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잊혀 진 기갑부대의 명장 [ 2 ]

鶴山 徐 仁 2010. 11. 16. 10:20

august 의 軍史世界

 

잊혀 진 기갑부대의 명장 [ 2 ]

 

 

 

새로운 이론을 귀담아 들었던 장군

 

클라이스트는 1881년 8월 8일 독일 헤센(Hessen)에서 태어났는데 성(姓)에 폰(von)이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명한 귀족가문 출신입니다.  그의 유년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세가 되던 1900년 제3친위포병연대에서 소위로 군무를 시작하여 직업군인의 길을 간 것으로 보아 어려서부터 무인이 되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

 

[ 귀족들은 전통적으로 독일군의 지휘 계층을 이루었습니다 (독일제국군) ]

 

초급 장교시절인 1908~1912년 사이에 하노버의 기병학교, 베를린의 일반 참모연수원등에서 공부하며 고급장교의 자질을 쌓은 클라이스트는 영관급 장교가 된 30대 중반에 제1차 대전을 맞아 탄넨베르크전투에 기병대지휘관으로 참전하였고 이후 사단본부나 군단본부 등에서 참모로 근무하는 등 주로 동부전선에서 활동하였습니다.

 

[ 제1차 대전 당시의 독일기병대 ]

 

종전 후 독일군이 승전국의 군비축소 압력에 의해 강제적인 감군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이스트는 군에 계속 남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군인으로써의 재능이 뛰어남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이마르공화국시절에 주로 기병부대의 참모나 전술연구관 등으로 근무를 하였고 1932년에 장군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 독일장군의 상징인 지휘봉 ]

 

1930년대 중반은 나찌가 베르사유조약을 파기하면서 재무장과 함께 독일군의 엄청난 팽창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더불어 군내부에서는 장차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때였습니다.  이때 전차와 차량화보병을 집중하여 상대의 종심을 순식간 타격하여 제압한다는 새로운 개념의 전쟁을 주장하던 구데리안(Heinz Guderian)같은 인물들의 주장이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장차있을 전쟁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재군비와 더불어 조직된 초창기의 독일 기갑부대) ]

 

클라이스트는 참모로써의 경험도 풍부했지만 야전에서는 주로 기병부대를 지휘하였기 때문에 기동전에 대해서 이해가 높았던 편이었고 기병대를 대신하여 장차전에서 기동전의 주역이 될 기갑부대에 대해서 당연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구데리안같은 후배들의 새로운 의견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귀담아 들었습니다.

 

[ 기갑부대의 개척자인 구데리안 ]

 

제2기병사단장을 거쳐 1935년 제8군단장이 된 클라이스트는 1936년 8월 독일의 실레지엔 무혈점령 당시 부대를 지휘하였으나 나찌의 독재와 전횡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이런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집권층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군부 대숙청이 있던 1938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역하여 군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 클라이스트는 나찌의 군부 숙청으로 군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

 

하지만 라인란트 주둔, 오스트리아 합병, 수테덴 병합, 실레지엔 점령당시와는 달리 단찌히를 내어 놓으라는 독일의 외교적 협박에 굴하지 않고 폴란드가 끝까지 맞서기로 하자 전쟁의 발발이 예견되게 되었습니다.  비록 힘으로 폴란드를 누를 자신도 있었고 겉으로는 강한척하였지만 내심 영국과 프랑스가 두려웠던 히틀러는 막상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벌이려하자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1936년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군대를 주둔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연합군의 반격을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폴란드와 전쟁을 벌이는 동안 등 뒤에 있는 프랑스와 영국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들이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빨리 폴란드를 박살내어 점령하는 방향으로 침공 작전이 수립되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예비부대가 폴란드 침공전을 앞두고 새롭게 동원되는데 이를 지휘할 많은 지휘관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 전쟁을 앞두고 클라이스트(右)는 현역으로 복귀합니다 ]

 

반 나찌성향으로 군복을 벗었던 클라이스트도 이런 이유로 예편된 지 1년만인 1939년 8월 58세의 나이로 현역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전쟁말기였으면 정치적 성향 때문에 어려웠겠지만 1939년만 해도 히틀러는 군부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였고 군부 자체의 입지를 어느 정도 인정하여 군내부에서 신망이 높았던 클라이스트의 복귀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