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군번은 3275502입니다. 1967년 3월1일 공군사병으로 지원입대, 1970년 6월30일 병장으로 제대하였습니다. 당시 공군사병의 복무기간은 3년. 제대 즉시 대학 3학년으로 復學(복학)하려고 입대시기를 봄으로 맞추었던 것입니다. 저의 이런 설계도를 무효화시켜버린 것은 金新朝(김신조) 부대, 즉 북한의 124군 특수부대였습니다. 1968년 1월21일 추운 겨울날 밤 이들에 의한 청와대 습격 기도사건은 저의 복무기간을 4개월 연장시켰고 「제대 즉시 복학」 아닌 「제대 즉시 취직」의 길을 걷도록 했습니다. 역사적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인생항로에 직간접의 영향을 주는 법입니다.
그래도 저는 군대에 신세를 많이 진 몸입니다. 저는 대학 중퇴의 학력밖에 없지만 군대에서는 두 학교를 졸업한 학력을 갖고 있습니다. 대전 항공병학교(이등병 졸업)와 통신학교(일등병 졸업). 신병훈련소인 항공병학교에 다닐 때는 결핵성 급성늑막염에 걸려 한 40일간 병원신세를 졌습니다. 사병 161기로 입대했지만 입원사태로 163기와 함께 훈련소를 나왔기 때문에 저는 일종의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저는 「기수는 졸업 기준이 아니라 입대 기준」이라면서 몇 차례 주먹다짐을 벌인 끝에 「161기 대우」를 쟁취하여, 수료를 같이 했다고 저와 맞먹으려는 163기 졸병들을 후배로 다룰 수 있었습니다.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代價(대가)를 치르면서 찾아먹는 것임을 뼈저리게 체험했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익힐 수 있었습니다. 동해안 산꼭대기 레이더 기지에서 미군과 함께 근무하면서 영어를, 일본의 항공자위대와 연락하면서 日語(일어)를 썼으니까요. 저의 특기는 요격관제. 덕분에 기자가 되어서 항공사고를 취재할 때는 군복무 시절의 배움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남자들끼리 만나서 한 시간쯤 이야기하다가 보면 군대 갔다 온 사람과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을 90% 이상의 확률로써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이 저만의 본능은 아닐 것입니다. 3년 정도의 공통체험이 주는 분위기, 또는 문화라는 것이 인격에 묻어 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협동심, 그리고 인내심이 사병 체험자들의 몸에 밴 어떤 분위기가 아닌가 합니다. 장교 출신들일 경우 지도력이 덧붙여질 것입니다.
병도 고치고 권리의식도 익히고 외국어에다가 비행기에 대한 거의 전문적인 지식도 얻고… 저는 대학에서보다 군대에서 훨씬 많은 실용적인 것들을 배웠습니다. 金新朝씨 일행 때문에 마치지 못한 대학교육을 채우고도 남을 만한 것들을 얻고 「어떤 자신감」을 품고서 저는 3년4개월 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떤 자신감」이란 졸병으로서 모두가 경험하는 육체적, 정신적인 극한상황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이유만으로 귀여워해주고 떠받들어주는 부모 품과 가정을 떠나 일개 官物(군인을 뜻하는 영어의 GI도 Government Issue, 즉 官給이란 말이다)로 전락했을 때, 「신고빠따」 「선착순」 「원산폭격」을 당하면서 인격과 인권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리하여 인간이 가진 적나라한 본성을 확인했을 때 인간들은 강인해지는 법입니다. 더 떨어질 데 없는 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할 때 위기를 만나면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에이 군대생활 하는 셈 치지 뭐』하면서 용기를 동원해내기도 합니다.
삼천만의 不寢番이 되어
이쯤까지 읽으신 분들 가운데는 『당신 지금 뭣하는 거야? 군사문화 칭송하는 거야?』라고 화를 내실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10월1일 국군의 날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군사문화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제가 3년간 근무한 대대에서는 두 명이 죽었습니다. 한 사병은 초소에서 카빈으로 자살했고 다른 사병은 집합시의 구타로 숨졌습니다. 지금도 우리 국군에서는 연간(年間) 수백명이 사고사(事故死)를 당합니다. 몇년 전 이스라엘 군대를 취재하면서 事故死 통계를 비교해 보았더니 우리 군대와 비슷했습니다. 군대에 갔다가 성한 몸으로 제대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전시나 평화시나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입니다.
