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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 욥 17:11-16 |
11.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디 끊어졌구나
12.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13.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매
14.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15.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6. 우리가 흙 속에서 쉴 때에는 희망이 스올의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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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암울한 시련 속에서도 우리가 과연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혹독한 시험 한가운데서도 우리가 과연 강건함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금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확신할 때만 가능합니다. 욥의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처절한 고난은 분명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의 시련의 원인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고하신 우주의 통치자께서 내 인생에 대한 당신의 계획에 따라 그때 그때 필요한 시련을 허락하고 계시다고 믿는 겁니다.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짐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11절). 욥의 절망적인 고백이 마치 바울의 간증과도 같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 닥치는 최악의 환난은 절망이 아니라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라는 주님의 계시입니다. 거기에 바로 우리들의 희망이 있습니다. 고난이 얼마나 혹독했으면 <사형선고>로 느꼈을까요? 그럼에도 그 절망적인 시련을 구원의 희망으로 간증하는 바울을 보십시오. <오직 …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심이라!> 절망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는 자에게는 절망이 또 다른 이름의 희망임을 확신하십시오.
침상을 흑암에 펴놓음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내 침상을 흑암에 펴놓으며>(13절). <스올이 내 집이고, 침상이 흑암에 있고, 무덤이 아버지, 구더기가 어머니고 자매>(14절)라니 이보다 더 처절한 절망의 노래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의 시 <절망의 노래>입니다. <… 떠나야 할 시간이다. 밤이 모든 시간대를 붙잡아매는 이 딱딱하고도 냉한 시간 소란스런 바다의 허리띠가 해변을 감는다. 차가운 별들 떠오르고, 검은 새들 날아간다. 동틀 녘 부두처럼 버려진 사내, 그의 떨고 있는 그림자만이 내 손 안에서 몸부림친다. 오, 무엇보다 멀리, 오 무엇보다 멀리 떠나야 할 시간이다. 버림 받은 사내!>(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키에르케고르도 절망을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희망을 포기하지 않음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15절). 욥이 지금 절망의 맨 밑바닥까지 추락하여 <나의 희망이 어디 있느냐?>며 비명처럼 외치고 있습니다. 하기야 죽은 자에게는 절망도 없습니다. 짐승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한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아있음을 뜻합니다. 또 살아 있는 한 아직은 가능성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가 감사하며 희망을 부르고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절망을 겪어봐야 희망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비록 오늘 흐리고 바람 불고 천둥이 치며 요란하다 해도 날이 개면 다시 밝고 환한 세상이 옴을 믿기에 우리는 결코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부디 희망을 외치며 기도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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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성노 독일 본(Bonn) 대학교 신학부 졸업 뮌헨(Muenchen) 대학교 신학부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역임 푸른교회(분당 소재)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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