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삼국통일에 관한 연구

鶴山 徐 仁 2014. 1. 25. 19:37

 

통일대왕 文武王의 유언

 

 

趙甲濟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통일대왕 文武王(문무왕)의 유언은 권력자의 유언으로서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담담하다. 죽음을 맞아 모든 것을 비운 사람의 담백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부를 소개한다.
  
   <(前略) 山谷(산곡)은 변하고 세대는 바뀌기 마련이다. 吳王(손권)의 北山 무덤에 금으로 채색한 새를 볼 수 없고 魏主(조조)의 西陵(서릉)에는 오직 銅雀(동작)의 이름만 들을 뿐이라. 옛날 萬機(만기)를 다스리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고만다. 草童(초동) 목수는 그 위에서 노래하며, 여우 토끼는 그 곁을 구멍 뚫는다. 한갓 자재를 낭비하여 虛事(허사)와 비방만을 책에 남기고, 헛되이 人力만 수고롭게 할 뿐 사람의 영혼을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아픔은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내가 즐겨하는 바 아니므로, 죽은 뒤 10일이 되면 庫門(고문)의 바깥뜰에서 인도의 식에 따라 화장하여 장사지내고, 服(복)의 輕重(경중)은 규정이 있으나 喪(상)의 제도는 애써 검약하게 하라. 邊城(변성)의 鎭守(진수)와 州(주), 縣(현)의 과세도 꼭 필요치 아니하면 모두 헤아려서 폐하고, 율령과 격식중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고치도록 하라. 사방에 포고하여 이 뜻을 널리 알게 하고, 소속 官員(관원)은 곧 시행하라.>
  
   문무왕의 인감됨을 느끼게 해주는 이 유언은 천하大亂(대란)의 시대에 태어나 山戰水戰(산전수전)을 다 거친 大人物(대인물)의 폭과 깊이를 드러낸다. 바로 이 文武王이 모든 것을 걸고 對唐(대당)결전을 선택하여 唐을 축출, 한반도를 韓民族의 생존공간으로 확보한 분이다. 50대에 죽은 문무왕 金法敏(김법민)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그 재를 바다에 뿌리게 한 것은, 권력을 잡았다고 오만과 위선에 빠져 있는 인사들에게 주는 좋은 가르침이 아닌가. 민족사상 최대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 죽음 앞에서 보여주고 있는 인생無常(무상)의 겸허함!

[ 2014-01-24, 00:10 ]

 

 

 

 

 

金庾信(김유신)의 통일정신 연구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趙甲濟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고려 仁宗(인종)시대의 權臣(권신)이기도 했던 金富軾(김부식)이 쓴 三國史記(삼국사기)일 것이다. 이 책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약 1000년간의 역사는 암흑 속으로, 또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이 중요한 三國史記는 申采浩(신채호) 같은 사람들에 의해 反민족적·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신라중심으로 쓰여졌다는 오해와 비판을 받아왔다. 기자도 이런 그릇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이 50 가까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인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서양의 문필가가 성경을 나이 50에 읽는 것과 같지 않을까).
  
   늦게 읽은 만큼 감동은 컸다. 正史(정사)답게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 正色(정색)을 하고 쓴 책이기 때문이다. 삼국과 통일신라를 중심에 놓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三國史記는 뒤에 나온 또 다른 正史 高麗史(고려사)에 비해서 월등한 주체성을 띠고 있다. 기자는 三國史記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신라통일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통일 주체세력들의 숨소리와 민중의 鼓動(고동)을 듣는 것 같았다. 통일 3傑(걸)-金春秋(김춘추), 金庾信(김유신), 文武王(문무왕)의 경륜과 전략, 화랑도 출신 장수들의 장렬한 삶과 죽음. 이들이 펼치는 드라마와 人間像(인간상)은 우리 역사에서 그 뒤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1945년 이후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가 언젠가는 우리 민족사의 두 번째 황금기로서 이 시기와 비견될 것이다.)
  