제가 기자로서 목격했던 숱한 죽음들보다도 군대생활할 때 목격한 두 건의 죽음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는 것도 한창 때의 젊은이가 가정과 부모의 품을 떠나 외롭게 客死(객사)했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즐겁게 추억하고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주장하는 것도 결국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속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공군에서 복무한 1967~70년은 휴전 이후 남북간의 긴장과 충돌이 가장 빈번했을 때입니다. 1·21 청와대 습격기도 사건,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상륙사건, 미군 첩보기 EC-121기 격추사건이 이 기간에 일어났습니다. 일부 미군들은 이 기간을 「제2의 한국전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1966년에서 69년까지의 통계를 보면 비무장지대에서 5백40건의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기간에 북한군은 후방에 제2전선을 형성하려고 특공대를 침투시켰고 그런 남북 쌍방의 충돌로 전사한 북한군은 3백97명, 전사한 한국군과 미군은 3백64명이었습니다.
이 무렵 북한군은 戰力(전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한국군은 2개 전투사단을 월남에 보내놓고 경제건설에 주력하고 있던 취약期였습니다. 위기감을 느낀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1·21 사태 이후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나서게 됩니다. 그는 또 한편으론 7·4 공동성명을 통한 평화공존 정책을 추구하여 체제경쟁에 필요한 시간을 벌려고 했습니다. 이 시기에 남북 양쪽이 취했던 정책의 결과가 오늘날의 남북 격차로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30년 전을 뒤돌아보면서 그런 결정적인 시기에 「3천만의 불침번」으로 밤마다 올빼미가 되어 레이다 스코프를 들여다보며 조국의 하늘을 지켰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尙武정신이 민족성의 改造를 촉발
대한민국에서 군인이었던 사람, 그리고 지금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많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건설에 크게 기여한 직업群으로서 1위 군인, 2위 기업인, 3위 관료들을 꼽습니다. 국군의 역사적 역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군은 건국 과정에서 좌익들의 도전을 누르고 스탈린이 金日成(김일성)을 조종하여 일으킨 6·25 남침전쟁에서 조국을 방위함으로써 대한민국뿐 아니라 자유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지켜냈다. 군은 또 조국 근대화의 권력기반이 되어 정치를 안정시킴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다. 장교단은 미국식 先進(선진) 조직경영 기법을 가장 먼저 배워와 근대화 시기에 행정조직과 기업경영에 가르쳐주었다. 국군은 또 越南(월남)파병을 통해서 해외로 뻗어나가는 한민족의 선도자가 되었다. 1980년대의 민주화 격변기에는 金日成 집단의 도전과 공작으로부터 한국 사회를 보호하여 소란한 민주화의 과정을 관리하는 한편 정권변동기에는 자제하고 인내하여 文民(문민) 우위의 새로운 정치질서에 적응하였다. 국군은 남북통일기에는 한반도의 평화를 보장하고 북한에 우리의 영향력을 투입하는 기본 역량이 될 것이다. 국군은 대한민국 主導(주도)의 평화통일을 뒷받침하는 통일武力(무력)이 될 것이다. 통일 뒤에도 국군은 동북아의 번영과 평화를 보장하는 안전판으로 남아 조국이 자주 독립 번영의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國權(국권)의 수호자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건설기에 우리는 세계적인 强軍(강군)을 먼저 만들고 이 强軍의 後見(후견) 속에서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적인 기업이 생겨났습니다. 强軍과 대기업이 만들어낸 것이 대한민국의 튼튼한 骨格(골격)이었고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의 진통도 國基(국기)를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를 좁게, 토막으로 보면 군대가 민주화를 방해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넓게, 큰 흐름으로 파악한다면 국군은 민주화의 후견인이었던 측면이 훨씬 강합니다. 국가건설기의 국군은 국민국가를 건설한 지가 오래 되고 성숙기에 있는 선진국의 군대처럼 국방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습니다. 역사와 국민, 그리고 국가의 상태가 국군에게 다른 역할-국가근대화와 국내안보의 임무를 맡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문제가 있다면 군대와 기업보다는 정당입니다. 군대와 기업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는데 정당은 봉건시대의 朋黨(붕당) 수준입니다. 이런 붕당적인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약점을 감추고 선진된 군대와 기업을 동네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金大中 대통령에 의한 경제개혁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근본적인 의문도 후진된 정치세력이 어떻게 선진된 기업을 제대로 뜯어고쳐 놓을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귀착됩니다.
몇년 전에 미국에서 나온 「전쟁을 하는 방법」이란 일종의 군사편람이 있습니다. 군사전문가인 제임스 F 더니건이 쓴 이 책에서는 세계 각국의 군사력을 양과 질을 두루 감안하여 順位(순위)를 매겼습니다. 1등은 미국으로서 총점이 2,379점. 2등은 중국으로서 1,898점. 3등은 러시아로서 1,719점. 4등은 1,020점을 받은 대한민국, 북한은 389점, 일본은 352점이었습니다.
