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CTS 새벽종소리] 2012년7월6일 QT - 기도의 능력 (도서/사진/말씀)

鶴山 徐 仁 2012. 7. 9. 00:46



기도의 능력


유대인들은 관습적으로 하루에 세 번, 즉 오전 아홉 시, 오후 세 시, 해지는 저녁 시간 이렇게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기록된 “제 구시 기도 시간”은 바로 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을 의미합니다.
-김남준의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서 생깁니다. 기도의 능력은 하나님앞에 습관적으로 매일 나아가는 훈련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글쓴이 : 이재학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선교학)박사학위(Ph.D) 수료
하늘땅교회 담임목사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도 입히시는 아버지 하나님.
곤핍한 우리 인생들이 쉴 곳을 얻도록, 거할 곳을 찾도록 인도하소서
글쓴이 : 김민수 현)백석대학원 미술학과 박사과정
현)기독교 대안학교 그레이스 아카데미 자문위원/미술강사
현)스타선교회 홍보사역
현)크로스인 대표/디자이너
불의한 자의 집 - 욥 18:13-21
13.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마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

14.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15.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거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16.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것이며

17.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18. 그는 광명으로부터 흑암으로 쫓겨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19. 그는 그의 백성 가운데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을 것이며 그가 거하던 곳에는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

20.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21.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하나님 없이는 소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불의한 자들은 죽음에 휩싸일 때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어 두려워하며 절망합니다. 빌닷은 욥이 바로 그런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 단언했습니다.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그동안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한 죄를 범하며 불의한 자로 살아왔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이 죄를 뉘우치고 회개에 이르게 하기 위해 끔직한 죄인들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의한 자들의 최후는 불행합니다. 그럼에도 욥은 빌닷이 확신한 그런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빌닷은 더 신중하고 더 많은 분별력을 가져야 옳았습니다.

질병이 삼킨다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키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의 지체를 먹을 것이며>(13절).
특히 <질병이 그의 피부를 삼킨다>는 말은 욥의 피부병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죄는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의 일차적인 요인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질병이 다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주님은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자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고도 하셨습니다. 욥의 질병 역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빌닷의 예단 같은 불의한 자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잖습니까?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모든 질병이나 불행이 다 죄값이라고 성급히 규정하지 맙시다. 그것은 결코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공포의 왕에게 잡힌다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장막에서 뽑히며 그는 공포의 왕에게로 잡혀 가고>(14절).
죽음은 확실히 최악의 두려움입니다. 가히 <공포의 왕>이라 할 만큼 위협적입니다. 불의한 자의 죽음이란 그야말로 죽음의 대왕에게 끌려가는 가장 끔찍한 최후입니다. 오죽하면 주님 조차도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눅 22:42)하시며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시며 기도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들의 죽음은 공포와 고통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최후는 가장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천국으로의 대로를 터주셨기에 성도들의 죽음 앞에는 막힘이 없으며 결코 죽음의 대왕이 출현하지 못하고 빛과 영광의 길이 펼쳐질 뿐입니다. <거기 거룩한 그 길에 검은 구름 없으니 낮과 같이 맑고 밝은 거룩한 길 다니리>(새찬송가 242).

유황이 처소에 뿌려진다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의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의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15절).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악인의 마음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도 임하여 모든 나무와 돌을 함께 태워버린다<(슥 5:4)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처참함과 참혹함은 마치 유황이 비처럼 쏟아져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같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빌닷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 다 타버렸다는 욥의 양떼와 종들을 생각하며 이런 표현을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하늘에서 유황불이 쏟아진다면 살아남을 사람이나 짐승이 있겠으며 멀쩡할 집이 있겠습니까? 아무튼 불의한 자의 집은 그렇게 망하고 소멸될 것이라는 게 빌닷의 확신인데 그것도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역시 욥과는 상관없는 주장입니다. 욥의 처소는 유황불에 멸절되기는커녕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42:12) 주셨다고 했고, <아들과 손자 사 대>(42:16)까지를 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부디 당신의 처소가 유황불의 심판이 아니라 욥과 같이 갑절의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한 가정되시길 빕니다.
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