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서울대 상과대 조교였던 김수행(성공회대 석좌교수)이 큰일 났다며 연구실로 안내했다.
가보니 북한에서 내려온 서적이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마르크스 선집' '레닌 선집' '스탈린 선집'….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쪽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중략) 저녁때를 기다려 책들을 변소(당시는 재래식)에 처넣고 말았다. 신영복을 찾아가 우회적으로 이야기하자, 그는 왜 그런 일을 자기와 상의 하느냐고 항의했다. 학교의 좌경화 분위기는 더 고조되었고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졌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1960~70년대 자신이 체험한 좌익 운동의 내막을 털어놨다. 일부 관련자들의 실명까지 들었다. 24일 출간된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시대정신)에 실린 증언 '민주화 운동과 민주주의: 좌익 운동을 중심으로'를 통해서다.
안 교수는 당시 좌익 세력은 표면적으로는 민주화를 내걸었지만 핵심은 북한과 같은 인민민주주의나
신(新)민주주의, 즉 비(非)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길인 인민혁명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또 당시 정보 수사기관이 조사해 발표한 대부분의 보도 내용들이 기본적으로는 대개 사실이었다고 했다. 다만 개별 구성원에 대한 수사 결과는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았고 가혹한 형벌이나 상식 밖의 형집행도 있었다고 했다. 다음은 그의 증언 요약.
◆4·19 이후 좌익 다시 고개들기 시작
6·25 이후 반공주의가 지배했다가 4·19 학생의거가 터졌을 때 진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운동뿐만 아니라 남로당 계열을 잇는 사회주의, 통일 운동 등도 '아, 이제 숨 쉴 때가 됐다'며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 첫 사례가 62년 1월 결성된 자생적 공산주의 정당인 인혁당(인민혁명당)이었다. 그 무렵 나는 대학원 입학 후 박현채(전 조선대 교수·빨치산 출신)의 지도를 받으며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 책을 탐독했다.
인혁당의 목적은 학생 운동을 지도하고 하부조직을 이식하는 것이었다. 북한과의 직접 접촉은 없었다. 인혁당에 가입한 일은 없지만 발각될 무렵 나는 후보위원 정도는 돼 있었을 것이다. 구속만 거의 50여명에 이르고 조직 강령까지 나왔는데 재판에서 처벌받은 사람은 소수였고 형량도 2·3년 이하에 불과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나 경찰 수사내용이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라는 이유로 뒤집힌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