이 순위매김은 핵무기를 계산에 넣지 않은 재래식 군사력 중심이란 한계가 있지만 우리의 군사력이 경제력이나 정치력보다 앞서는 세계적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조선시대의 趙光祖(조광조)가 무덤에서 깨어나 오늘날의 군사문화를 살펴본다면 『이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야』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환생한 신라 사람들은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군』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조선조 시대 자주국방의 의지와 尙武(상무)정신의 불씨를 꺼버리고 5백여년을 살아왔던 우리 민족이 불과 반세기 만에 거대한 군사력을 건설했다는 것은 경제건설과 민주화 이상의 위대한 업적입니다. 민주화와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국내외의 평가가 찬란하지만 군사건설에 대한 평가가 매우 인색한 것은 국군이 그동안 제대로 된 가치관과 자기 설명의 논리를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처럼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 같았던 군사전통을 되살려 强軍을 만들어낸 경우로는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유태인들은 머리는 영리하고 아는 것도 많지만 단결력과 尙武정신이 약하다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2천년간 세계 도처에서 당하기만 해왔습니다. 히틀러에 의한 6백만 유태인 학살은 「자위능력이 없는 머리 좋은 민족」의 한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세운 뒤에는 민족성이 改造(개조)되었습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머리 좋은 사람들이 단결하고 엘리트를 장교로 보내고 하니까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인 군대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한국인과 유태인들의 文弱(문약)한 민족적 체질을 바꾸도록 한 매개체는 바로 국가였습니다.
국가란 공동체를 만들고 지키려는 몸부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군대가 강해지고 尙武정신이 되살아난 것입니다. 국민 국가는 흩어지기 쉬운 민족의 열정을 조직하여 武力(무력)으로 변화시키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민족은 無力할 수 있으나 국가는 武力 없인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익을 추구한다고 하여 국민들의 신뢰를 받는 조직은 거의 없습니다. 국민회의, 자민련, 한나라당, 공무원, 언론, 시민단체 등 많은 조직 가운데 선뜻 집단이기주의 대신 국익을 우선시키는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름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國軍! 그렇습니다. 국군에 대해서만은 대다수 국민들이 국가이익을 수호하는 조직이라고 신뢰를 보냅니다. 그런 점에서 국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조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국의 여왕, 일본의 천황이 그 나라에서 차지하는 정신적인 支柱(지주) 역할을 대한민국에서는 국군이 맡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군이 위대한 것은 능력 때문이 아니라 國土, 國民, 國益, 國權을 수호하도록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우리 헌법 제5조 2항은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외침의 격퇴뿐만 아니라 國基의 수호는 국군의 헌법상 의무입니다.가령 이상한 정치세력이 나타나서 적과 내통하여 국토를 떼준다든지, 「反국가단체」인 북한을 독립주권국가로 인정하면서 헌법상의 자유민주주의式 통일을 포기하고 국체를 변경하려는 음모를 꾸밀 때 국군은 이런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군대경험을 통해서 국민으로서의 自我(자아)를 발견하였습니다. 국가나 애국심이란 단어는 거창하고 모호하게 들리지만 군복을 입고 총을 잡고 철책선에 섰을 때 국가는 구체적으로 實感(실감)할 수 있는 실체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국가의 중요성에 대한 共感(공감), 國權이 있어야 人權이 보장된다는 것의 체험, 國權과 國益은 군사력으로써만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신. 국민 각자의 이런 自覺(자각)들이 쌓일 때 대한민국은 국가로서의 自我를 확립하여 비로소 독립, 자주, 주체에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李舜臣보다는 金庾信
군인이 군인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려면 군사사상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군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 우리 민족사의 흐름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적인 强軍을 건설할 수 있었던 능력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강의 제국인 唐과 맞서 한반도를 지켜낸 신라의 尙武정신, 동서양을 석권한 몽골제국 기마군단의 침략에 수십년간 저항했고 그리하여 굴복한 뒤에도 그들의 존경과 배려를 쟁취했던 고려의 군사전통. 이런 민족의 유전인자가 조선조 시대의 문약한 사대주의 풍조에 잠시 억눌려 있었던 것뿐입니다. 대한민국은 조선조 이전의 우리 민족이 가졌던 野性(야성)을 다시 발견하여 상무정신으로 계승하였고 그리하여 세계 제4위의 군사강국을 건설했던 것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획기적인 의미는 尙武정신의 재발견과 富國强兵(부국강병)의 건설 과정을 촉매제로 하여 문약하고 사대적이던 민족성을 改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改造는 無에서의 창조가 아니고 묻혀 있던 야성을 재발견한 것입니다.
