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2020 도쿄올림픽, '극우 막말' 이시하라가 북치고 장구쳤다는데…
입력 : 2013.09.14 03:02
"올림픽의 영광, 다시 한번"
7년前 후보 도시 정할 때… '미래지향' 내세운 후쿠오카
도쿄의 '과거회귀'에 밀려
후쿠오카 발표자 한국인에… 이시하라 "건방지다" 막말
이시하라의 재도전
작년 올림픽 퍼레이드 열어… 50만명 몰리며 향수 자극
'국수주의' 이시하라의 꿈… '보수주의' 아베 총리 만나
결국 올림픽 유치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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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수주의자 이시하라 신타로가 기획하고 보수주의자 아베 총리가 유치한 2020년 도쿄올림픽은 어떤 올림픽으로 기억될까. 지난 7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제125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 도쿄가 2020년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선정되자, 아베 신조(安倍晋三·오른쪽에서 둘째) 일본 총리 등이 환호하고 있다. / 로이터
두 도시는 각각 연사 6명을 내세웠다. 최종 프레젠테이션은 표심(票心)을 흔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에, 정상급 스타를 내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도쿄는 야구스타, 스타 코미디언을 내세워 정석대로 갔다. 그런데 후쿠오카의 프레젠테이션은 이례적이었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연사로 한국인 2명을 내세우는 파격을 연출한 것이다. 재일교포 2세인 강상중(姜尙中) 당시 도쿄대 교수(현 일본 세이가쿠인대 학장)와 서울 한영외국어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다혜(崔多慧)양이었다.
이런 연출은 후쿠오카가 내세운 '아시아 화합'과 연관돼 있었다. 후쿠오카는 일본 서부 규슈(九州)섬에 위치한 대도시. 일본 대도시 중 한국과 중국에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는 특히 한국의 지원을 받는 올림픽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 시대'를 앞당기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연사로 나온 강 교수와 최양은 이런 목표의 상징이었다.
반면 후쿠오카와 대립한 도쿄의 올림픽 계획은 골수 국수주의자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郞) 당시 도쿄도 지사 한 사람에 의해 백지상태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2005년 9월 20일 그가 올림픽 도쿄 유치를 선언하면서 그 이유로 내세운 말이 "일본을 뒤덮은 폐색감(閉塞感·고립감)을 깨버리고 (1964년 도쿄올림픽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고도성장기에 열린 1964년 도쿄올림픽은 일본의 전후 부흥을 상징하는 대회. 이시하라가 도쿄올림픽 개최를 주장한 2005년 당시는 경제의 장기침체와 총리(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일본의 경제·외교적 고립이 심해지던 때였다. 후쿠오카가 이런 고립을 '아시아 화합'을 통해 돌파하려고 한 것이라면, 도쿄는 '과거의 재현'을 통해 돌파하려고 한 것이다. 도쿄의 올림픽 정신은 처음부터 '과거 회귀'의 성격이 뚜렷했던 것이다.
연사로 나온 강상중 교수가 강력히 비판한 것이 도쿄올림픽의 과거지향적 성격이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한 번 더? 이상이 없는 올림픽으로 세계인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강 교수는 도쿄올림픽을 "부자의, 부자에 의한, 부자를 위한 올림픽이 될 것"이라고 공격했다.
결국 후쿠오카는 거대도시의 자금력에 밀려 33대 22로 패했다. 후쿠오카의 프레젠테이션은 인상적이었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하고 표 차이만 줄이는 데 그쳤다. 산케이신문은 "도쿄의 재정력이 후쿠오카의 인간력(人間力)을 눌렀다"고 평가했다. 후쿠오카의 승리, 즉 이시하라의 패배를 위해 각계 인사들이 연합해 노력했지만, 도쿄의 자금력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몇년 뒤 후쿠오카를 대신해 2020년 올림픽 도전에 나선 원폭 피해지 히로시마(廣島)도 후쿠오카 유치를 지원하던 도시였다.
도쿄가 승리하자 현장에서 바로 이시하라의 본성이 튀어나왔다. 기자들 앞에서 강상중 교수를 향해 "건방진 녀석" "수상한 외국인"이라는 막말을 쏟아낸 것이다. 당시 규슈 출신 자민당 국회의원이던 야마자키 다쿠(山崎拓)가 "대신 사과한다"고 말할 정도로 올림픽 행사에서 나올 수 없는 난폭한 언사였다. 도쿄올림픽은 국수주의자 이시하라의 막말과 함께 탄생한 것이다. 그런 그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대해선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과 비슷하다"고 맹비난했다. 이 때문에 당시 일본 주간지 아에라(AERA)는 도쿄올림픽을 "이시하라 지사의 불꽃놀이"라고 표현했다.
◇꺼진 불씨를 살린 이시하라
도쿄의 2016년 올림픽 개최 노력은 2009년 10월 2일 IOC 투표에서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패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일본 도시가 하계올림픽 유치전에서 패한 것은 나고야가 한국 서울에 패한 1988년 올림픽, 오사카가 중국 베이징에 패한 2008년 올림픽 이후 3번째였다. 하지만 이시하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때 이시하라의 도쿄에 맞선 도시는 후쿠오카를 지원했던 히로시마였다. 히로시마는 2차대전 당시 나가사키(長崎)와 함께 미국의 원자폭탄에 초토화된 도시다. 전후 최대 우방이 된 미국만 양해한다면, '평화와 부흥'이라는 미래지향적 정신을 전면에 내세워 세계를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과 그 직후 열린 4·12 지방선거가 대세를 갈랐다. 대지진으로 일본 경제가 타격을 입으면서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는 자금력을 가진 도시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히로시마도 그랬다. 도쿄에선 이시하라가 4선에 성공했지만, 히로시마에선 올림픽 반대파 후보가 승리했다. 히로시마는 선거 이틀 뒤 올림픽 유치를 철회했다. 2020년 유치전에선 싸워 보지도 않고 이시하라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2016년 올림픽 유치전에서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해 패배한 이시하라는 이번엔 지진 피해 지역의 지지 선언을 유도함으로써 외연을 넓혔다. 런던올림픽 직후인 2012년 8월 20일엔 난데없이 도쿄 도심에서 올림픽 선수단 환영 퍼레이드를 개최해 예상을 깨고 시민 50만명을 끌어모으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행사는 당시 일본의 과거 회귀 흐름과 맞물리면서 도쿄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수직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운도 따랐다. 이시하라는 작년 도쿄도 지사를 중도 퇴임하고 정계에 진출해 야당을 이끌고 있다. 그런데 2006년 이시하라의 올림픽 구상을 지원했던 아베 신조(安倍晉三) 당시 관방장관이 2012년 12월 16일 정권을 잡고 두 번째 총리에 오른 것이다. 아베 총리는 2013년 1월 8일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위원회 최고고문에 취임하면서 올림픽 유치를 정부 차원의 과제로 끌어올렸다. '국수주의자' 이시하라의 올림픽 야망을 '보수주의자' 아베 총리가 계승한 것이다. 아베 총리의 외조부이자 정치 스승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역시 1964년 도쿄올림픽 유치위원회 최고고문을 맡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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