당하는 정치가들을 홀렸다.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연원한 소위 맨체스터 학파(Manchester School)는 ‘싸우지 말고 장사를 하자’(Let’s trade Not War)고 소리쳤다. 1차 세계대전은 맨체스터 학파가 승리를 거둔 세상에서 발발한 역설이다. 당시 국가들의 무역 의존도는 오늘날보다 오히려 더 높은 15%대에 이르고 있었다. 세계 GDP 중에서 국제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을 세계화 측정의 지표로 본다면 1914년의 세계화 수준은 오늘날의 세계화 수준을 오히려 앞선다. 세계화가 최고로 진행됐던 1914년 세계는 최악의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대전쟁을 초래한 의외의 사건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작금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 국제정치를 방불케 하니 말이다. 무역의 증대가 평화를 촉진하는 조건이라면 지금 미국과 중국은 어느 때보다 평화롭게 지내야 할 것이다. 무역거래량이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한 미래에 미국과 중국의 전쟁은 상상할 수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지금 한일 간의 갈등은 무역량이 적어서 야기되는 것이며 일본과 중국의 갈등은 두 나라가 무역을 많이 하지 않아서 야기되는 일인가? 우리나라 국민, 전문가, 정치가 대부분은 북한과 어떤 종류의 것이라도 거래를 확대해야 평화가 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가급적 자주 만나야 하고 베풀어야 하고 대화해야 한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은 인간과 국가의 거래와 교류가 가장 최고에 달했던 시점에서 발발한 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다. 거래와 교류가 빈번한 사람들과 국가들은 이익이 충돌할 가능성도 함께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익 충돌의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 국가들은 다투고 전쟁할 가능성도 함께 높아지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정말로 별볼 일 없는 이유 때문에 발생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세르비아의 10대 소년 프린치프(Gavrilo Princip)에 의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황태자 페르디난드(Franz Ferdinand) 암살사건은 세계대전을 촉발할 만한 잠재력이 전혀 없는 사건이었다. 프린치프는 당시 반 오스트리아 운동 또는 대 세르비아주의 운동에 의해 조종 당한 것이다. 7명으로 구성된 세르비아 청소년 암살단이 암살에 성공할 확률도 높지 않았다. 그 날 일어난 암살사건에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요인이 너무 많았다. 황태자 부부를 잃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조세프(Franz Josef)와 국민들은 분노했다. 마침 독일의 빌헬름 황제(Kaiser Wilhelm)도 공분했다. 빌헬름 황제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르비아에 대해 무슨 일을 해도 전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세르비아 정부는 직접 책임은 없었지만 암살 음모를 막지 못한 것을 문책 당했다.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24시간 이내에 회답을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발동했다. 세르비아는 답하는 대신 군 총동원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7월 28일 대 세르비아 선전포고를 발동한 오스트리아는 7월 29일 세르비아의 수도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슬라브족 국가인 세르비아가 압살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미 7월 25일부터 오스트리아에 경고했던 러시아는 7월 29일 부분적 동원령을 내려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고자 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시작되자 러시아는 군 총동원령을 내렸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은 당연히 독일까지도 전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독일은 프랑스에 자신이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냐를 묻는 최후 통첩을 발했다. 8월 1일 독일은 총동원령을 발하고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당시 독일의 군사전략은 슐리펜 플랜(Schliffen Plan)이라는 것으로 프랑스를 먼저 격파한 후 러시아와 싸우는 전략이었는데 이미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린 황당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바보들의 행진 같은 날 프랑스 정부도 총동원령을 내리고 독일에 대한 중립을 거부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러시아를 격파한 다음에 닥쳐 올 유럽의 세력 불균형을 두려워했다. 8월 2일 독일은 벨기에에 대해 통과권을 요구했다. 당연히 벨기에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 공군이 뉴렌베르크 상공을 비행했다는 구실로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영국은 7월 31일 프랑스, 독일을 향해 벨기에의 중립을 엄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벨기에의 중립이 깨지자 영국 여론은 비등해졌고 8월 3일 영국의회는 전쟁 예산을 통과 시켰다. 8월 4일 영국과 독일은 외교를 단절했고 8월 5일 영국은 독일을 향해 선전포고했다. 단 1주일 만에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전쟁 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1차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처럼 어이없는 상황 진전을 바바라 터크맨(Barbara Tuchman)은 ‘바보들의 행진’(March of Folly)이라고 말했다. 이춘근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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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이론과 낙관론이 초래한 최악의 비극
이춘근 박사의 전략이야기 -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 연중기획
이춘근(미래한국)
[ 2014-01-29, 09:4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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