   로마시대·중국 戰國(전국)시대·일본 명치유신 시대의 영웅들을 연상시키는 신라통일기의 主役(주역)들 특히 그들의 집념, 명예심, 자주성, 국제적 視覺(시각), 武人(무인)으로서의 교양은, 『아 이런 분들이있었기에 신라가 唐(당)을 이용하고 또 唐과 맞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과 나를 존재하게 했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列傳(열전) 부분의 金庾信傳(김유신전)에 명문이 많다.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프므로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민망히여기시어 方術(방술)을 가르쳐주십시오>(17세 때 석굴에 들어가 기도할 때 나타난 難勝(난승)이란 도사에게 金庾信이 하는 말).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백제를 멸망시킨 후 唐이 신라까지 칠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뤄진 御前회의에서 金庾信의 발언)
  
   이런 金庾信의 決戰(결전)의지에 꺾인 唐의 원정군사령관 蘇定方(소정방)은 그냥 돌아간다. 唐 고종은 그를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三國史記 김유신 열전 부분은 전하고 있다.
  
   <고종: 『어찌하여 新羅(신라)마저 정벌하지 아니하였는가?』蘇定方: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래사람들은 그 윗사람을 父兄(부형)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가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애국심과 義理(의리)로써 똘똘 뭉친 나라 - 이것이 新羅가 삼국통일을 하고 唐과 맞서 自我(자아)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요사이 式으로 번역하면 「대통령과 정치인과 국민들이 단결한 나라이므로 大國(대국)의 힘을 믿고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무릇 장수가 된 자는 나라의 干城(간성)이요 임금의 爪牙(조아·어금니)로서 승부의 결단을 矢石(화살과 돌) 가운데서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위로는 天道(천도)를 얻고 가운데로는 人心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살아 있고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하다. 지금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들의 굽은 곳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떠나는 김흠순, 김인문 두 장군에게 김유신이 충고하는 내용)
  
   <신의 우매함과 불초함으로 어찌 국가에 이익이 되었겠습니까.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의심치 않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기에 조그만 공을 이루어 三韓(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은 두 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지나 또한 小康(소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계승하는 임금이 처음은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끝까지 다하는 일이 적어 累代(누대)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守成(수성)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염려하시어 小人(소인)을 멀리 하고 君子(군자)를 가까이 하십시오. 조정은 위에서 화평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안정되어 재앙과 난리를 만들지 않고 국가의 基業(기업)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병문안 온 文武王에게 남긴 김유신의 유언)
  
   <아내에게는 三從(삼종)의 의리가 있는데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 元述(원술) 같은 자는 이미 先君(注-김유신을 지칭)의 자식 노릇을 못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패전하고 돌아온 金庾信의 차남 원술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金庾信의 큰 권모술수
  
   삼국사기를 통해서 기자가 만난 인물이 金庾信(김유신)이다. 兵權을 쥔 제2인자로서 수십년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모시고 統一大業에 精進(정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인자인 왕과 병권을 쥔 2인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共存(공존)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1인자가 군대를 장악한 2인자를 의심하는 순간 2인자의 운명은 刑場(형장)이거나 쿠데타에 의한 역습이다. 金庾信은 至誠(지성)으로 1인자를, 왕들은 존경으로 그를 대했다. 金富軾(김부식)은 金庾信傳의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평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었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고 꾀를 쓰려 할 때 이를 들어줌으로써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지 않게 하였다>
  
   부리는 왕과 부림을 받는 金庾信 사이의 이런 신뢰관계가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金庾信은 꾀를 부려 누이 문희를 金春秋(김춘추)에게 시집보냈고 金春秋와 그 누이한테서 난 딸을 아내로 맞았다(당시는 近親결혼 풍습이 있었다). 문무왕은 金庾信 여동생의 아들, 즉 생질이기도 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가야왕실의 후손인 金庾信은 이런 혈연관계를 통해서 신라왕족과 두 王의 安心(안심)을 산 뒤 자신의 야망-삼국통일을 해낸 것이리라. 권모술수와 전략전술을 겸비한 金庾信이야말로 정치군인의 한 典型(전형)이겠다.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일이다」는 말이 있듯이 金庾信이 순수한 군인이었다면 삼국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金庾信은 권모술수에 통달하되 그것을 개인의 영달이나 집권이 아닌 민족통일국가 건설이란 보다 큰 차원의 명제로 승화시킨 대인물이다. 그래서 기자는 그를 「한민족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定義(정의)하는 것이다. 자유통일의 문이 열리는 시대에 김유신의 통일 리더십을 생각해본다.
  
  

[ 2014-01-23, 23: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