고려의 군사력은 당시 중세유럽의 기사단과 맞붙었을 경우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군사력은 로마의 군사력보다 우세했습니다(주로 기마전술의 우수성 때문). 북방초원을 무대로 뛰던 유목민족의 후예인 우리 민족의 군사적 체질은 세계사의 2大 군사문화 중 하나를 그 發源地(발원지)로 하고 있습니다. 중무장 보병을 주력으로 한 로마군단과 全員(전원)기병 체제인 북방초원의 기마군단. 이 두 직업적 戰士團(전사단)이 동서양의 군사문화를 대표했습니다(중국은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만들지 못한 점에서 군사적 전통에서 아주 취약했습니다). 우리는 초원의 기마군단과 이어지는 군사전통의 국가라는 自覺이 필요합니다.
화랑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생긴 武士團(무사단)입니다(일본의 경우 사무라이가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서기 12세기 전후). 국가와 통일이란 이념을 공유한 엘리트 戰士들이었다는 점에서 화랑도는 아주 높은 수준의 군사사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국군은 북방 기마민족과 신라 화랑도란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전통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유전자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국군이 민족사 속에서 존재 의미를 제대로 자각하고 이를 남북통일기에 활용하려면 李舜臣(이순신)보다는 金庾信(김유신)을 더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李舜臣 장군의 생애는 성공적이라기보다는 「비장한」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군대를 경멸하고 전쟁의 본질에 무식한 文弱한 선비들이 정치를 지배하던 시대에 그분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왜적과 싸우는 戰線사령관을 불러들여 고문하고 옥살이시키는 文民(문민) 지배층 때문에 희대의 名將 李舜臣은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 수가 없었습니다.
반면 지도층이 전쟁, 통일, 자주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명예심과 자존심에 차 있었던 통일기의 신라에서 태어난 金庾信은 「군인을 알아주는」 네 왕들을 모시고 統一大業(통일대업)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조 시대였다면 과연 金庾信처럼 兵權(병권)을 쥔 2인자가 수십년간 생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이 쿠데타를 하든지 1인자에 의하여 거세되었을 것입니다.
唐, 고구려, 백제, 일본을 상대로 하는 16년에 걸친 국제전쟁을 지휘하여 민족통일국가를 만들어낸 金庾信의 생애는 그래서 비장하기보다는 장엄합니다. 79세까지 長壽(장수)한 대장군으로서 통일의 꿈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남북통일을 앞둔 우리 국군이 「대표화랑」(풍월주) 출신인 金庾信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통일의 조건을 알게 될 것이고 오늘날 한국에서 군인으로 살아가는 존재 이유와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인기리에 연재되어 온 「民族史의 제1인물 金庾信과 그의 시대」를 이번 호로 마감하면서 저는 이런 꿈을 꾸어봅니다.
「이 글을 읽은 독자 가운데 그 누군가는 21세기형 金庾信이 되어 남북통일의 大業을 주도할 것이다」
세계 7大 선진국인 G7 국가의 공통점은 모두 찬란한 군사전통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탈리아는 로마군단의 전통을, 프랑스는 루이 14세 때 최초의 상비군 제도를 확립한 전통을, 영국 미국 캐나다는 식민지 개척경쟁에서 승리한 해군국의 전통을, 일본은 동양적 무사집단 지배의 전통을 가진 나라입니다. 군사전통은 일류국가의 조건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 중국, 한국, 베트남 같이 文民지배층이 오랫동안 다스린 나라는 自力에 의한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또는 半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하는 話頭(화두)는 독자 여러분의 몫입니다. 대한민국과 통일신라는 우리 민족사에서 국제적인 위치가 가장 높았던 두 시기입니다. 이 두 시기의 공통점은 왕성한 尙武정신이었다는 사실은 앞의 話頭를 푸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1세기형 金庾信을 기다리면서
'국군의 날'에 군대를 생각한다.
출처 : 1999년 월간조선 10월호에 실렸던 '편집장의 편지' 재록 | |
[ 2012-10-01, 11:38 ] |
'軍事 資料 綜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미 탄도미사일 사거리연장과 남북간 비대칭전력문제/ 유용원의 군사세계 (0) | 2012.10.11 |
---|---|
미사일사거리 8백km 확대에 중일 반응이… / 서울신문 (0) | 2012.10.07 |
[사설] 독도·이어도 사태 보며 더 걱정스러운 대선 후보 安保 역량/ 조선일보 (0) | 2012.09.27 |
9월 동안 벌어진 중국군 훈련모습들.../ 유용원의 군사세계 (0) | 2012.09.27 |
[밀리터리 스토리] 함정 명칭 부여와 의미 (0) | 2012.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